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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관] 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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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 WHITE







내가 아는 ㅁ에게

내가 모르는 ㅁ에게

무수히 사라져 간 ㅁ에게

장차 만날 ㅁ에게







<성우장 202호>



1.


Kwaaang!


그리고 모든 게 멈추었다.

또한 시작되었다.


모든 지나간 순간들이 그 이전과 이후를 연결하는 방식 그대로.


가장 놀라운 것은 정적.


낡은 엔진을 쥐어짜며 밤 시간을 달리던 마을버스가 길 밖으로 왈칵 머리를 처박고,

급제동이 몰고 온 힘의 물결에 손잡이를 놓친 승객 몇이 심하게 비틀거리거나 차 바닥에 엎어진다.

여기저기서 짧은 비명이 터져 나온다.


-아이고 아버지.


키 작은 중년 여인이 무릎을 짚고 일어서며 웅얼거린다.

휴대폰을 쥐고 양 엄지로 열나게 문자 메시지를 찍던 고등학생이 놀란 얼굴을 쳐든다.

뒷자리 누군가 떨어뜨린 비닐 봉투에서 과일 두 알이 데굴데굴 구른다.


감쪽같이 멈춘 것들 사이의 공백.


그 정적이 실로 경이하다.

버스 안 승객들이 힘을 모아 거짓을 연출하는 것 같다.


사태를 파악한 사람과 미처 그러지 못한 이들이 비현실적인 정적 사이로 불안한 시선을 기웃거린다.


운전대에 양팔을 얹은 버스 기사가 절망적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다.


전면 차창, 빗줄기 흐르듯 사선으로 길게 한 줄 금이 갔다.

방금 전 충돌의 생채기다.


승객 몇이 차창으로 모여든다.


산허리를 넘어가는 고갯길.

저편 어둠을 향해 길게 굽은 아스팔트에 누군가 엎어져 있다.


-죽었나?


누군가 조심성 없이 속삭인다.


치이익.


앞문이 열렸다.

기사가 황황히 몸을 일으킨다.

씨이발, 짧은 기도를 뱉으며 버스 밖으로 내려선다.


벽돌 색 점퍼의 남자 승객 한 명이 조심히 뒤를 따른다.


딸깍. 딸깍. 딸깍. 딸깍.


버스 안 거짓된 정적 속에 비상등 신호음만이 태연하게 이어지고 있다.


모를 일이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그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중인지.

인적 드문 길 위로 부러 뛰어든 것인지

어두운 커브 길을 바삐 달리던 버스가 손 흔드는 사람을 미처 발견 못한 것인지.


아스팔트에 누운 사람이 꿈틀, 움직인다.

버스 기사와 벽돌 색 점퍼가 흠칫 놀란다.


지켜보던 승객들이 작은 탄성을 터뜨린다.


-살았나 봐.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여자다.

큰 키, 짧은 머리에 짙은 색 바지 정장을 입었다. 어두웠으므로 그게 쥐색인지 남색인지는 분간할 수 없다.


-멀쩡하잖아? 오, 주여.


이윽고, 두 남자를 비껴 선 여자가 버스에 올라탔다.

운전석 바로 뒷자리에 사뿐히 등을 기대고 앉는다. 방금 전 아스팔트 바닥에 누워 있던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모습이다.


승객들은 나쁜 짓 하다 들킨 것처럼 어쩔 줄을 모른다.


-아이고, 괜찮아요? 큰일 나는 줄 알았네.


누군가 용기 있게 말을 건넨다.


여자가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쑥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물고 고개를 까닥, 한다.


버스 기사와 벽돌 색 점퍼가 뒤이어 버스에 오른다. 나쁜 꿈을 꾸는 표정들이다.

버스 기사가 우물쭈물 여자 앞에 다가간다.


그러나 그뿐.


이 어두운 길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면 어쩌냐고 따지지도 병원부터 가 보자고 권유하지도 못한다.


오른쪽 범퍼 위, 손바닥 넓이로 움푹 들어간 자국.


방금 전 충돌에 새로 생긴 흔적이 지금 그의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딸깍. 딸깍. 딸깍. 딸깍.


팽팽한 정적 속에 비상등 신호 음만 내내 이어지고 있다.

막차의 시간이 하염없이 흐른다.


“나 정말 괜찮아요.”


우물쭈물 서 있는 버스 기사를 향해, 여자가 입 열었다.


“어서 가세요, 아저씨.”


별수 없이 물러선 그가 운전석으로 돌아가 앉는다.

크르르륵, 기어 걸리는 소리.


짧은 시간 잠들었던 마을버스가 다시 몸을 뒤챈다.

길가 쪽으로 디밀었던 머리를 빼내며 조심조심 뒷걸음질을 친다.


휴대폰을 쥔 남학생이 다시 문자를 찍기 시작한다.

누군가 버스 바닥에 굴러다니는 사과 두 알을 집어 든다.

한 순간이 그렇게 지나쳐 간다.


조금 전, 도대체 무슨 일이?



2.


당신을 만난 것은 그로부터 여섯 정거장이 지나서다.


버스에서 내린 나는 어두운 횡단보도 앞에 서서 잠깐 머뭇거렸다.


맥주 때문이었다.


성우장으로 가려면 길을 건너야 했고,

주변에 가게라곤 정류장 이편의 상신마트밖에 없었다.


맥주라?


술이라면 이미 적당했다.


물론 잠자리 들기 전에 몇 잔 더 해도 괜찮을 것 같고, 그러지 않는 게 나을 듯도 싶었다.


지나치려니 섭섭하고 행동에 옮기려니 내키지 않고.


그때 당신이 내 앞에 불쑥 나타났다.


당신이 내 앞에 불쑥 나타난 게 아니라

내가 당신 앞에 철퍼덕 던져졌다 해도 무방하다.


철퍼덕 던져진 나는, 아주 잠깐이지만, 당신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3초.

또는 4초.


그리하여 나는 내심 당황했다.

당신 때문이었다. 당신이 내뿜는 어떤 기운 때문이었다.


낯익음.


송구스럽지만 내가 겪은 당혹의 정체란 그러했다.


낯이 익다고?

아니, 도대체 어째서?


그게 불만이거나 이해하기 힘들다면 슬그머니 말을 바꾸어 보겠다. 낯설지 않음, 이라고.


그래. 그날 밤 인적 드문 길가에서 처음 만난 당신이

낯익음 아닌 낯설지 않음을 통해 그토록 나를 당황케 했다는 사실을

아마도 당신은 기억 못할 것이다.


174센티미터, 네 걸음 반.


당신과 나의 거리를 지금도 분명히 떠올릴 수 있다.

그 자리에서 당신을 향해 철퍼덕, 엎어졌더라면 키 174센티미터의 내 머리끝이 당신의 구둣발에 정확히 가 닿았으리라.


그러고 보면 뜻하지 않은 순간들이란 늘 결정적이다.


요컨대 횡단보도 앞에 선 그 순간,

느닷없는 맥주 고민으로 머뭇거리지만 않았더라면!


큰 키. 짧은 머리에 짙은 색 바지 정장.


당신은 멀쩡해 보였다. 적어도 겉보기엔 그랬다.


“저기요.”


하고, 당신이 느닷없이 말했다.


“여기가 어디죠.”


놀라운 것은, 느닷없이 그 사건이 나를 조금도 놀라게 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당신의 느닷없는 저기요, 를 내심 기다리기라도 했단 말인가.


“도대체 여기가…….”


내가 대꾸했다.


“만화리입니다.”


“만화리?”


당신이 눈을 크게 떴다.

세상에 그렇게나 이상하고 요상한 소리는 처음 들어 본다는 듯.


“그렇습니다.”


화장 자국도 쌍꺼풀도 없는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만화…… 만화리…… 중얼거린다.


“만화리가 도대체 어딘데요?”


“바로 여기죠. 그렇게 묻고 계신.”


“……그렇다면 여기가, 만화리가, 아주 먼 곳인가요? 그러니까 큰 도시로 가려면.”


아까의 사고로 머리를 다친 것 아닐까.

단기 기억상실증이라든가.

언어 담당 뇌 중추의 손상이라든가.


“시내까지 안 멀어요. 막차는 끊겼지만, 나가는 택시가 종종 있거든요.”


저편에서 승용차 한 대가 다가오더니,

왜 그러는지 당신과 내가 서 있는 어름에서 잠시 속도를 줄이다가,

다시 바람을 일으키며 지나쳐 갔다.


“그런데 지금 몇 시죠?”


당신이 무척 지쳐 보인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 했다.


“지금이…… 11시 48분이군요.”


밤새 일천 이백 개의 접시를 닦고

스무 바구니의 빨랫감을 세탁한 뒤

분수대 딸린 장미 정원과 객실 열다섯 곳을 쓸고 닦고 걸레질하고 난 것 같은.


“11시 48분?”


“48분 57초. 58초. 59초. 49분.”


“저기요, 그런데 말이에요, 그렇다면.”


“그렇다면.”


“그렇다면 나는, 나를, 내가, 지금 왜 이러고 있는지 혹시 아세요?”


“예?”


“그러니까 지금, 11시 48분도 49분도 넘어서, 만환지 뭔지 하는 동네에서 왜 이렇게 헤매고 있는 건지.”


그러더니 피식 웃는다.


“미안해요. 괜한 거 물어봐서.”


“괜찮습니다.”


“내가 취했나. 많이 마시지도 않았는데.”


밤 시간. 횡단보도 위로 노란 점멸 신호등이 깜빡깜빡 졸고 있다.


어두운 찻길 위로 이따금씩 8톤 트럭이나 낡은 승합차가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지나쳐 간다.


잠 없는 들개가 길을 건너다 옆구리 터져 죽기에 딱 좋은 시간이다.


“저어, 더 하실 말씀이.”


“없어요.”


“그럼 전 이만 가 볼게요.”


“아, 실례 많았어요.”


“천만에요. ……안녕히.”


고개를 까딱, 해 보인 내가 몸을 돌려 상신마트로 향하거나 잰걸음으로 횡단보도를 건넌다.

짧은 만남이 까마득하게 멀어진다.


그래야 마땅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못 했다.


그 자리에 여전히 버티고 서서 별다른 볼일이라도 남은 사람처럼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그때 나는, 당신으로부터 등을 돌릴 생각이 그다지 없었던 것 같다.


당신에게 어떤 마음을 품고 있었던 게 아니냐고?


모르겠다. 11시 49분 28초가 지나고 29초가 지나던 그 즈음,

다만 맥주 생각이 오락가락할 만큼 취했으며,

누추한 숙소가 멀지 않은 밤거리에서 누군지 알지 못하는 그러나 왠지 낯설지 않은 사람을 철퍼덕,

엎어지듯 만났을 뿐이었다.


“그런데요, 지금 어디 가시는 건가요? 댁에?”


당신이 다시 물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셈이죠.”


“하긴 밤이 늦었으니까.”


“맞아요. 자야지요.”


저편.

상신마트와 같은 건물을 쓰는 엄지치킨 문이 열렸다.

키 작은 중년 사내 둘이 쏟아져 나온다.

악쓰듯 술 취한 대화를 주고받으며 저편 삼거리 쪽으로 흔들흔들 멀어진다.


“저기요.”


“예.”


단정하게 귀를 덮은 생머리.

하얀 얼굴.

큰 키.

베이지 색 블라우스 밖으로 훤히 드러난 목덜미.


당신은 평범했다.


평범한 얼굴이란 게 사람의 첫인상을 소개하기에 얼마나 유쾌하지 못한 표현인지 나도 모르지는 않는다.


그러나 매우 고민스럽게도, 예나 지금이나 당신의 외모에 대해 그 이상 적절한 표현을 나는 찾지 못했다.


짙은 눈썹.

얇고 길고 끝이 휜 입술.

왼쪽 턱 위의 갈색 점.

작은 콧날.


과연 그 얼굴이 9시 뉴스 여성 앵커처럼 단정하고 고운 얼굴인가? 아니다.


테니스 요정 누구처럼 건강미 넘치는 미인인가? 아니다.


부산 국제영화제 개막식 사회를 맡은 여자 진행자처럼 화려한가? 아니다.


그저 평범하다.

낯설지 않고 또한 평범하다.


3―3번 마을버스에서, 사당 방면 지하철 4호선에서, 을지로 3가의 대형 지하 서점에서, 양재동 농협 할인매장에서 얼마든지 만날 수 있는 그네들, 과 똑같지는 않지만 다를 바 역시 없는.


“음, 말씀드릴 게 있는데.”


“하세요.”


“뭐냐 하면…… 하룻밤만 재워 주시면 안 될까요.”

작가 한마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