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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캐츠아이] 3화. 과거의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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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과거의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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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과거의 이름으로





창밖을 장식하고 있는 9월의 교정은 아름다웠다.

파랗게 여름 빛살을 견뎌낸 잔디는 어느새 푸른빛을 곱게 순화시키며 익어가고 있었다.


이현은 개강 후 매일 아침 연구실 창문 앞에 서서 차를 마셨다.

차의 향그러움 속에서 이현은 늘 생각했다.

이제 시작이야. 이제 출발 선이야.

이렇게 열심히만 가면 내 꿈에 닿을 수 있어...


제법 서늘해진 바람이 좋아 이현은 창문을 활짝 열었다.

가을의 향기는 뜨거웠던 여름의 태양이 떨구고 간 한 방울의 행운 같은 것이었다.


“채이현교수님?”


누군가 연구실로 들어와 책상을 톡톡 두드릴 때 까지 이현은 창 밖에 시선을 놓고 서 있었다.


“학과장님, 어쩐 일이세요?”


사진과 학과장을 맡은 이민경이 함박웃음을 웃으며 서 있었다. 네이비색 원피스에 주황색 스카프를 한 쪽 어깨에 드리우고는 품에 가득 장미 꽃다발을 안고 있었다.


민경은 이목구비가 반듯해 미모는 있는 편이었지만 골격이 크고 몸집이 둔한 편이라 예쁜 얼굴이 그리 돋보이지 않는 타입이었다.

동그란 뿔테 안경은 노처녀 사감 선생을 떠올리게 만들곤 했다.


민경은 안고 있던 장미꽃다발을 이현에게 불쑥 내밀었다. 7부 원피스 소매 아래로 통통한 그녀의 팔이 길게 빠져나왔다


“축하합니다.”


“어머. 감사해요...”


이현은 꾸벅 인사를 하고는 꽃을 받아 들어 화병에 가져다 꽂았다. 이현이 사진학과 교수자리를 차지하고 들어오는데 제일 큰 반대를 했던 사람이 민경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오늘 우리 친한 교수들 몇몇 모여서 채교수 축하파티를 하려고 하는데 괜찮죠?”


이현은 말없이 민경을 향해 살짝 웃었다. 그리곤 프랑스에서 가져온 NINA’S 티를 우려서 민경 앞에 놓아 주었다. 민경은 찻잔을 들어 향을 맡았다.


“채교수... 이건 니나스 블랙티죠? 아.. 이 꽃향기에 과일 향기... 오, 이거 비싼 건데.... 프랑스는 정말 향수의 천국다워요. 차에도 이런 향기를 담아 놓다니. ”


민경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감상이라도 하듯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현은 장식장 서랍을 열어 예쁘게 포장된 빨강색 니나스 케이스를 꺼내 민경 앞에 놓았다.


“파리 방돔광장에 니나스 쇼룸이 있어요. 가끔 그곳으로 산책 다니면서 향기로운 분을 만나면 선물하려고 샀던 거예요. 학과장님이 그 주인이셨나봐요.”


“어머어머어머... 채교수, 나 감동 먹었어요. 이렇게 의미 있는 걸... 역시 아름다운 분은 마음도 이렇게 아름답고 곱다니까. 고마워요, 정말.”


민경은 자그마한 빨강색 케이스를 가슴에 안고는 정말 눈물이라도 흘릴 것처럼 눈을 크게 뜨고는 이현에게 찬사를 늘어놓았다.


“저는 학과장님만 믿고 학교 들어왔어요. 많이 도와주세요.”


이현은 눈웃음을 웃으며 민경의 손을 잡았다.


“아우.... 그렇게 웃으니 내 가슴이 녹아요, 아주. 그러니 백대표님은 어떻겠어요? 어떻게 그렇게 하나도 뺄 데도 더할 데도 없이 예쁘고 아름답고... ”


민경은 어깨에 걸쳐놓은 주황색 스카프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줄도 모르고 너스레를 떨었다.


“저는 항상 학과장님 편인 거 아시죠?”


이현도 민경의 호들갑에 보조를 맞추어 웃어주었다.


“그러니까... 우리 친한 교수들 모임에 채교수 함께해요. 내가 채교수 배경이 돼 줄게. 내가 채교수 좋아하는 거 우리 교수들이 다 알아요. 그러니까 오늘 저녁 우리 찐하게 알았죠?”


민경은 입을 크게 벌리고 소리 내 웃음을 웃었다. 둘 중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의 배경이 돼 줘야 한다면 그건 민경이 아니라 이현이라는 걸 민경도 알고 있었다.

재단 이사로 있는 백경수가 예술대 학장을 맡으리라는 소문은 이미 지난해부터 돌고 있었다.


민경이 돌아가고 이현은 남은 차를 마셨다. 꽃향기에 과일향이 나는 니나스 블랙티는 주엽이 좋아하던 것이었다. 방돔광장으로 산책을 나갈 때 마다 향기를 모으듯 하나씩 사서 들어왔던 것이었다.


핸드폰 벨이 울렸다.


"장주영기잡니다. 질문 드릴 게 있어요..."


장주영이라면 입국하던 날 공항에서 주엽의 파일 문제를 거론했던 기자였다.


"무슨...?"


"포토그래퍼 김주엽 선생님이 남긴 파일 외에도 다량의 필름이 있다고 들었는데요. 혹시 알고 계신 건 없나요?"


"이런 식으로 제게 전화하시는 이유가 뭐죠?"


"김주엽 선생님이랑 가장 가까우셨으니까요."


"저는 파일도 필름도 모릅니다. 다시는 이런 전화하지 마세요."


이현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장주영, 장주영, 장주영... 그 여자가 자신의 생을 야금야금 갉아먹으며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모임장소는 아담하게 만들어진 학교 근처 라이브 카페였다. 친한 교수모임이라며 모인 사람들은 열 명 정도였다. 민경은 이현이 올 시간에 맞춰 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손을 끌었다.


“다들 기다리고 있어, 채교수.”


호화스럽진 않지만 예쁘게 꾸며진 룸은 밖의 스테이지가 훤히 보이는 음향시설이 잘 된 곳이었다.


“오랜만입니다, 채교수.”


이현이 들어서자 제일 먼저 손을 내민 사람은 영문학과 교수 이성재였다. 진우의 형이었다.


성재는 예전의 모습에 비해 더 반듯해진 모습이었지만 냉철하고 차가운 눈매는 좀 부드러워 보였다. 동생인 진우가 예술가라면, 성재는 영락없이 깐깐한 교수의 모습이었다.


“두 분 아시는 사이구나. 하긴 우리 채교수를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


민경은 옆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이현에게 소개 시켰다. 그들도 곧 백경수가 예술대학 학장이 되리라 생각하는 부류의 사람일 것이었다.


“여기 모인 열 명 정도의 사람들이 우리 대학 예술대랑 인문대를 이끌고 있는 실세라고 생각하면 돼요, 채교수.”


중어중문학과 학과장인 박명호 교수는 며칠 전 경수와 식사자리에서 우연히 만난 적이 있었다. 그것도 인연이라고 박명호는 아주 친한 척 이현의 핸드백을 받아들어 옆에 놓아주었다.


재단에서 낙하산으로 내려 보낸 교수자리의 주인공이 환영받는 법은 없었다. 그런 식으로 자리 잡은 교수와 함께 어울리는 걸 아무도 원하지 않았다.


더구나 사적인 모임에 초대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현이 예외인 건 백경수의 존재가 이현에게 주는 혜택이며 선물이었다.


라이브카페라 그런지 한 때 유행했던 옛 음악들이 끊임없이 무대에서 흘러나왔다. 이현을 제외하곤 대부분 마흔 줄에 들어선 교수들이라 대학시절 즐기던 음악에 젖어선 빠르게 술잔이 오갔다.


“자.. 여기 내가 소개할 사람이 한 사람 있습니다.”


술에, 노래에, 이야기에 무르익어 다들 취기가 돌 때 쯤 이성재가 일어서 앞으로 나왔다.


“이 카페 주인이며 좀 전에 노래를 불렀던 가수입니다.”


누군가 와인 두 병을 들고 룸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진우였다. 언제나 그랬듯 소매를 걷어 올린 면셔츠에 면바지를 입고 있었다.


김성재가 처음 손을 내밀 때부터 이현은 감지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오늘 여기서 진우를 만나게 되리라는 것을.


성재라면 충분히 이현 앞에 진우를 데려다 놓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자기 자신은 자신의 이익에 모든 걸 다 바치면서 이현에겐 순정이나 사랑을 선택하라고 조언했던 사람이 바로 그였다.


‘이현아. 진우가 너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잖아....’


대학 2학년 때 였을 것이다. 카페 알바를 그만두고 주엽의 스튜디오로 자리를 옮겼을 때 성재가 이현을 찾아왔었다.


‘그래서 제가 어쩌길 바라시는데요?’


‘난 네가 진우랑 잘 되길 바래...’


성재는 사귀는 여자와 미국 유학을 앞두고 있었다. 동생 진우를 혼자 두고 떠나기엔 마음의 부담이 많았을 것이었다.


‘사랑이라는 감정에 자신을 다 던질만큼 오빠도 어리석지는 않잖아요.'


성재는 더 이상 이현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영과 성재의 관계를 이현이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현도 성재도 가난이 꿈을 이루는데 얼마나 큰 장애인 줄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한 동네에서 지독하게 벗어나고 싶은 어린시절을 함께 보내며 알게 된 게 있다면 벗어나려면 먼저 자신이 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게 아니면 절대 주변을 변화시킬 수 없었다. 그래서 이현도 변했고 성재도 변했다.

그 시절을 함께 보내고도 변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이현의 언니 재현과 성재의 동생 진우였을 것이다.


진우는 처음 보는 사람처럼 이현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현도 가볍게 목례했다. 그 둘을 의미심장한 눈으로 지켜보는 사람이 있다면 이성재였을 뿐 아무도 그들을 눈여겨보는 이는 없었다.


“이성재교수보다 동생 분이 인물이 더 좋으시네. 이렇게 잘 생기고 성공한 분이 왜 아직 미혼이랍니까. 눈이 너무 높은 거 아닙니까.”


사람들은 진우를 옆에 앉혀 놓고 떠들고 있었다. 진우는 사람들에게 와인을 따라주고 함께 웃고 떠들고 있었지만 마주 앉은 이현에게만 눈을 주고 있었다.


이현은 대각선 방향에 앉아있는 이성재를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진우의 카페로 모임장소를 정한 성재나 룸으로 불려 들어온 진우나 둘 다 어리석기 짝이 없는 사람들 같았다. 과거는 과거 일 뿐이었다. 시간을 거슬러 내려가 과거의 추억 따위를 건져 올려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이현은 좌중이 왁자지껄한 틈을 타 일어서 밖으로 나왔다. 룸 밖의 홀은 음악 때문에 더 정신이 없었다.

집으로 돌아갈 생각으로 이현은 카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버렸다. 누군가 따라 나오는 가 싶더니 뒤에서 팔을 잡았다. 진우였다.


“여전하네...?”


이현은 말없이 진우를 올려다보고는 다시 돌아서 걸었다.


“교수된 거 축하해...”


이현의 걸음이 빨라지자 진우는 이현이 달아나 버리기라도 할 듯 뒤따르며 급하게 말을 이었다.


“많이 보고 싶었어. 얼굴 보는 게 뭐 문제가 되는 건 아니잖아. ”


이현이 몸을 훽 돌려 진우를 쳐다보았다.


“내게 허락도 없이 이런 식은 아니지.”


이현은 다시 돌아서 빠르게 앞으로 걸어갔다. 한낮에는 햇살이 따가웠지만 저녁이 되니 벌써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래. 맞아. 내 생각이 짧았어.”


"여전히 하나도 변하지 않았네."


진우가 소리 내 웃었다.


"난 한결같고 여전하다는 말이 좋아. 나는 변할 수 있을만큼 용기도 없는 사람이니까. 난 늘 생각이 짧아."


진우는 언제나 그랬다. 이현이 진우를 공격할 때 마다 그래, 맞아, 내 생각이 짧았어. 그렇게 진우는 늘 이현에게 맞춰 주었었다.


내 생각이 짧았어... 진우의 목소리를 떠올리면 어떤 작은 방이 함께 따라 온다. 방의 한쪽 벽면에 커다란 거울이 있었다. 거울에 비쳐지는 것은 정면을 약간 비껴있는 맞은편의 벽이었다.


벽의 제일 위엔 바다를 배경으로 한 일출 사진 하나가 높게 걸려 있었고 그 바로 아래엔 옆으로 길게 줄지어 걸려 있는 옷가지들.


엄마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이현이 도움을 청하러 뛰어 들어간 곳이 거기였다. 진우가 살던 진우의 방이었다.

그날 이현의 손에 이끌려 나왔던 진우는 장례를 치르고 화장을 하는 순간까지 이현의 옆을 그림자처럼 지켰었다.


“카페... 근사하더라. 원했던 대로 잘 살고 있는 것 같아서 보기는 좋았어.”


이현의 걸음이 조금 느려졌다. 빠른 걸음에 맞춰 펄럭이던 이현의 버건디 컬러 원피스 자락이 물결처럼 느리게 살랑이고 있었다.


“네가 한국 돌아오면 꼭 너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싶었어. 우리 스무 살 때처럼. 꼭 네 앞에서 기타를 치고 드럼을 치면서 노래를 하고 싶었어.”


진우가 걸음을 멈추고 이현의 팔을 잡았다.


“나 한번만 제대로 봐줘. 아까부터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어.”


이현은 진우의 팔을 뿌리치며 걸음을 멈추었다.


“과거는 과거야. 들여다보면서 추억 먹고 사는 일 하지 마. 시간은 흘렀고 우리는 변했어.”


“내가 안 변했잖아. 채이현은 변했지만 이진우는 안 변했어. 나는 죽을 때 까지 그대로 있을 거니까... 그러니까 언제든지 마음이 내키면 돌아오면 돼.”


다시 앞으로 걸어가던 이현이 걸음을 멈추고 진우를 올려다보았다. 진우도 멈칫 걸음을 멈추었다.


“내가 왜... 내가 왜 너한테 돌아갈 거라 생각해? 내가 어떻게 이룬 건데.”


“.... ”


“한 번 흘러내린 물은 다시 위로 역류할 수 없어. 돌려놓으려고 애쓰지도 기다리지도 마. 이렇게 흘러가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면서 왔는지 모른다면 감히 그러지 말라고.”


이현은 진우를 노려보고는 다시 돌아섰다. 차는 학교에 있었다. 집으로 가려면 택시를 타야했다.


“이현아.”


진우가 이현의 앞을 막아섰다. 그리곤 이현의 얼굴을 감싸 안고 입을 맞추었다. 순식간이 일이었다.

뿌리칠 줄 알았던 이현이 가만히 진우를 올려다보았다.


“이게 마지막이야. 그러니까 더 이상은 우리 기억하지 말자. 아무리 흔들어도 나 흔들리지 않아.”


“그래. 니가 받아준 걸로 됐어. 흔들리지 않는 거 아니까 흔들지 않을게. 그렇지만 기다리는 건 그러지 말라고 하지 마. 나는 너를 기다릴 거야. 네가 돌아오지 않아도 좋아.”


진우가 다시 이현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이현이 택시를 잡으려 도로로 내려섰다. 택시 한 대가 다가와 이현 앞에 섰다. 진우가 이현의 손을 꼭 잡았다.


"만나줘서 고마워."


이현이 진우의 손을 놓기도 전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저기, 잠깐만!”


경수였다. 뒤를 돌아보니 카페 쪽에서 경수가 달려오고 있었다.





-계속

작가 한마디

과거란 이미 지나가버린 어쩔 수 없는 시간입니다. 하지만 과거는 절대 변하지 않고 살아있지요. 그래서 과거는 현실을 만들고 현실은 또 다른 과거의 이름이 돼서 미래를 만들어 갑니다. 채이현은... 또 우리는.. 지금을 어떤 과거를 만들며 살아가고 있을까요... (행복한 추석 맞으시길 바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