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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캐츠아이] 2화. 모르는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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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모르는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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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모르는 여자






석양이 서서히 물들어오는 한강은 아름다웠다.

주엽과 함께였을 때 해 질 녘이면 늘 한강을 찾았었다. 물은 사진을 찍기에 너무나 좋은 대상이었다.


주엽은 빛의 각도에 따라 시시각각 산란하는 물의 빛을 카메라에 담고 싶어 했다. 신기하게도 똑같은 시각, 똑같은 장소에서 촬영해도 그 물에 담기는 빛은 같지가 않았다.


"물속으로 빛이 들어가서 산란하는 걸 포착해봐. 보석 속에서 만들어지는 그것과 어떻게 다른지 보라구. 어떤 땐 똑 같은 부분이 발견이 돼. 물과 보석이 말야. 결국 그 비밀은 빛이 가지고 있는 거야."


주엽은 카메라만 들면 목소리가 한 톤 높이 올라갔었다. 카메라만 손에 들면 알 수 없이 가슴이 뛴다고 했다.


이현이 프랑스에서 세느강에 집착했던 건 주엽처럼 햇빛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변하는 물빛을 포착해내고 싶어서였다. 빛에 따라 변화하는 물의 빛을 촬영해 세상에 보여주고 싶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


샤워를 마친 경수가 거실 유리창 앞에 서 있는 이현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당신이 여길 제일 맘에 들어 할 줄 알았지. 암실만 하나 따로 만들어달라고 했는데 집이 완전히 다른 집이 됐네."


전엔 베란다 때문에 한강이 온전히 보이지 않았었다.


"한강 뷰를 생각해서 10층이나 15층으로 갈 걸 그랬나?"


"난 5층이 좋아. 적당히 높고 적당히 낮아서."


"세느강이 그립진 않구?"


경수가 두 손으로 이현의 얼굴을 감싸고 입을 맞춰주었다.


"한강이 더 예뻐."


경수는 이현의 눈 코 입을 하나하나 만지곤 머리칼을 쓸어주었다.


"세느강도 예쁘지. 당신처럼."


세느강이 친구라면 한강은 연인 같았다. 세느강은 도시로 흘러들어와 도시 곳곳에서 출렁이고 있지만 한강은 한 걸음쯤 거리를 두고서 흐르는 도도한 느낌이었다.


"참. 아버지가 나보고 집에 잠깐 들르라고 하시던데... 나 혼자 잠깐 다녀와야겠어. 우리 귀국 인사는 며칠 후 간다고 했으니까. 당신은 오늘은 쉬자, 피곤하니까."


이현이 답할 사이도 없이 경수는 방으로 들어가 빠르게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가서 아버지만 뵙고 금방 돌아올게. 당신은 새로 만든 암실 어떤 가 살펴봐. 집에서 당신 작업할 곳이니까."


경수 말대로 새로 만든 암실은 집 안에 만들어 놓았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컸다. 서재와 연결되도록 만들어진 암실은 이현의 마음에 쏙 들었다.


주엽의 사고이후 아무도 이현에게 작업 파일을 찾아내라고 한 사람은 없었다. 남들에게 이현은 주엽의 스튜디오에서 일을 돕는 알바 생이었을 뿐이었다.


누구든 어떤 의심이든 할 수는 있다. 거기에 휩쓸릴 필요는 없다.


한강엔 이미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이현은 아파트 입구가 훤히 보이는 뒤쪽 유리창으로 다가갔다. 5년 전 결혼을 하고 이곳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을 때 운전을 해서 들어올 때 마다 늘 헷갈렸던 곳이었다.


입구에서 분명 오른 쪽으로 돌아 앞으로 죽 가면 아파트 지하주차장으로 들어오는 길과 연결되었었다. 그런데 늘 그렇게 들어왔음에도 아파트 안에서 길을 잃었었다.


전면 유리창으로 바꿔놓고 보니 그 길이 한 눈에 다 보였다. 이현은 혹 다음에 또 그렇게 길을 잃는다면 위에서 내려다보던 이 장면을 떠올리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입구에서 오른 쪽으로 돌면 커다란 분수가 나오고 그 분수를 지나 죽 앞으로 가면 오른 쪽으로 아파트 지하주차장이 나왔다. 분수대는 늘 사람들이 붐비는 곳이라 분수대 앞에선 늘 잠깐씩 멈춰야만 했다.


아파트 분수라곤 하지만 분수는 항상 이색적인 느낌을 주었다. 파리에도 스트라빈스키 분수가 있었다. 어떤 이색적인 느낌을 주기보단 예쁜 튜브들을 띄워놓아 아이들이 보고 즐기기에 적당한 곳이었다.


분수를 한참 내려다보는데 어떤 운전자가 유리창으로 이현의 집을 올려다보는 게 보였다. 처음엔 잘못 본 건가 싶어 다시 자세히 보았지만 분명 이현의 집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둑해지긴 했지만 5층 아래서 이현 쪽을 올려다보는 사람의 실루엣이 너무도 또렷했다.


이현은 커튼 뒤로 살짝 몸을 감추었다. 누군가 자신의 집을 저렇게 목을 빼고 올려다본다는 사실에 순간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도대체 누가 왜 올려다보는 걸까, 그 차가 지나갔는지 아니면 아직도 올려다보고 있는지 보려고 커튼 뒤에서 창으로 얼굴을 내미는데 현관 벨이 울렸다.


이현은 거실 창에서 뒤로 물러나와 인터폰을 들었다. 15인치 모니터 안에는 어떤 젊은 여자가 두리번 거리며 서 있었다.


"누구시죠?"


"예, 사모님, 일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하셔서 왔어요."


서른 중후반의 중간 키쯤 되는 여자였다. 여자의 목소리는 상냥하고 밝았다.


"누가 보내서 오셨어요? 어디서 오셨는데요?"


"저도 전달만 받아서 정확하게는 잘 모르구요. 집 주소랑 사모님 성함만 알고 왔어요. 채이현 선생님 댁이라고... 당장 사람이 필요하다고 하던데요..."


사람은 분명 내일 온다고 했는데 이현과 경수의 일정에 급히 맞춰 시댁에서 서둘러 보냈을 수도 있었다. 이현은 문을 열었다.


하얀 카디건에 긴 스커트를 입은 여자는 현관으로 들어서며 꼼꼼히 이현의 얼굴을 살폈다.


"그러니까 채이현 선생님이 맞는 거죠?"


여자의 손에는 커다란 캐리어가 들려있었다.


"잠깐만요... 혹시 입주하는 걸로 알고 오셨어요?"


신발을 벗고 거실로 올라오려다 여자는 깜짝 놀라 멈추었다.


"아닌가요? "


"저희는 출퇴근 하는 분을 구하고 있어요. "


"그래요?"


여자는 주머니에서 무슨 종이를 꺼내 펼쳐들고 한참을 살폈다.


"이 집 맞는데.... 채이현 선생님 아니에요? 제가 잘못 찾아온 건 아니죠?"


"죄송합니다. 그럼.."


이현이 여자를 내 보내려고 문을 여는데 여자가 현관 손잡이를 힘주어 잡았다.


"잠깐만요 사모님. 벌써 해가 다 졌는데.... 제가 지방에서 올라왔거든요. 저 오늘 묵을 데가 없는데.... 이왕 집에 들어왔으니까 하루만 재워주시고 내일 결정하시면 안 될까요? 저, 일 잘 해요, 사모님."


"아뇨, 그럴 생각 없어요."


"저 나쁜 사람 아니에요. 사모님."


"우리랑 맞지 않다고 말씀 드렸는데요?


"사모님, 지금 일하는 사람 없다면서요. 오늘은 제가 청소 빨래 싹 다 해드릴게요. 다른 건 내일 다시 결정하세요. 네?"


여자는 생긋생긋 웃음을 잃지 않았지만 그럴수록 이상하게 여자를 집에 들이고 싶지 않았다. 갑자기 밖에서 현관문이 활짝 열렸다. 경수였다.


"어? 일하실 분 벌써 오셨네?"


"아, 사장님이시구나. 안녕하세요? 저 여기 일하려고 온 사람이에요. 사장님."


여자는 경수를 보자 얼른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했다.


"어머니가 보내셨어요?"


경수도 금시초문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아주머니 왜 여기 이러고 계세요? 어서 들어가세요."


경수는 먼저 거실로 올라섰다.


"아니, 이분은 입주하셔야 한 대. "


"입주도 괜찮지. 얼마간이라도 일하도록 하지. 집까지 오신 분인데... 그리고 당신, 빨리 들어와 봐. 할 말 있어."


경수는 이현에게 손짓을 하곤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가 버렸다.


"사모님. 아직 저녁 안 드셨죠? 제가 오면서 장도 봐 왔어요."


여자는 캐리어 옆의 장바구니를 번쩍 들어보였다. 이현은 여자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뭔가를 속이거나 거짓말 할 사람 같진 않았다.


"들어오세요. 오늘만 계시는 걸로 하고 내일 다시 이야기하도록 해요."


"사모님 감사해요. 정말 감사해요."


여자는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이현의 집으로 들어왔다.


"아버지께서 나를 왜 부르셨는지 궁금하지 않아?"


여자를 주방으로 안내해놓고 거실로 돌아오자 경수는 얼른 이현의 손을 잡았다.


"저 분... 집안에 들인 게 맞는 일일까?"


이현은 경수를 올려다보았다. 경수가 아니라고 하면 돈을 얼마 쥐어주고라도 당장 나가게 하고 싶었다.


"아니다 싶으면 내일 내가 알아서 할게. 수고비 넉넉하게 챙겨서 섭섭하지 않게."


경수는 언제나 이현의 편이었다. 늘 이현보다 앞 서 이현을 생각하고 어떻게든 이현을 위해서 무언가 해주고 싶어 하는 남자였다.


"그래도 될까..."


"일단 집에 들였으니 잊어버려. 그리고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경수는 현관을 들어설 때부터 무언가 들떠있는 사람처럼 보였었다.


"당신...."


"...?"


"아버지가 학교로 들어 오라셔."


"학교라면.."


"당신 자리 하나 주시려고 이미 올해부터 사진과 신설해놓으셨어. 깜짝 선물."


이현은 경수의 집안이 사학재단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자신을 거기에 불러줄 거라고 생각하진 못했었다.


"그럼 2학기부터 합류하는 거예요?"


"전시회를 앞당겨야 할 것 같은데 준비 돼?"


"할 수 있어. 작품은 다 촬영해왔으니까."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 전시에 출품할 작품은 그리 많지 않았다. 서울로 돌아와 더 촬영을 할 생각이었는데 시간이 촉박해졌다.


"아버지 성격 알지? 늘 지켜보자, 기다려보자, 하시는 거. 그래서 더 기분이 좋아. 아버지같이 깐깐하신 분이 당신을 선택한 거니까."


"저기, 사모님. 저녁 식사하세요. 냉장고에 음식재료가 잔뜩 들어있더라구요. 저는 꺼내서 만들기만 했어요."


저녁을 준비하겠다고 주방으로 들어간 지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식탁으로 다가가던 이현과 경수는 자리에 우뚝 서 버렸다. 식탁엔 한 사람이 그 짧은 시간에 차리는 게 가능할까 싶을 만큼의 음식이 요란하게 차려져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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