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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링블링 : 쇼핑보다 반짝이는 청담동 연애이야기] prolog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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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나이 스물아홉에 찾아온 이별은, 그 어떤 순간의 이별보다도 몇 배나 더 고통스럽다??


만약 크리스마스나 밸런타인데이, 화이트데이 등등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채 이별을 고하는 자가 있다면, 즉각 감옥에 처넣어야 마땅하다. 아님, 이런 특수한 상황에서 저지른 살인은 정당행위(?)로 풀어주든가.


언젠간!! 이런 법이 생길지도 모른다. 아니, 생겨야 한다.


이름하여,


로맨틱 홀리데이 이별 금지법!!


어쨌거나, 가장 달콤한 연휴로 공식 지정된 크리스마스를 약 한 달 남겨놓고 참혹한 이별의 늪에 빠져야만 했던 세 여자가 홍콩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연인에게 버림받은, 소위 잘나가는 20대 후반의 싱글녀들이 해야 할 일이 뭔지 알아? 해외로 쇼핑을 가는 거야. 화끈한 파티도 즐기고 말이지. 이름하여, 화려한 싱글의 화려한 여행!!!”


얼마 전, 남편과 이혼을 목적으로 ‘별거’라는 것을 단행한 지은이 말했다. 카푸치노의 하얀 거품 중앙에 계피가루로 그려져 있는 하트를 무자비하게 뒤섞던 그녀는, 당장이라도 강단에 올라가 마이크를 집어 들 것 같은 기세였다. 지은은 카푸치노 한 모금을 마시더니 핸드폰으로 결국 일을 저질렀다.


“탑 항공사죠? 이번 주 금요일 저녁, 홍콩행 티켓 세 장이요. 물론, 비즈니스죠!!”


맙소사.


1분 만에 여자 셋의 홍콩여행이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젠장.


말이 좋아 화려한 싱글의 화려한 여행이지, 여과 없이 표현하자면 이성에게 버림받은 비참한 솔로들의 도피여행일 뿐이다. 난 내 옆 좌석에서 다이어리에 홍콩 Get List를 작성하고 있는 지은과,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화이트 셔츠를 입은 남자의 살짝 걷어올린 소매단 밑으로 보이는 탄탄한 팔뚝에 정신이 팔려 있는 서정을(분명 속으로 ‘유레카’라고 외쳤을 것이다.)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이봐들, 우린 지금 현실을 망각하고 있는 거라고!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친한 친구 셋이 동시에 ‘이별’이란 걸 경험할 확률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해?





{ 10월 22일 수요일 : 신지은, 별거 시작한 날 }


29세. 명품브랜드 PR매니저. 사랑도 물건도 남자도, 명품만을 사랑하는 그녀.


얼마 전 ‘여자는 살찌고, 남자는 바람난다’는 살과 바람의 역관계가 성립하는 계절인 가을의 문턱, 지은은 워커힐 에스톤하우스에서 웨딩마치를 올렸다. 베라 왕의 로맨틱한 드레스를 입은 그녀의 옆엔 근사한 스펙의 남자가 턱시도를 입고 서 있었다. 한마디로, 그녀는 지상에서 최고로 행복한 신부였다.


결혼에 사랑이 필수요소가 아니라면, 지은과 그의 결합은 완벽했으며 황홀했다. 하지만, 그녀의 결혼생활은 불과 2개월뿐이었다. 이유는 남편의 바람 때문이었다.


그 남자는 당돌한 지은이 아이를 낳기 싫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바람을 피운 것이라고 했다. 결국, 그들은 이혼을 목적으로 한 별거를 시작했다.


‘대체 왜 바람을 피운 거지? 도대체 왜, 무엇이 어쩔 수 없었단 말인가? 살이 찐 것도 아니고 성형 부작용이 생긴 것도 아닌데!’, ‘과연 이런 경우에는 누구에게 이혼에 대한 책임이 있는 것일까?’라는 의문만이 남은 짧디짧은 결혼생활이었다.





{ 10월 17일 금요일 : 윤서정, 10살 어린 그녀에게 모욕당한 날 }


29세. 꽃미남이 많기로 소문난 일어학원의 원장. 롤러코스터처럼 와일드한 섹스 라이프를 즐기는 그녀.


강의 도중 당최 해석할 수 없는 ‘의문의 문자’를 받은 서정은, 원장실 문을 열고는 깜짝 놀랐다고 했다. 자신보다 10살은 어려 보이는 여자가 서정의 소파에서 다리를 꼰 채 탁자에다 손가락을 까닥거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복잡미묘한 상황에서 정체불명의 여자는, 서클렌즈를 껴 마치 바둑알을 박아놓은 것 같은 눈으로 서정을 똑바로 응시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쪽이 오빠 애인이에요? 몇 살이에요? 나보다 10살은 많아 보이는데. 완전 아줌마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우리 오빠 좀 이만 놔주세요!! 당신이 나보다 잘난 건 그 명품백과 옷, 구두를 살 수 있는 능력뿐이잖아요. 그건 나도 나이가 들면 생기겠죠?”


이런.


어린 그녀는 서정이 명품백과 구두를 살 만한 능력을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과 노력을 했는지 모르는 게 분명했다. 어쨌든, 충격이라도 받은 듯 잠시간 멍해진 서정은 곧 정신을 차렸다.


“이봐 - 써클렌즈. 너 미친 거 아니야?”


유리컵이라도 깨트릴 기세로 소리를 지른 후 서정이 한 말은 “너 언제부터 그 망할 놈이랑 만났어?”, “그 개자식이랑 어디까지 갔어?”, “내 번호는 어떻게 알아낸 거야?”, “스토커는 너지? 아니다 혹시 그 쓰레기 같은 놈이 시키디?” 따위의 ‘하.찮.은.’ 것들이 아니었다.


“왜 내가 나이 들어 보여? 이 짧은 웨이브 머리 때문에? 아님, 내가 든 백 때문에? 그것도 아님, 아 - 대체 이유가 뭐야? 왜 내가 너한테 아줌마라는 호칭을 들어야 하는지 알려줘!!”


원장실 벽면에 붙은 거울을 살피며 다그치던 서정을 보며, 어린 그녀가 당황스런 표정으로 자리를 뜬 것은 어쩜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걘, 니가 미친 줄 알았을걸?”





{ 10월 19일 일요일: 나 정시현, 프러포즈를 할 줄만 알았던 애인에게 이별선고 받은 날 }


29세. 소설가 겸 연애 칼럼니스트.


알코올의 힘 없인 정신적으로 견디기 힘들다는 마지막 20대를, 애인에게 근사한 프러포즈를 받고 곧 결혼에 골인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만으로 꿋꿋이 버티고 있던 어느 날, 이별을 선고받았다. 그것도 로맨틱 코미디가 상영되고 있는 코엑스 메가박스 M관에서, 나와의 섹스가 더 이상 자극적이지 않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말이다.


정면을 응시한 채 천천히 이별의 정당성을 설명하는 그 자식을 보며, 당장이라도 ‘미친놈!’이라고 소릴 지르고 싶었다. 들고 있던 가방으로 그 자식의 머리통을 후려치는 것은 옵션이고. 그렇지만 그럴 수 없었다.


지능적인 놈. 그런 상황을 대비해 영화관을 선택하다니. 로맨틱 코미디의 행복한 여주인공이 깔깔대는 웃음소리에 모두가 빠져들어 있는 가운데, 나 혼자만이 멜로를 찍고 있었다. 결국 난 자리에서 일어나 그곳을 빠져나왔고, 그는 날 뒤따라오지 않았다.


나쁜 자식. 영화관에서 이별을 고할 거라면 새드엔딩의 멜로를 택할 것이지. ‘그래. 저렇게 예쁜 여자도 이별이란 걸 하는데, 나 같은 처지에 당연한 거 아니야?’ 하고 위로라도 받게 말이다.


어쨌거나, 다음 날 그의 핸드폰 번호는 이미 과거의 번호가 되어 있었고, 그 다음 날 그의 미니홈피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물론 내가 모델이었던 수천 장의 사진도! 그가 살던 오피스텔이 흔적도 없이 정리되어 버린 것은 어쩜 당연한 순서였다.


마치, 6년이나 된 그와 나의 시간들은 아예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아주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이건 마법이었다. 갑작스레 모든 것이 사라지는 그런 끔찍한 마법. 누가 이별이 잔인할수록 미련은 가볍다고 말했는가? 거짓이다.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를 회상하던 난, 힐끔 지은의 다이어리를 훔쳐보았다. 이미 한 페이지가 빼곡해져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2008 F/W를 모조리 꿰뚫고 있는 그녀이니. 난 모 패션지 기자가 테이블 뒤에 숨어 그녀의 다이어리를 읽고 있는 것을 목격한 적도 있다.


사실, 매력적인 쇼퍼홀릭 천국 홍콩에서 지름신을 물리치기란 자신에게 꼭 맞는 남자를 찾기보다도 어렵다고들 한다. 게다가 어쩜 지름신보다 더 무섭다는 파산신을 만날 가능성도 농후하다.


지은의 다이어리는 벌써 다음 장으로 넘어가 있었다.


그래! 나도 Get List를 작성해야겠어. 일단 빼곡하게 적어놓은 후, 성숙한 여자의 결단력(?)을 발휘해 하나하나 지워 나가는 거야. 그러다 보면 꼭 필요한 것만 남지 않겠어?


마침, 이륙준비를 할 예정이니 안전벨트를 매달라는 기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쳇!! 쟤네 속으론 이렇게 말할걸? 비행기가 곧 이륙할 예정이오니 닥!치!고 안전벨트를 매 주시기 바랍니다!!”


서정이 아까 그 화이트 셔츠에게 매혹적인 눈빛을 보내는 스튜어디스를 째려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 - 서정이 Get하고 싶은 건 바로 저 남자구나. 아마, 저 미모의 스튜어디스도 마찬가지일 테고.


비행기가 흔들리며 이륙하기 시작했다. 이륙 후 화이트 셔츠가 일어나 화장실 쪽으로 향하자, 서정은 기다렸다는 듯 핸드폰을 손에 쥔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다이어리를 덮으며 서정이 사라진 통로를 바라보았다.


혹시 들어본 적 있는가? 비즈니스석에서만 등장하는 이상기류에 대해. 난기류도 제트기류도 아닌 그것은 묘한 지점에서 생성되는데, 바로 스튜어디스와 여성 고객 사이이다. 공중에서 그녀들의 시선이 부딪칠 때 생기는 이 이상기류의 중앙에 맥 노트북을 보고 있는 비.즈.니.스.석. 근사한 핸섬남의 존재는 물론 당연한 순리 아닐까?

작가 한마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