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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캐츠아이] 1화.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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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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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아무도 모른다



당당해야 해. 어떤 흔들림도 보여선 안 돼. 우아하고 기품 있게 행동해야 해. 항공기가 착륙하기 전부터 이현은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있었다.


입국장 문이 열리자 웅성거리며 기자들이 모여들었다. 이현은 머릿속에서 연습했던 대로 환하게 그리고 우아하게 웃으며 백경수의 손을 잡고 사람들 앞으로 걸어 나왔다.


등이 깊게 파진 롱 블랙 원피스에 한껏 위로 틀어 올린 비하이브 헤어가 이현의 하얀 얼굴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이현의 손이 움직일 때 마다 클러치 백에 매달린 황색 크리스탈이 오묘한 빛을 내며 반짝이고 있었다.


베이지색 캐주얼 수트 상의를 한 쪽 팔에 걸고 한 손으론 이현의 손을 꼭 잡은 채 포토라인으로 성큼성큼 걸어온 경수는 기자들 앞에 꾸벅 인사를 했다. 키 큰 경수가 허리를 굽히자 옆에 있던 몇몇이 환호를 하며 박수를 쳤다.


재벌이라 할 만큼 재력 있는 집안을 배경으로 두고 있었지만, 경수는 누구에게도 오만하거나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경수는 어디서나 겸손하고 반듯한 모습이었다.


이현도 함께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이현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건 유명 재력가 집안의 며느리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세계적인 포토그래퍼의 대열에 서 있는 뛰어난 예술가라는 점이었다.


"채이현 선생님께 질문 드리겠습니다. 프랑스에 가신 지 5년 만에 돌아오셨는데 이제 공부는 다 마치신 겁니까?"


이현은 활짝 웃으며 옆의 경수를 올려다보았다. 경수도 부드럽게 웃으며 이현과 눈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네, 공부 다 마쳤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공부는 마쳤으니 이제 가정에 열중해 달라고 하는데요?"


장난스런 이현의 말에 사람들이 와르르 웃었다.


"그럼 백 대표님은 채 작가님 활동을 원하지 않는다는 말씀인가요?"


기자의 말에 경수가 손을 번쩍 들었다.


"잠깐 해명 좀 하겠습니다. 사담이지만 우리, 결혼하자마자 프랑스로 가서 공부하느라 신혼을 보낼 여유가 없었어요. 이제 공부 마쳤으니 한국에서 진짜 신혼생활을 좀 즐겨보려고 합니다. 제가 나쁜 남편인가요?"


사람들이 와르르 웃으며 박수를 치는 동안 여기자 하나가 앞으로 걸어오며 소리쳤다.


"채이현 선생님. 5년 전 한국 떠나실 때 작고한 김주엽 선생님 작품파일로 말이 많았는데 개인적인 생각은 어떤지 말해줄 수 있으신가요?"


갑작스런 질문에 이현이 깜짝 놀란 눈으로 경수를 올려다보았다. 경수는 웃으며 이현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개인적인 어떤 생각을 말씀하세요?"


이현이 기자에게 조심스레 되물었다.


"세계적인 포토그래퍼 김주엽 선생이 남긴 작품파일을 말하는 겁니다. 채이현 선생님이 측근이셨으니 분실된 그 파일에 대해서 제일 잘 알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이현은 우아한 웃음을 띠고 있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이 넘어갔다.


"전에 말씀 드린 적 있지만... 그 파일은 김주엽 선생님께 정말 중요한 파일입니다. 그런 중요한 걸...."


여전히 미소를 띠고 차분히 말을 하고 있었지만 이현은 자꾸만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


"잠깐, 이것도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경수가 다시 손을 번쩍 들었다.


"이 사람은 천상 예술가인 사람입니다. 작품 외에 다른 건 신경 쓸 겨를이 없는 사람입니다. 김주엽 선생은 제 고등학교 선배기도 하고, 아주 친해서 작고하시기 전에 저와 많이 어울렸습니다. 그에 관한 질문은 제게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럼 그 작품 파일이 누구 손에 흘러들어갔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말씀입니까?"


당당하고 반듯하게. 어떤 흐트러짐도 없이. 이현이 안으로 뇌는 동안 다른 기자가 뛰어들었다.


"전시회 일정 때문에 귀국을 앞당겼다고 들었는데요. 채이현 선생님 전시회가 곧 있을 예정인가요?"


이현이 활짝 웃음을 지었다.


"제가 5년간 프랑스에서 작업한 일부를 전시할 예정입니다. 전시회 일정은 보도 자료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예전 전시들은 빛을 주제로 캐츠아이 이름을 걸고 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동일한 컨셉으로 보면 되나요?"


"기억하고 계셨군요. 맞습니다. 저는 여전히 빛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늘 빛과 사물, 빛과 인물로 전시를 했었습니다. 이번 전시에 더 해지는 건 빛과 감정입니다. 최근 작품들은 빛과 감정에 대한 것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어디서 저렇게 또랑또랑하고 당찬 목소리가 나올까싶게 이현의 목소리는 힘이 있고 강단이 있었다.


"자자... 그럼 이제, 우리는 사생활 좀 누리겠습니다. "


뭔가 더 질문이 나오기 전에 경수는 먼저 마무리를 했다. 두 사람은 시작 할 때처럼 다소곳 인사를 마치고 밖을 향해 걸어 나갔다. 경수의 한 손엔 여전히 이현의 손이 꼭 잡혀 있었다. 누가 보아도 사랑하는 아름다운 커플의 모습이었다.


이현은 경수의 손을 잡고 걸으면서도 자꾸만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당당하게 대처하리라 그렇게 다짐했지만 한 순간 현기증이 일면서 머릿속이 뿌옇게 안개로 차는 느낌이었다.


"휴.. 이제 좀 살 것 같네. 당신 수고했어. 집 가는 동안 눈 좀 감고 쉬어."


대기해 있던 차에 오르자 경수는 몸을 구부려 옆에 앉은 이현에게 어깨를 내 주었다. 어디서나 반듯하고 수려한 경수였지만 작고 단아한 이현 앞에선 이상하게도 자신의 큰 키가 거추장스럽게 만 느껴졌다.


이현은 눈을 감고 경수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


이미 5년 전의 일이었다. 이현이 경수와 결혼한 이유도, 프랑스로 떠난 이유도, 그리고 그동안 한 번도 한국에 돌아오지 않은 이유도 김주엽과 무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모든 건 우연일 뿐이었다. 의도하거나 계획했던 일이 아니었다. 계획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갑자기 주엽이 교통사고를 당하고 죽게 될 줄 누가 알 수나 있었을까.


주엽의 죽음으로 제일 피해를 입었던 사람이 있다면 바로 이현 자신이었다. 사람들은 경수와의 결혼으로 이현이 신데렐라라도 된 줄 알지만 주엽이 살아있었다 해도 지금 이현의 상황과 크게 다를 건 없었다.


주엽은 늘 프랑스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계획하고 있던 세 번의 전시를 한국에서 끝내고 이현과 프랑스로 떠나는 게 꿈이라고 했었다.


주엽이 살아있었다면 이현의 대학졸업과 동시에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렸을 것이었다. 그리고 프랑스로 떠났을 것이었다.


하지만 주엽은 죽었고 이현은 혼자 남았고 결국 경수와 결혼하고 얼마 후 프랑스로 떠났던 것이다.


그로부터 5년이었다. 5년 정도면 잊혀질 줄 알았다. 그 정도의 세월이면 쌓인 눈 위로 또 눈이 쌓이듯 밑바닥의 것들은 눈 속에 파묻힐 줄 알았다.


"뭐 좀 먹고 들어갈까? 배고프지 않아?"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경수의 조심스런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난 괜찮아. 배고파요?"


"도우미 아주머닌 내일이나 돼야 온다는데...."


"일단 집부터 가요."


"그래. 좀 더 가야하니까 눈감고 있어."


경수는 이현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하지만 이현은 다시 잠들 수 없었다.


한국으로 돌아오기로 결정한 후 단 하루도 주엽의 작품파일에 대한 생각을 놓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스스로를 얼마나 다독였는데 그 여기자가 나타나 모조리 망가뜨려 놓은 것 같았다. 공항에서의 그 순간을 생각하니 몸이 저절로 떨렸다.


"당신 불편하구나. 자, 이렇게 기대봐."


경수가 고쳐 앉으며 이현의 몸을 감싸 자신에게 기대게 했다.


"공항에서... 그 여 기자..."


"아 그 기자? 마음 쓰지 마. 걔 원래 스타일이 좀 그래. 신경 안 써도 돼. 좀 재밌는 친구야."


"아는 사람이에요?"


"응. 대학 후배야, 장주영이라고. 우리 결혼식에도 왔을 걸. 걔가 오래 전부터 주엽형 하고도 좀 알거든. 그래서 그냥 던져본 말인 거 같던데 뭐."


"...."


"신경 쓸 거 없어. 괜히 그러는 거라니까."


"괜히 왜 그런 말을 하지?"


"당신하고는 상관도 없는 일인데... 왜 그런 걸 신경 써.. "


이현은 눈을 감았다. 당당해야 해. 흔들려선 안 돼. 비행기 안에서 그랬듯 스스로 자신에게 다짐을 했다.


경수는 이현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다시 잠이 들었는지 말없이 눈을 감고 있었다. 경수는 이현의 반듯한 이마로 내려온 머리칼을 쓸어 올려 주었다.


결혼을 이미 두 번이나 해봤지만 1년 이상 지속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현을 만나 벌써 5년이 훌쩍 넘고 있었다. 먼 길을 돌아 진정한 자신의 집에 안착한 기분이었다.


실패한 결혼에서 받은 상처가 쉽게 아물지는 않겠지만 이현 덕분에 지우고 싶은 옛날 일들이 아득하게 경수의 머리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경수에게 이현은 그 어떤 존재보다 소중하고 귀한 사람이었다.


5년 동안 프랑스에 머물면서 이현이 경수와 의견충돌을 일으키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이현은 자신이 원하거나 싫어하는 게 분명했고 그 선을 터치하지 않는 이상 경수에게 원하거나 요구하는 게 없었다.

더구나 대부분의 시간을 작업에 쏟느라 작업 외엔 모든 것에 무심 해 보였다.


경수는 두 번째 결혼이 깨질 때 이제 더 이상 남들 같은 결혼생활은 자신에게 없을 줄 알았다. 두 번째 이혼을 하고 많이 힘들 때, 프랑스에 있던 주엽이 귀국을 했고 주엽이 많은 위로가 되었었다.


자주 만나진 못했지만 저녁에 돌아와 전화로 주엽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깊은 위안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그리 오래가진 않았다. 주엽이 교통사고를 당했고 그렇게 죽고 말았다.


사람들은 경수를 향해 금수저를 가지고 태어났느니 했지만 정작 경수는 행복하지 않았다. 풍족한 청년시절을 보냈다고는 하지만 결혼을 하면서 모든 꿈이 다 깨져버렸었다.


그러다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이현이 자신 앞에 나타났고 경수는 그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다.



차가 서행을 하더니 집 앞에서 멈추었다. 이현은 잠이 들었는지 차가 정차한 것도 모르고 여전히 경수의 어깨에 머릴 기대고 있었다. 예쁘게 위로 틀어 올린 이현의 머리칼을 경수는 가만히 쓰다듬었다.


이런 평화와 이런 사랑을 얻기 위해 그동안 험난한 길을 거쳐 왔다고 생각하면 감사한 마음 뿐이었다. 언제까지라도 어디까지라도 이 자그마한 아름다운 여자에게 어깨를 내주며 이렇게 앉아있으리라 경수는 마음먹었다.


"도착했어...?"


이현이 동그랗게 눈을 뜨고 경수를 바라보았다. 경수는 이현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자, 이제 우리 진짜 우리 집으로 돌아왔어. 이제부터 우리한텐 행복만 있을 거야."


경수는 이현의 볼에 입을 맞추고 활짝 웃었다. 이현도 엷게 미소를 지어주었다. 하지만 이현의 머릿속에는 잊을 수 없는 목소리 하나가 계속 떠돌고 있었다.


"세계적인 포토그래퍼 김주엽 선생이 남긴 작품파일을 말하는 겁니다."


장주영의 목소리였다.




-계속


작가 한마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