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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선狐仙 ] PART 1 -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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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1 - 프롤로그

  • WHITE

“이 이야기의 시작은 임진왜란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징비록>이란 책으로 잘 알려진 서애 유성용의 또 다른 저서는 임란병화로 소실되었지만 그 요약본이 아직 존재하고 있습니다.”


흰 장갑을 낀 준명이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수첩 크기의 한지로 만든 책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바로 이 책입니다. 이 책에는 <징비록>에선 읽을 수 없었던 몇 가지 신기한 이야기들이 실려 있습니다. 고니시가 이끄는 왜군의 선발대가 북진하던 중 있었던 기이한 일입니다. 서애 선생이 자세히 기술한 걸 보면 그 일을 겪은 사람의 이야기를 직접 들었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어떤 내용인지 궁금합니다. 선생님.”


뒷줄에 앉아있던 20대 후반의 남학생이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대꾸했다.


준명은 두 눈에 총기가 가득한 남학생과 시선을 마주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야기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선발대가 부산 동래를 치고 파죽지세로 상주에서 충주로 진격하던 때로 되돌아갑니다. 만팔 천 명의 선발대가 충주에서 여주로 들어가기 전 정예병으로 이루어진 척후병 100명이 먼저 정찰임무를 띠고 출발을 했습니다. 당시의 대략적인 상황은 이일이 가토에게 패한 4월 24일 전후로 되어 있습니다. 상주에서 패한 조선 군사들이 충주로 물러나자 왜군들은 조령과 죽령은 물론 충주까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입성하게 됩니다. 하지만 선발대 보다 반나절 일찍 출발했던 100명의 척후병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4월 30일 경, 척후병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인 호소카와 시게키(細川茂樹) 라는 자가 일본 진영이 아닌 조선 군영으로 귀환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서애 유성용은 그 생존병사를 김충선과 함께 만났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아시다시피 김충선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휘하의 우선봉장(右先鋒將)이었던 사야가(沙也加)라는 무사였지만 임란초기 3천명의 장병들과 함께 조선에 귀화한 자입니다.”


준명은 페이지를 넘기며 말을 이었다.


“여기서 서애 선생은 김충선과 호소카와 시게키 사이에 오고갔던 이야기들을 기록으로 남긴 겁니다.”


강의실에 앉아있던 수강생들의 시선이 모두 준명이 만지고 있는 오래된 책으로 향했다.


“자, 여길 보시면…….”


준명은 책갈피를 조심스럽게 넘기며 다시 입을 열었다.


“김충선이 먼저 호소카와에게 묻습니다.


‘일본이 아닌 조선으로 귀환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 질문에 호사카와는 매우 설득력 있는 대답을 합니다.


‘제가 만약 우리 진영으로 넘어갔다면 참수를 당했을 겁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나머지 병사들은 어떻게 되었나?’


‘모두 목숨을 잃었습니다.’”


준명이 책갈피 한 장을 넘기며 말을 이었다.


“‘조선의병을 만난 것인가?’


‘네. 처음엔 모두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니? 그럼 의병들이 아니란 말인가?’


‘네. 우리 병사들과 맞닥뜨린 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이 아니라면 뭐란 말인가?’


‘큐우비노키츠네.’


‘큐우비노키츠네? 구미호를 말하는 것인가?’


‘네. 믿지 못하겠지만 제가 본 것은 분명 큐우비노키츠네였습니다. 인간의 능력을 뛰어 넘는 자였으니까요.’”


준명은 잠시 책 읽는 것을 멈추고 하얀색 보드판에 큐우비노키츠네(九尾の狐)라고 쓴 뒤 부연설명을 곁들였다.


“큐우비노키츠네는 꼬리가 아홉 개 달린 여우 요괴를 일컫는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의 흥미를 끄는 건 호소카와 시게키라는 일본 무사가 구미호란 단어를 여러 번 언급했다는 사실입니다. 때문에 서애 선생도, 김충선도, 호소카와의 말을 처음부터 믿진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준명은 고서(古書)로 돌아가 다음 페이지의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호사카와 시게키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김충선도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는 듯 했다. 일본의 정예병으로 이루어진 99명의 무사들이 구미호에게 홀려 모두 죽음을 당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호소카와의 진술은 일관성이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차츰 그의 이야기에 흥미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준명은 서애 유성용이 호소카와 시게키의 진술을 토대로 그린 큐우비노키츠네의 초상화를 수강생들에게 보여줬다.


한복을 입은 매우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이었다.


미인도에서나 볼 수 있는 가느다란 눈썹과 붉은 입술, 총명하지만 어딘지 도발적인 빛이 도는 눈동자까지.


“99명이나 되는 일본 사무라이를 죽인 구미호치곤 매력적이지 않습니까?”


준명이 농담처럼 말하자 강의실에 앉아있던 수강생들은 웃음을 터뜨리거나 짧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쉽지만 호소카와 시게키의 진술과 관련된 이야기는 다음 수업시간에 계속 하겠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강의실에 걸린 시계의 시침이 어느덧 밤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가방을 챙기는 수강생들 중 몇몇은 여전히 호기심 어린 눈으로 준명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선생님.”


“네?”


“그 고서는 어디서 구한 건가요?”


오동나무로 만든 케이스에 조심스럽게 책을 담고 있던 준명이 눈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믿지 못하시겠지만……. 이 책은 족보와 함께 저희 집안에서 대대로 전해지던 서책입니다.”


“선생님 집안이 서애 유성용과 관계가 있는 겁니까?”


준명이 도리질을 치며 미소를 지었다.


“아뇨. 호소카와 시게키. 그 일본 장수가 저희 집안의 시조였어요. 호소카와는 이후 한국에 귀화해 전쟁이 끝날 때까지 김충선과 함께 참전했습니다. 그 공을 인정받아 이름과 함께 성姓도 하사받게 되었죠.”


“선생님이 호소카와 시게키의 후손이라구요?”


“네. 그렇습니다.”


준명이 대답했다.


“그럼 구미호 이야기도 사실이란 말인가요?”


한 수강생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준명에게 반문했다. 준명은 고서를 오동나무 케이스에 조심스럽게 넣은 뒤 가죽 끈으로 단단히 고정시켰다. 그리고 질문을 던진 수강생을 향해 말을 이었다.


“큐우비노키츠네는 실제로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고요?”


준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구미호는 <전설의 고향>에서나 나오는 이야긴 줄 알았어요.”



“저도 마찬가지였어요. 호선(狐仙)*이란 말을 듣기 전까진…….”


“호선요? 호선이 뭔데요?”


“신선처럼 변한 천년 묵은 여우라고 해두죠.”


“구미호는 사람이 되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신선처럼 될 수가 있죠?”


“그들 모두가 인간의 간을 빼먹거나 정기를 빨아 마시며 살아가는 건 아니니까요. 그들 중 몇몇은 인간보다 더 절제된 생활을 하며 신에 가까운 삶을 살기도 한답니다. 그들을 호선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호소카와 시게키라는 장수가 증언한 큐우비노키츠네는 어떤가요? 인간에게 위협적인 쪽인가요 아니면 선생님이 말한 호선에 가까웠나요?”


“그건 다음 주 금요일 수업을 들으면 알 수 있을 겁니다.”


수강생들의 아쉬운 탄성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준명은 그들에게 눈인사를 건넨 뒤 강의실을 나갔다. 몇몇 수강생은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까지 쫓아와 질문을 던졌다. 대부분은 호소카와 시게키라는 일본 사무라이가 혼자 살아남은 방법이나 이유, 그 뒤의 일에 대해 궁금해 하는 것 같았다.


끈질긴 몇몇 수강생들을 따돌리고 겨우 주차장으로 내려온 준명은 비상계단을 이용해 자신의 흰색 승용차가 있는 지하 3층으로 내려갔다. 계단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벽을 보며 주차된 흰색 아반떼가 서있었다.


준명은 익숙한 동작으로 키를 꺼내 뒷좌석을 열고 고서가 담긴 오동나무 케이스와 가방을 던져 넣었다. 운전석으로 돌아가던 준명이 멈칫거린 건 그때였다. 평소와 달리 주차장의 일부 전등이 꺼져 있었는데, 그 꺼진 어둠 속에서 어떤 살기를 느낄 수 있었다.


준명은 자동차 뒤로 되돌아가 트렁크를 열었다. 트렁크 뒤에는 준명의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오던 일본도가 있었다. 호소카와 시게키의 목숨을 구하기도 한 그 일본도는 살아있는 생물처럼 위험을 감지하면 스스로 몸을 떨어댔다. 준명이 칼집에 손을 가져가자 ‘징’하는 울림이 느껴졌다.


“모습을 드러내시지.”


준명이 어둠을 향해 소리쳤다. 잠시 뒤 그 어둠 속에서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크크크.”


“원하는 게 뭐지?”


“몇 가지 물어볼 게 있어요.”


목소리가 점점 커지는 걸 보니 살기를 뿜어대는 사내가 준명 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게 분명했다. 준명은 칼의 손잡이를 힘껏 움켜잡았다.


“강의는 잘 들었습니다. 선생님.”


후드 티에 청바지를 입은 청년이 건들거리며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수업 시간에 질문을 던지던 바로 그 청년이었다. 그러나 준명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청년의 눈에서 푸른 안광이 번쩍이고 있었다.


“궁금한 게 있으면 다음 주 수업시간에 하는 건 어때요. 난 지금 바쁜데…….”


“시간을 많이 빼앗진 않을 거예요.”


“용건이 뭐죠?”


“먼저 칼부터 치워주시면 안될까요. 무서워요.”


“나도 그러고 싶긴 한데 칼이 자꾸 울어서요. 신기하게도 이 검은 위험을 감지하면 스스로 몸을 떨거든.”


“아! 정말인가요?”


준명은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탐나는 물건이군요. 선생님이 가지고 계시던 고서도 그렇고.”


“어쩌죠. 내겐 모두 소중한 물건들이라…….”


“전 꼭 그 물건들이 갖고 싶은데요.”


“불가능한 바람이군요.”


“그럼 어쩔 수 없죠. 빼앗을 수밖엔.”


청년의 눈에 다시 살기가 강하게 일었다. 동시에 준명이 쥐고 있던 칼도 심하게 요동을 쳤다. 준명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에게 검술을 배웠다. 호소카와 시게키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체계적으로 정리한 검술이었다. 칼집에서 칼을 빼내자 ‘쩡’하는 울림이 울렸다. 준명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달려오는 청년을 향해 칼날을 세웠다.


“더 이상 다가오지 마. 아니면 크게 다칠 거야!”


“크크크. 그건 선생님이 걱정해야할 일이에요.”


뛰어오던 청년이 갑자기 준명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준명은 검을 겨누다 말고 당황했다. ‘어디로 사라진 거지!’ 순간 준명의 머리 위에서 청년이 나타났다. 준명은 청년의 급습을 한 뼘 차이로 겨우 피하며 옆으로 텀블링을 했다.


‘쉬이익’


청년의 주먹이 다시 준명의 코끝을 스쳐지나갔다. 준명은 뒷걸음질을 치며 칼을 휘둘렀다.


‘쩡!’


둔탁한 충격이 준명의 오른손을 아프게 했다. 칼날은 정확히 청년의 옆구리를 강타했지만 불꽃만 일 뿐이었다. 청년의 가슴과 배에는 강철로 만든 철갑이 둘러싸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도 어떻게 깃털처럼 가볍게 몸을 움직일 수 있는 걸까? 순간 준명은 호소카와 시게키와 김충선이 남긴 대화를 떠올렸다. ‘99명의 사무라이도 그들을 당해내지 못했습니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큐우비노키츠네였으니까요.’ 그래, 큐우비노키츠네!


준명은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청년의 동작이나 빠르기가 보통 사람의 능력을 훨씬 뛰어넘는다는 사실을. 만약 그가 큐우비노키츠네라면 준명은 결코 청년을 혼자서 당해낼 수 없었다. ‘방법은 하나 밖에 없어.’ 준명은 닌자들이 사용하는 동그란 모양의 연막탄을 연거푸 청년 앞에서 터뜨렸다. 삽시간에 모든 것이 뿌연 연기 속으로 사라졌다. 그 사이 준명은 자동차의 운전석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동시에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며 최대한 빠르게 차를 움직였다.


청년은 5미터가 넘는 거리를 단번에 뛰어넘어 앞을 가로 막았다. 준명은 핸들을 최대한 왼쪽으로 돌린 뒤 유턴을 해 지하주차장을 빠져나갔다. 하지만 청년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빠른 발을 이용해 주차장 출입구를 향해 돌진했다. 중국 무협영화에 나오는 고수처럼 경공술을 사용하고 있었다. 차단기를 부수고 무작정 도로로 나온 준명이 8차선 도로에서 속력을 높인 뒤에야 청년은 추적을 멈췄다. 그는 흰색 아반떼가 사라진 도심 쪽을 노려보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흰색 아반떼는 도심을 가로지르는 도로를 140킬로미터에 가까운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준명은 블루투스 이어폰으로 누군가에게 급히 전화를 걸었다. 짧은 신호음 뒤에 낯익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네. 선생님.”


“어떻게 됐습니까?”


“그렇잖아도 전화하려던 참이었는데요. 좀 전에 주군을 만나고 왔습니다.”


“뭐라고 하던가요? 아이의 반응은?”


“반신반의 하더군요.”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어요.”


“아직 그렇게 서둘 필요까진 없잖아요.”


“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그들이라면…….”


변호사는 살짝 놀란 목소리로 반문했다.


“혹시 제가 알고 있는 ‘그들’이 맞습니까?”


“네.”


잠시 동안 수화기 너머에서 침묵이 이어졌다.


“테스트를 받고 훈련을 시키는 게 불가능하다면 그녀 역시 위험에 빠질 겁니다……. 아이를 설득하지 못했다면 제가 직접 만나보겠어요.”


“아뇨. 그럴 필요까진 없습니다. 선생님.”


“엄마를 만나겠다고 했나요?”


“네. 다행히…….”


“정말 다행이네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준명이 다시 말을 이었다.


“지금 안전가옥으로 이동하는 중이에요. 그들이 절 추적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전 그럼 어떻게 하죠?”


“변호사님도 당분간 조심하는 게 좋을 거예요. 그들이 변호사님의 존재를 알게 되면 주에게도 위험할 겁니다.”


“아, 알겠어요. 주군이 중요하니까요.”


통화를 끝낸 준명은 이마트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나와 곧장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는 대화행 3호선을 타고 독립문역에서 내려 다시 마을버스를 탔다. 오랫동안 재개발 지역으로 묶여있는 허름한 건물로 들어간 준명은 버려진 화장실 부스 중 한곳으로 들어갔다. 반쯤 부서진 대변기에 달린 레버를 내리자 벽 뒤쪽이 열리면서 안전가옥이 나타났다. 그곳에서 준명은 가져온 노트북으로 주의 어머니이자 호선인 그녀와 접속했다.


준명 : ‘드디어 그들이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호선 : ‘충돌이 있었나요?’


준명 : ‘네. 하지만 매뉴얼대로 정면승부를 피하고 빠져 나왔어요. 지금은 3지구에 있는 안전가옥입니다.’


호선 : ‘변호사님은요.’


준명 : ‘다행히 설득을 시킨 모양이에요.’


호선 : ‘그들로부터 주를 지켜야만 해요.’


준명 : ‘알고 있습니다. 저녁에 대책회의를 열 생각이에요.’


호선 : ‘저도 주를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볼게요.’


준명 : ‘그런데 어떻게 그들이 냄새를 맡았을까요?’


호선 : ‘중요한 건 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주를 단련시키지 않으면 그들을 막을 방법은 없어요.’


준명 : ‘잘 알겠습니다. 저녁 회의시간에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호선 : ‘조심하세요.’


호선과 대화를 끝낸 준명은 오동나무 케이스를 말없이 바라봤다. 호소카와 시게키를 큐우비노키츠네로부터 구한 건 다름 아닌 그녀였다. 99명의 정예병들이 치열한 결투 끝에 전멸해간 곳은 죽령 부근을 지날 무렵이었다. 그믐의 어둠 속에서 척후병들은 야영을 결정했다. 혹시 모를 조선군들의 매복에 대비해 불을 지피지 않았다. 허기진 배를 채울 수 있는 건 육포와 차가운 주먹밥뿐이었다. 호소카와 시게키는 궁수들로 이루어진 경계병을 사방에 배치하고 3시간씩 돌아가며 휴식을 취하기로 결정했다. 축시丑時*를 지날 무렵 어디선가 비명소리가 들렸다. 북쪽 경계를 맡고 있던 궁수의 목소리였다. 동시에 호소카와의 검이 떨리기 시작했다. 선잠이 들었던 호소카와는 검을 뽑아들며 동료들에게 소리쳤다.


“급습이다!”


잠에서 깨어난 사무라이들은 경계태세를 취했다. 하지만 급습이라기엔 사방이 너무 조용했다. 이따금 경계를 서고 있던 궁수들의 비명소리와 그들이 쏘아대는 활시위 소리만이 정적을 깨뜨리고 있었다. 호소카와는 무사 몇 명을 비명소리가 나는 쪽으로 보냈다. 하지만 곧 그들도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긴장이 감도는 가운데 몇 개의 안광이 번쩍이기 시작했다. 호소카와의 척후병들은 그들에게 포위를 당한 꼴이었다.


‘저건 필시 사람이 아니라 늑대 무리이거나 호랑이 일지도 모른다.’


호소카와 시게키는 조선으로 출병하기 전 호랑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조선의 산중엔 호랑이들이 많아 조심해야한다는 주의를 여러 차례 받은 기억이 났다. 호소카와는 옆에 있는 궁수의 활과 화살을 빼앗아 안광이 번쩍이는 곳을 향해 활시위를 당겼다. 하지만 그들은 화살보다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모두들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무사들이었지만 공포심을 느꼈다. 미지의 적은 빠르고 날렵했으며 쉽사리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준명은 책을 덮고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발통문을 돌리기 위해서였다. 사발통문은 보안 프로그램이 깔린 독립된 서버를 이용해 전송됐다. 거기다 암호화된 문서였기 때문에 따로 암호분석기가 필요했다. 보내기 버튼을 누른 뒤 준명은 안전가옥에 설치된 감시카메라와 보안상황을 다시 한 번 점검했다.


“주의 아버지를 쉽게 제거할 정도의 실력이라면 호선도 이기기 어려울지 몰라. 과연 그들의 우두머리는 누굴까…….”


준명은 두려움을 느꼈다. 주의 아버지인 무섭은 인간과 큐우비노키츠네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었다. 거기다 그는 유전공학분야의 실력 있는 전문가였다. 난폭한 젊은 시절을 보내기도 했지만 호선과 사랑에 빠지면서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주는 호선과 무섭 사이에서 태어난 유일한 3세대 큐우비노키츠네인 셈이다. 거기다 주는 호선과 무섭의 우월한 유전자만을 물려받았다.


“주의 잠재력을 개발시킬 수만 있다면…….”


준명은 혼잣말처럼 내뱉은 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작가 한마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