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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캐츠아이] 4화. 김자영이라는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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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김자영이라는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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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김자영이라는 여자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서 남편 경수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게 보였다.

이현은 얼른 진우의 손을 놓고 경수 쪽으로 다가갔다.


“전화도 안 받고.... 걱정이 돼서.... 별 일 없었지?”


급히 뛰어와서 그런지 경수의 목소리가 숨이 찼다. 경수는 반가운 듯 얼른 이현의 손을 잡고는 진우를 쳐다보았다. 진우가 경수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정쩡하게 인사를 받고는 경수가 이현을 돌아보았다.


“나랑 어릴 때 친했던 이진우씨... 결혼 전에 한 번 인사한 적 있었는데... 이성재 교수 동생이야. 오늘 모임장소가 이분 카페였어.”


경수의 눈빛이 금세 수그러들었다.


“아, 그렇지. 이성재교수가 당신이랑 동향이라고 했지. 몰라 뵈어서 미안합니다. 형님이 이성재 교수군요.”


경수와 진우가 악수를 나누는 사이 도로 건너편에서 경수의 차가 유턴을 해 오고 있었다.


“당신 모임 있을 땐 저 차를 쓰면 되는데 오늘 내가 깜박했어.”


리무진 승용차 한 대가 서서히 이현 쪽으로 다가오자 경수가 진우를 향해 가볍게 목례를 했다. 진우도 경수와 이현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이현과 경수를 태운 리무진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진우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만나고 나니 뭐 나아진 게 있니? 원래 네 그릇에 맞는 여자가 아니라고 했잖아.”


어느새 옆에 와 있던 성재가 진우의 담배에 불을 붙여주었다. 진우가 빤히 성재를 쳐다보았다. 성재도 담배를 꺼내 물며 말했다.


“세월이 얼만데.... 이제 다 잊고 네 인생 살아. ”


진우는 한숨을 쉬듯 허공을 향해 길게 연기를 내 뿜었다. 누가 포기하라 한다고 포기할 수 있는 이현이 아니었다.

이현은 진우에게 자신의 삶보다 더 큰 의미였다. 이현이 떠났다고 해서 그 의미가 달라질 순 없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초등학교 5학년 전학을 와서 처음 알게 된 친구가 이현이었다. 이현은 공부도 잘하고 얼굴도 예뻤다.

선생님들 사랑도 독차지였고 친구들도 많았다. 그런 이현이 진우에게 유독 친절했었다.


하지만 유별난 성격이기도 했다. 친할 땐 솜사탕보다 더 부드러웠지만 기분이 조금만 뒤틀리면 진우에게 꺼지라고 소리를 질렀다. 꼴 보기 싫다고 지긋지긋하다고.


하지만 몇 시간 지나지 않아 골목에 앉아 혼자 울고 있는 이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진우가 찾아 헤매지 않으면 며칠이고 그렇게 골목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었을 지도 몰랐다. 그런 이현을 떠날 수는 없었다.


“이현이는 내가 없으면 안 돼.”


“정신 차려!”


성재의 입에서 벌컥벌컥 담배연기가 쏟아져 나왔다.


“너한텐 내가 없으면 안 돼 라는 말은 그 상대가 동의할 때 유효한 거야. 이현이는 너랑은 다른 세계에 사는 여자야. 이제 그만 두라고!”


진우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돌아서 왔던 길을 걸었다.




이현이 탄 차는 어느새 집 근처에 다다랐다. 집이 가까워지도록 이현은 경수의 손을 놓지 않았다. 경수 역시 이현의 손을 토닥이며 꼭 잡고 있었다.


“교수모임 재미없었어?”


“아니.. 전시회 때문에 계속 신경이 곤두 서 있어서....”


“나는 오늘 저녁 늦게 아버지가 주관하시는 모임에 합류해야 해야 해... 그런데 당신은 연락이 안 되고.. 걱정돼서 모임장소 찾아서 갔던 거였어.”


“와인을 몇 잔 마셔서 택시 잡아주려고 함께 나와 있었던 거야. 진우씨는.”


“어린 시절 친구라 다정해 보이던데 나는 아직 유치한가 봐. 채이현이 다른 남자와 다정하게 서 있는 모습만 봐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더라구. 내가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닌데 말이야.”


경수는 헛웃음을 웃으며 사랑스런 눈으로 이현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다정은 무슨... 격의 없이 지냈던 시절이 있어서 그렇게 보인 거겠지.”


“진짜 처음엔 기억이 안 나더라구. 나중에 기억이 났어. 우리 결혼 전에 한 번 봤던 기억... 처형이랑 친하다고 했던 것 같은데....”


경수에게서 언니 재현에 대한 말이 나오자 이현은 갑자기 가슴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언니는... 어릴 적부터 나하곤 같이 지내지 않아서... 아직도 남처럼 그렇게 지내니까... ”


“이진우씨 고마운 친구네. 우리 언제 처형이랑 저녁 먹기로 해. 돌아와서 인사 못 드렸잖아.”


이현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재현과 경수가 만날 일이 있을까. 이현에게 있어 재현의 존재는 어디에든 감춰 놓고 싶은 오래된 상처였다. 이미 돌아가신 엄마와 아버지의 존재와는 달랐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가장 힘들었던 때 언니는 가출을 했다. 고등학교도 채 졸업하지 않은 때였다. 이현과 세 살 터울인 재현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도 이현에게 연락을 주지 않았었다.


그 사실을 몰랐다고는 했지만 이현은 그것을 용서할 수 없었고 또한 재현의 삶의 방식도 용납할 수 없었다.

이현이 재현을 다시 만났을 때 재현은 서울 근교의 바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런 언니의 모습은 이현에게 창피하고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오늘 좀 늦을 거야. 기다리지 말고 일찍 자... 일하는 분이 있으니 그래도 안심이야.”


경수는 이현의 이마에 입을 맞추곤 다시 차를 돌렸다.


프랑스에서 돌아오면서 이현은 한 번 쯤 진우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언니 재현 때문이었다.


프랑스로 떠나기 전 진우를 통해 재현에게 카페 차릴 만 한 돈을 건넸었다. 재현은 자신을 만나 주지 않는 이현을 원망하며 돈을 받으려 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현은 결국 그 돈을 재현에게 주지 못하고 프랑스로 떠나고 말았다.


진우도, 성재도, 재현도... 이현은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진우도 성재도 거기서 그렇게 만나게 될 줄을 몰랐다.


그들 앞에서 애써 태연한 척 했지만 힘들던 시절의 사람들을 다시 보는 건 싫었다. 마치 반듯한 장막을 제쳐놓고 초라한 수치스런 아픈 상처를 만천하에 드러내 놓는 것 같았다.


집에 도착했지만 이상하게 현관 패스워드가 계속 에러가 났다. 몇 번을 시도하다 벨을 눌렀지만 한참 지나도록 안에선 기척이 없었다. 경비실에 가보려고 돌아서는데 승강기가 열리더니 여자가 나타났다.


“어머, 일찍 오셨네요?”


“문이 안 열리던데...”


“아, 비밀번호 제가 바꿨어요. 번호가 너무 길어서....”


여자는 별 일 아니라는 듯 문을 열고 먼저 거실로 올라서선 슬리퍼를 끌며 부엌을 향했다. 이현은 여자가 집으로 들어온 후 가끔 혼란이 생겼다. 자신이 생각하는 상식과 여자가 생각하는 상식이 너무나 달랐다.


마치 이현을 골려주기라도 하겠다는 듯 미리 세탁해 달라고 한 옷을 준비 해 놓지 않거나 저녁엔 무얼 먹겠다고 미리 주문을 해도 매번 잊어버렸다면서 엉뚱한 걸 마련해놓곤 했다.


“사모님, 전시 준비한다고 애 쓰시는데 영양가 있는 걸 만들어 드려야하는데.. 정말 안쓰러워 못 보겠어요.”


여자는 상냥하게 웃으며 서재로 간식과 차를 내왔다. 이현은 말없이 여자를 쳐다보았다. 여자의 진심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어서 드세요. 사모님. 잣이랑 호두를 곱게 갈아서 죽처럼 푹 끓인 거예요. 그리고... 저 잠시 나갔다와야 할 것 같아요. 뭐 시키실 거 있으면 지금 시키세요.”


“그런 거 없어요. 다녀오세요.”


작업에 열중일 땐 누군가 와서 말을 거는 건 신경 쓰이는 일이다. 경수는 항상 이현의 작업 방식을 알기 때문에 작업 중엔 신경 쓰는 일이 없도록 최대한 노력을 해주었었다.


이번 전시회는 이현에게 매우 중요한 전시회가 될 것이었다. 프랑스에서 귀국 해 처음 여는 전시회인데다 5년의 공백을 깨고 내 놓는 작품들이라 더욱 그랬다.

또한 대학에 자리 잡은 후 처음인 전시회라 여러모로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예술가는 늘 자기 자신의 최고의 작품과 경쟁해야 해. 그것을 뛰어넘지 않으면 예술가의 존재의 가치가 떨어지는 법이거든. 마치 운동선수가 자신의 최고의 기록과 경쟁하듯 말이야. 그것을 깨지 못하면 그간의 모든 트레이닝은 가치를 잃는 거야.’


주엽은 늘 이현에게 말했다. 예술가가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건 뛰어 넘을 더 큰 산을 만들어 놓았다는 거라고...


이현은 해야 할 게 많았다. 이번 전시회에서 뭔가 대단한 걸 이뤄내지 못하면 장주영 같은 기자들이 자신에게 주엽의 파일과 필름을 내 놓으라고 아우성 칠 것만 같았다.


이현은 이번 전시에서는 디지털 카메라로 촬영한 것과 필름으로 촬영한 것, 두 가지를 다 선 보일 생각이었다.


5년 전만 해도 한국에선 필름으로 촬영한 작품들이 우세였지만 지금은 주엽이 당시 선도했듯 디지털 카메라로 촬영한 작품들이 대세가 되었다.


이현은 프랑스에서 촬영한 작품들을 펼쳐 놓았다.

일상의 평범한 상황들이나 사소한 사물들도 카메라 렌즈를 거치면 새롭게 느껴졌다. 우리가 보는 세상의 모든 사물은 빛이 반사돼서 만들어지는 상이지만 렌즈를 통해서 보면 어떤 또 다른 울림이 있었다.


이현은 필름 작업한 작품들을 골라 놓았다. 내일은 하루 종일 암실에서 작업을 하기로 잡아 놓은 날이었다.


골라놓은 필름을 가져다 놓으려고 암실로 들어왔지만 불을 켤 수 없었다. 서재와 연결된 스위치가 바뀌어 있었다.


며칠 전까지 아무렇지 않았던 암실이었는데... 처음 집에 들어오던 날 서재와 암실은 이현이 관리하겠다고 청소조차 필요 없다했는데 가만 보니 서재의 책장과 장식장이 전과 다르게 정리돼 있었다.


“아주머니. 저 잠깐 보세요.”


이현이 거실로 나와 여자를 찾았지만 아무 답이 없었다. 여자의 방문을 노크했지만 묵묵부답이었다.


이현이 여자의 방을 열었다. 방은 말끔히 정리돼 있었다. 그제야 여자가 잠시 외출하겠다고 했던 말이 기억났다.


방문을 다시 닫으려는데 문 옆의 선반 위에 이현의 눈에 익숙한 무언가가 눈에 띄었다. 한 눈에도 오래 전 주엽에게 선물 받은 다이어리란 걸 알 수 있었다.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 전시된 작품들이 들어있는 독특한 다이어리였다.


그것은 주엽이 그것을 선물했던 그 해의 일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빼곡하게 메모 되어있는 다이어리였다. 이현에겐 아주 소중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걸 여자가 왜 가지고 있는 건지....

여자의 이상한 행각을 이대로 둘 수 없다는 생각에 이현은 성큼 방으로 발을 들였다. 그리고 그것을 펼쳐 들었다.


그러나 거기엔 한 줄의 메모도 없었다. 처음의 상태가 그대로 보존된 것이었다. 이현의 것과 똑같이 한 장 한 장 미술 작품들이 들어있는 다이어리였다. 하지만 이현의 것이 아니었다. 우연이라기엔 너무 이상한 우연이었지만 이현은 얼른 그것을 덮었다.


제자리에 올려놓는데 뭔가 툭 떨어졌다. 처음엔 신용카드라 생각했다. 신분증이었다. 5년 전 쯤 인 듯 보이는 여자의 얼굴이 반듯하게 새겨진 신분증이었다. 여자의 얼굴 옆으로 김자영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신분증이 어디쯤 끼워져 있었는지 알 수 없어 중간 쯤에 넣고는 처음 놓여있던 자리에 그대로 놓아두었다. 예기치 않게 남의 사생활을 엿본 것 같아 미안했지만 여자가 집에 온지 거의 한 달이 다 돼 가도록 여자의 이름을 모르고 있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좀 많이 늦겠어.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


11시 넘어 경수의 문자가 날아왔지만 그때까지 여자도 들어오지 않았다.


‘걱정하지 말고 일 봐요.. 과음은 하지 말고 적당하게...’


이현은 답을 보내고 곧장 샤워를 하고 잠자리를 준비 했다. 이현은 암실 작업 전 날엔 조용한 음악을 틀어놓고 마음을 가라앉히는데 신경을 썼다.


암실에서의 작업은 매우 긴장을 요한다. 은염을 이용한 전통적인 사진인화 작업은 화학약품 혼합에서부터 인화지와 필름 세척단계까지 하나하나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집중의 산물이었다.


암실 작업을 하다보면 사진은 고독한 기다림의 미학이라는 걸 항상 깨닫는다. 촬영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오로지 자신과 대화하며 오로지 혼자만의 결정으로 셔터를 누른다. 절대적인 고독 속에서 숨죽이며 만들어지는 게 사진이었다.


사진을 좋아했던 중학교 시절부터 이현은 이미 그걸 즐겼던 것 같다. 하지만 어른이 돼서 주엽을 만나고부터 사진이라는 진정한 예술의 깊이를 알게 된 것 같았다. 어떤 순간을 포착해 정지해두는 매력을 가진 어떤 행위에 주엽이라는 위대한 예술가의 영혼이 이현에게 함께 깃들기 시작하면서 이현도 함께 예술가로 거듭나게 된 것만 같았다.



“사모님...”


“사모님...”


누군가의 인기척에 눈을 떴다.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깜깜한 어둠 속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당신이야?”


제대로 잠이 깨진 않은 이현이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일으켜지지가 않았다. 그런데 앞에 서 있는 사람은 경수가 아니었다. 여자였다.


여자는 무언가를 들고 천천히 내 침대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계속

작가 한마디

비가 내리는 토요일의 새벽... 촉촉히 젖어가는 가을의 향기를 담아보려 창 밖의 풍경을 향해 폰 카메라를 세워봅니다. 거기엔 문득 어떤 그리움의 노래가 흘러나옵니다. 비 내리는 9월의 새벽이 천천히 천천히 나를 향해 걸음을 내딛어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