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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캐츠아이] 5화. 미궁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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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미궁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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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미궁 속으로








“누구야?”


이현이 깜짝 놀라 벌떡 몸을 일으켰다.


다가오던 여자가 걸음을 멈추었다. 이현은 침대 옆 체인을 당겨 보조등을 켰다. 불빛 아래 잠옷을 입고 서 있는 여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무슨 일이에요?”


멈춰 섰던 여자가 천천히 다가와선 자신이 들고 있던 걸 펼쳐 침대 위에 놓았다.

여자의 방에서 보았던 오르세미술관의 그 다이어리였다.


“이게 뭐죠?”


이현이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사모님 드리려구요. 주무시는 거 같아 놓고 가려고 했는데...”


상냥하고 다정한 목소리가 건너왔다.


“이걸 왜...?”


“사모님은 이런 거 좋아하실 것 같아서요.”


이현은 여자를 한참 올려다보았다. 어둑한 불빛이었지만 여자의 얼굴이 또렷이 보였다. 여자는 이현을 향해 웃고 서 있었다.


“아니요. 저는 이런 거 필요 없어요.”


단호한 이현의 목소리가 여자 쪽으로 건너갔다.


“선물이에요. 사모님.”


여자는 이현의 말에 아랑곳없이 생긋 웃고는 침실을 나갔다.

새벽 두 시였다. 아직 경수는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아무래도 아줌마 내 보내는 게 좋을 것 같아.”


학교로 향하는 차 안에서 이현이 말했지만 경수는 이현을 보며 웃기만 했다.


“나 정말 싫어. 뭔가 계속 기분이 나빠.”


경수는 이현의 어깨에 손을 얹고는 토닥였다.


“전시회 준비 때문에 힘들지? 내가 도와줄 수도 없고... 미안하네.”


“내가 예민해져 있어서 그렇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 아니야. 알았어. 나도 생각해 볼 게.”


경수는 다 이해한다는 듯 너그러운 웃음을 웃으며 학교에 내려 주었다.


“여섯 시에 데리러 오면 되나? 어제 늦게 왔으니 당신한테 점수 좀 따야지. 당신 좋아하는 멋진 곳으로 예약해 놓을게.”


경수는 누굴 의심하거나 미워해 본 적이 없는 사람 같았다. 두 번의 이혼을 거치며 많은 상처를 받았다고 하면서도 사람을 경계하거나 꺼리는 일이 없었다.


비상 교수회의 호출 해놓고 정작 학과장실은 비어 있었다. 연구실로 가려고 돌아 나오는데 민경이 들어왔다.


“채교수님.. 다시 문자 간 거 못받았어요? 취소됐다고 연락했을 텐데요... ”


“못받았어요.”


“조교를 바꾸든지 해야지. 애가 느려 터져서... 그런데 수업도 없는 날인데 일부러 나온 거죠? 미안해서 어떡해요... 차라도 마실래요?”


민경은 언제부턴가 이현에게 꼬박꼬박 존대를 하고 있었다.


“아뇨. 괜찮아요. 연구실에서 작업하면 돼죠.”


이현은 곧장 돌아서 나왔다. 암실작업을 하려고 잡아 놓은 날인데 비상 교수회의를 한다고 해서 학교로 날아온 것이었다.


학과장실을 나와 연구실로 가던 이현은 걸음을 멈추었다. 연구실 앞에 어떤 여자가 서 있는 게 보였다.


블랙 정장 원피스에 블랙 니트 카디건을 걸치고 있는 여자는 이현을 기다리는 것처럼 문 바로 앞에 서선 복도 쪽으로 등을 돌리고 있었다.


강의가 없는 날이라 누군가 학교로 방문할 거면 미리 연락을 주었을 텐데... 아무리 봐도 아는 사람 같진 않았다.


“누구 찾아오셨어요?”


연구실 앞으로 다가가 이현이 여자의 등을 향해 말했다.


“채이현 교수님....”


이라고 말하고 여자는 말을 멈추었다.


10년 만이었지만 한 눈에 이현은 알아볼 수 있었다. 언니 재현이었다.


이현은 말없이 연구실 문을 열고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따라 들어오라는 듯 문을 열어놓은 채로...


재현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현을 따라 들어와 소파에 앉았다.


“언니가 여기 웬일이야...”


재현은 죄를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반쯤 숙인 채 말없이 이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학교까지 찾아올 줄 몰랐어.... ”


“이현아... 너 하나도 안 변했구나. 그대로야. 더 멋있어 졌다.”


재현은 애써 웃음 지며 말했지만 알 수 없이 초조하고 불안해 보였다.


“무슨 일인데...?”


재현은 한기가 드는 듯 카디건 자락 옆 자락을 당겨 앞으로 움켜쥐었다.


“언니 따뜻한 차라도 줄까?”


재현은 고개를 숙인 채 세차게 머리를 저었다.


“이현아... 은석이가 죽었어.”


고개를 들지도 않고 조용히 혼잣말처럼 재현이 말했다.


“....”


“죽었어... 은석이가...”


고개를 든 재현의 눈에 눈물이 한가득 고여있었다.


“은석이... 누구야..”


재현은 움켜쥐고 있던 블랙 카디건을 당겨 눈물을 닦았다.


“미안해... 은석이 없어지니까 너 밖에 생각이 나지 않았어. 그래서 왔어.”



프랑스로 떠나기 전 진우가 재현의 이야기를 전하며 무언가를 말할 듯 말 듯 멈칫 거렸던 일이 있었다. 혹 언니 재현이 결혼이라도 했던 건가 생각했었다.


“나 이제 어떻게 살아. 이현아.”


재현은 20년의 시간을 단 번에 뛰어넘기라도 한 것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이현은 티슈박스를 재현 앞으로 놓아 주었다.


“언니. 여긴 학교야. 내 직장이야. 누가 당장 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올지도 몰라.”


눈물을 그렁이던 재현의 얼굴이 갑자기 얼어붙었다.


“오늘은 돌아가 줘.”


이현을 가만히 쳐다보던 재현은 티슈박스에서 티슈를 뽑아 눈물을 닦았다.


“매정하게 생각해도 할 수 없어. 다른 날 다른 데서 봐. 지금은 내가 언니를 위로해 줄 만한 상황이 아니야.”


재현은 움켜쥐고 있던 카디건을 놓고 표정없이 이현을 한참 쳐다보았다. 그리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


“다시는 학교로는 오지 마.”


재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현은 재현에게 자신의 명함을 쥐어주었다. 재현은 그것을 손에 쥔 채 한참 이현을 쳐다보았다. 그러곤 그것을 바닥에 스스르 놓아 버리고 연구실 문을 나갔다.



“언니.... 안가면 안 돼?”


20년 전 어떤 밤.

이현은 조용히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재현을 불러 세웠다.


“깼니? 쉿... 조용히...”


재현은 들고 나가던 가방을 다시 내려놓고 이현 옆에 앉았다.


“나 서울 가서 열심히 양재기술 배워서 패션디자이너 될 거야. 멋진 옷 만들어서 부자 될 거야.”


재현은 귓속말을 하듯 속삭였다.


“언니... 대학에서 디자이너 공부하면 안 돼?”


재현이 이현을 가만 쳐다보았다.


“나도 우리 집이 그렇게 잘 살면 좋겠어... 그렇다면 내가 지금 왜 이러겠니?”


“고등학교 졸업 할 때까지만 집에서 같이 살아. 집에서 나가면 학교는 어떻게 다니려고?”


“이현아. 너는 공부 잘하니까 나중에 좋은 대학 가서 훌륭한 사람 될 거야. 나는 지금 이 방법 밖에 없어.”


“양재기술 배워서 패션디자이너가 된다고?”


“그럼... 학원 다 알아봤어. 몇 달만 배우면 기술자가 된대. 그땐 네 옷도 만들어 줄 수 있을 거야.”


“내 옷?”


“너 고등학교 입학 할 때는 내가 교복 멋지게 만들어 줄 게.”


“진짜...?”


“그럼... 언니가 서울 가서 정말 멋진 디자이너가 돼서 돌아올게. 그땐 엄마도 이해하실 거야.”


하지만 재현은 그날 이후 이현을 찾아 온 적이 없었다. 그 순간부터 재현은 이현의 삶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가끔 편지가 왔지만 발신 주소는 비어있었고, 엄마가 죽고 이현이 세상에 홀로 남겨졌을 때도 재현은 찾아오지 않았다.



이현은 자신의 명함을 주워 쓰레기통에 넣었다.


재현은 어려서부터 손재주가 있어 뭐든 만드는 걸 잘했다. 털실로 스웨터를 뜨거나 천 조각으로 인형 옷도 곧잘 만들어 입혔다.


재현이 그런 일을 하는 옆에는 항상 이현이 있었다. 바늘에 실을 꿰주고 털실을 감아주고 가위로 천을 오려주었다.


이현이 사진을 좋아하게 된 건 재현의 영향일 지도 몰랐다.


털실이 스웨터가 되고 천 조각이 옷이 되는 게 신기했던 이현은 낡은 카메라로 항상 그것을 찍었다.

비록 필름이 들어있지 않는 카메라였지만 렌즈에 굴절돼 보이는 모습들이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어, 채교수님 마침 연구실에 있었네요?”


노크 소릴 못들은 모양이었다. 옆방의 이정호교수가 종이 한 장을 들고 들어왔다.


“혹시 이 사진 본 적 있어요?”


이교수가 들고 온 건 종이에 인쇄된 사진이었다.


“이거 한 번 보세요. 이상한게 있어서...”


이교수가 내 놓은 종이엔 어떤 확대된 보석이 찍혀 있었는데 그 안에 어떤 사람의 형상이 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멀리 사람을 세워두고 보석으로 굴절시켜 촬영한 것 같았다.


“이게 뭐죠?”


“인터넷에 올라 온 걸 인쇄해 봤어요. 누가 이런 종류 사진을 인터넷에 올리고 있는데 예전에 채교수님 전시했던 작품이랑 비슷한 것 같아서요.”


이현이 프랑스로 떠나기 전 전시회에서 비슷한 작품을 전시한 적은 있었지만 그건 링으로 된 보석반지였고 중간의 뚫린 공간엔 토끼를 담고 있었다.


그 해가 토끼 해였고 토끼를 감싸고 있는 보석 반지가 빛과 묘하게 어우러져 전문가들의 찬사를 받았던 작품이었다.


“이게 인쇄가 엉망이라 감이 잘 안 오시죠? 잠깐, 제가 탭을 가져와 볼게요.”


이교수가 나간 사이 이현은 그 인쇄된 사진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보석에 굴절된 사람의 형상이 이상하게 익숙한 느낌이었다.


색이 흐리고 인쇄 상태가 엉망이긴 하지만 바이올렛 짧은 원피스와 아이보리 스트랩 슈즈를 신고 있는 사람은 자신 같았다. 바이올렛 원피스도 스트랩 슈즈도 모두 주엽이 사준 것들이다.


이교수가 탭으로 연결해 보여주는 사진엔 분명 이현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진을 찍은 기억도 그런 사진을 본 기억도 없었다. 보석 속의 인물이 이현이라면 분명 주엽이 촬영한 것일 것이었다.


“이게 어디에 올라 와 있는 거예요?


“페이스북에요. 채교수님 페북에는 친구 신청 없던가요? 우리 사진과 교수들한테 죄다 친구 신청을 했다던데.... 저는 지난 주 친구 수락을 했는데 이 분 누군지 몰라도 사진이 범상치가 않더라구요. 그런데 이 작품은 채교수님 작품하고 느낌이 너무 비슷해서....”


“아뇨. 제 사진하고는 많이 달라요.”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누군지 몰라도 이 분 작품 좋더라구요. 하긴 모르죠. 이름 안 밝히고 활동하는 포토그래퍼인지... 요즘 그런 사람 많잖아요.”


이교수를 보내고 이현은 인쇄된 사진을 찬찬히 보았다. 그 옷과 그 구두를 신은 날이 언제였는지 훤하게 머리에 떠올랐다.


주엽의 집. 이현으로선 당시 처음 가 보았던 강남의 주상복합 초호화 아파트였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보던 화려한 공간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아, 여기선 사방 바깥세상이 다 보이네요. 여기서 촬영해도 작품이 몇 백 장은 나오겠어요.”


“그럼 네가 그렇게 해 보든가.”


주엽이 웃으며 식탁으로 와인을 내 왔었다.


“이런 데서 자고 이런 데서 잠을 깨면 기분이 어떨까?”


주엽이 이현의 눈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처음 이틀? 아니 일주일 정도는 기분이 좋겠지. 그 다음 날 부턴 다 똑같아.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사진을 하는 건지도 모르지. 처음의 순간을 마지막 까지 그대로 간직하고 싶어서?”


주엽이 호탕하게 웃었었다.


“저는 그 처음의 순간보다 저런 커다란 창 하나만 갖고 살았으면 좋겠어요..”


“갖고 싶으면 가지면 되지.”


주엽이 이현의 잔에 와인을 따라주며 그윽한 눈으로 이현을 쳐다보았다.


“방 하나 줄게. 너 들어와 살래?”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J.Y.Kim님이 친구 요청을 보냈습니다.'


페이스북 친구 신청 알림이었다.







-계속

작가 한마디

처음의 순간을 마지막까지 간직한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요? 길을 걷다 앞이 막히면 생각하곤 합니다. 어디서 부터 온 걸까... 어디로 가는 걸까... 처음의 순간을 잃어버리면 다 잃어버리는 거다..라고 항상 자신을 채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