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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즈 나이트 라이크에덴] Track 12. 관리인(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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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 12. 관리인(15)

  • WHITE



문을 날려버리기 위해 숨을 뱉어내는 표정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날아간 문짝이 복도의 벽면과 충돌하여 튕겨 오르고 있다.


“…….”


살풍경한 표정으로, 시간정지의 능력자가 제일을 본다.


각오와 살기를 꾹꾹 눌러 담은 얼굴이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까지 행동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회사로부터는 그런 지령을 받았다.


세르지오 루루타의 암살이 끝날 때까지 이 남자를 잡아두고 있으라고.

제일의 눈이 그녀를 똑바로 직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10대 초반의, 어린애라고 해도 충분할 외모로 보인다.


분홍색 패딩 조끼를 입고 삼색의 야구모자를 눌러쓴 것이 또래의 여자애들과 크게 다를바는 없는 것 같다.


가볍게 난 주근깨에 붉은 기운이 묻어나있는 머리칼, 아직 미처 갈아내지 못한 유치와 우유와도 비슷한 체취를 가진 소녀다.


갈색의 부드러운 피부는 제대로 단련되지 않은 육체임을 알게 해준다.


그런 소녀가 꺼내는 것은 문구점에서 쉽게 구매할 수 있는 커터 나이프.

조금 전에 찔러넣은걸로 인해 거머리를 모조리 소진했다.


와이어를 쓰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그래서는 죽여 버리고 만다.


계산상으로는 이 정도의 거머리면 인간을 행동불능으로 만들기에 충분한데…… 이 남자의 <특권>이 그것을 막은 모양이다.


커터 나이프로는 사람에게 큰 부상을 입힐 수는 없다.


단련된 암살자라면 더더욱 그렇다.

눈이나 혀 등, 공격하기 쉬운 부분을 노리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우…….”


하지만 그런만큼 저항감이 인다.

맨정신으로 사람의 눈이나 입안에 상처를 입힐만한 위인이 되지 못한다.


시간정지의 소녀는 마음을 굳게 다잡으며 커터 나이프의 날을 길게 뽑아냈다.

눈이나 혀는 공격하자니 내가 더 아플 것 같으니까…….


그러니까, 손톱을 뽑아내자.


뿌드득.


시간이 멈추지 않았더라면 그런 소리가 들렸을 것이다.

양 손으로 커터 나이프의 날을 힘껏 밀어 넣어 제일의 엄지손톱을 벗겨낸다.


제법 완력을 요구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힘이 든다.


죽이는 거라면 차라리 낫다.

눈을 질끈 감고 와이어로 목을 졸라죽이거나 가슴팍에 칼을 꽂아 넣으면 그만이니까.


시간이 멈춰있는 동안이라면 고통도 느끼지 않으니 단숨에 죽일 수 있다.


능력의 패널티는 연령의 역행.

리스크는 호흡의 정지.


능력발동 직전, 호흡을 멈췄던 시간에 비례하여 시간을 정지할 수 있는 능력.

두 말할 것도 없이, 세상에 몇 되지 않는다는 백색의 눈동자.


지나치게 강력한 능력을 지닌 나머지, 흰색 눈동자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패널티를 짊어지게 된 최강의 능력자.


사용자의 이름은 죠제 루페.

올해 나이 84세에 이른…… 랭킹 2위의 암살자.


‘죽이지 못하는게…… 까다롭네.’


제일의 손톱을 세 개가량 벗겨낸 그녀는, 제일이 있던 방 안으로 이동하며 숨을 가다듬었다.


콰아아앙!


문짝이 벽면과 충돌하는 소리에 이어, 제일이 지면에 착지한다.


“끄악!”


뒤늦게 손톱이 벗겨졌다는 것을 깨닫고 손을 부여쥔다. 바로 옆에서 온 몸을 구속당한 시엘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뭐야, SM취미라도 생겼냐?”


가볍게 놀려준 다음 그녀를 구속한 재갈과 케이블 타이를 풀어낸다. 찐득한 침이 묻어난 헝겊에 눈살이 찌푸려진다.


“푸하…… 허억, 허억…….”

“괜찮아?”


시엘이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모르긴 해도 상당히 겁에 질린 모습이다.


“제일, 손이…….”

“괜찮아. 손톱 세 개가 나갔을 뿐이니까.”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으면서, 위치가 역전된 처지에 놓인 죠제가 숨을 가다듬고서 재차 능력을 발동하기 위해 호흡을 정돈한다.


사람이 숨을 연달아서 멈출 수는 없다. 이대로면 점점 텀이 짧아져서 당할 위험도 있다. 여기서는 다소 인터벌을 두는 쪽이 좋을 것이다.


“야, 시간정지 능력자! 사장이 얼마 주기로 했길래 우릴 막는거냐! 랭킹 10위권의 백제일 대선생님을 상대로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고작 10위권 내에 든 걸로 까불기는!

그렇게 대꾸해주려다가 참았다.


<특권>과 신체능력을 골고루 갈고닦은 제일과는 달리, 죠제는 오로지 능력에만 의지하여 이 자리에 올랐다.


아무리 육체를 단련하더라도 패널티로 인해 어려져버리면 그것이 무위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야, 제일. 너 랭킹 내려갔거든…… 지금은 13위 정도일걸.”

“헉…… 진짜?”


심지어 강등까지 당했어?

저런 멍청이를 상대해야 하다니.


아무리 회사의 지령이라지만 신물이 난다.


“후우…….”


호흡을 가다듬은 후 숨을 멈췄다. 머릿속으로 천천히 숫자를 세어가며 곧바로 들키지는 않을 각도로 느릿느릿 움직이기 시작한다.


자신이 나왔던 방으로 다시 들어갔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는지, 언변으로 시간을 때워대는 것이 이쪽 입장에선 큰 행운이었다.


‘120…… 좋아.’


2분 동안 숨을 멈췄으니 그만큼 시간을 멈출 수 있다.


“아, 망할! 방 안에 있었잖아!”


제일도 나름 수를 써둔 모양이다. 빠져나가기 위해 이동하던 중 사슬이 다리에 걸렸다.


잔꾀만 많은 녀석인지, 쓸데없이 주절거리면서 자신을 포착하기 위한 사슬을 깔아두었던 모양이다.


“시간을 멈춰, <퀸>!”


제일이 방 안으로 진입한 것과 동시에 시간을 멈췄다.

아슬아슬하게, 제일의 나이프가 죠제의 코끝을 건드리고 있었다.


바늘에 살짝 찔린 것 같은 따끔함을 느끼며 정지한 시간 속을 달렸다.


‘저 놈, 정말로 10위권 밖 맞아?’


죠제는 자기 외 다른 암살자들의 능력을 잘 모른다.

서로 경쟁하는 관계도 아니거니와, 상성상 무적을 자랑하는 능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롭 헬포드를 제외한 5위 이내의 암살자들은 사내에서 거의 명예직이나 다름없는 대우를 받는다.


초창기 막 회사가 생겼을 무렵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반쯤 임원이라는 기분으로 출근하고 있을 정도다.


‘간만에…… 피가 끓는걸.’


유예된 2분의 시간동안 달리고 달려서 제일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엘리베이터를 조작해 개인 집무실로 향하고는 제대로 된 장비를 갖춘다.


“허억…… 허억…….”


가장 먼저 찾은 것은 산소 캔이었다.


호흡을 정돈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물건으로, 신선한 공기를 공급받으면서 어린 몸이 숨을 제대로 멈출 수 있도록 주의에 주의를 기울인다.


다음으로 준비할 것은 물론 거머리.

죽이지 않고 발만 묶어두기 위해서는 거머리 등의 보조도구가 필요하다.


개인적인 취향 문제로 의약품의 사용은 꺼리는 편이다.


수십 개의 거머리를 장비하고, 만일을 대비하기 위해 스턴 건까지도 허리에 채웠다.

처음부터 스턴 건을 동원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상대를 너무 얕잡아봤던 것 같다.


‘백제일이라는 놈은 크게 문제가 안 돼. 시엘…… 단순한 안내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을 줄이야.’


능력을 들킨 것은 반쯤 그녀 때문이다.

<이방인의 노래>가 아니었다면 바닥의 재로 들키지 않았을 터였다.


우선은 시엘을 기절시키자. 제일을 막는 건 그 다음이다.


“좋아. 할 수 있어.”


준비를 마친 그녀가 빠르게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죽이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저지하기 위한 싸움이라니, 이런 생소한 환경에 놓인 것은 처음이다.


체스를 예로 들자면 그녀는 나이트와 룩, 비숍과 퀸을 빼고 킹과 폰만을 가지고서 상대를 제압해야 하는 꼴이다.


죽여서는 안 된다는 제약이 없었다면 제일은 여기까지 올 것도 없이 백 번은 죽었다.


‘으…… 제길, 생각해버렸잖아.’


제일의 손톱을 뜯어냈을 때의 감촉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나이를 역행하는 패널티로 인해, 그녀는 타인에게 감정이입을 쉽게 하는 편이다.


사고능력도 어른이었을 때보다 부족하고 쓸데없는 감수성도 넘쳐난다.


동물들이 나오는 TV 애니메이션을 진심으로 재밌게 보는 몸이 되어버린데다가 툭하면 눈물을 훌쩍이는 연약한 정신의 소유자가 되어버렸다.


심지어는 밤 11시가 넘어가면 미칠 듯한 졸음이 쏟아지는 몸뚱이가 되어버리기도 했다.


“……훌쩍.”


가볍게 흐른 콧물과 눈물을 닦아낸 다음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숨을 멈춘 채 잽싸게 달려 제일을 향해 가려고 하는데…….


“으앗!”

“와앗!”


사내의 복도를 배회하던 이상한 커플과 충돌하고 만다.


“이 망할 꼬맹이가아, 눈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거야아!”


처음 보는 여자다. 암살자인가? 아니면 신입사원?

……이 시간에 손님이 있을 리 없는데, 누구지?


“쟈쟈 씨는 왜 그렇게 말을 험하게 해요. 자, 괜찮니?”


세 명의 남녀……?

아니, 두 명의 여자와 한 마리의 마물이 거기에 있었다.


“당신들은…….”


아, 그런가. 백제일이 협력자를 몇 명 고용할거라는 얘길 들었는데.

녀석의 지인인가. 겉으로 보기에는 대단한 놈들로 보이진 않지만…….


잠깐, 한 명. 아는 얼굴이 있다.

저건…… 분명히…….


“캐시 켄트?”

“아, 네에.”


라이크에덴이 낳은 최고의 스타이자 헐리웃의 지명도 넘버 원 아역배우가 왜 여기에?

죠제의 얼굴이 소녀처럼 물들어버렸다.

동경하는 스타를 만나 가슴이 뛰는 어린아이의 얼굴이다.


‘큭…… 진정해! 지금 한창 싸우려는 중이잖아! 이렇게 들떠 있을 때냐고!’


감정선 조절이 어려운 어린아이의 특성이 고스란히 나타났다.

그로 인해 마음의 빈틈이 생겨난 마음의 빈틈을.


적, 백제일은 정확하게 찌르고 들어왔다.


“잡아! 그 자식, 잡으라고!”


각력을 강화하여 벽면을 타고 달려온다. 사슬과 연결시킨 나이프를 던져 이쪽을 노리고 있다.


‘숨을 얼마나 멈춰뒀었지?’


앞뒤 가릴 것 없이 시간을 정지한다. 이대로 당할 수는 없으니까.


“……큭!”


멈출 수 있는 시간이 짧다. 제일의 나이프가 죠제가 있던 그 자리를 정확하게 꿰뚫어버린다.


“죽일 셈인가요!”

“너는 어떻고!”


놀라서 심장이 벌렁거린다. 전성기 때는 이 정도 위기에 호흡이 흐트러질 일이 없었는데. 너무 어려진 탓이다.


‘나중에 사장에게 따져야겠어. 앞으로 이런 일은 날 시키지 말고 다른 녀석을 시키라고.’


숨을 멈추고 머릿속으로 천천히 숫자를 센다.


제일의 동료로 추정되는 캐시 켄트 외 2인은 어찌 된 영문인지를 모른 채 이쪽과 저쪽을 번갈아 돌아보고 있다.


“뭐예요, 어떻게 된 일이에요?”

“시끄러워! 그 꼬마 빨리 잡아! 어른을 대하는 예의를 주입시켜 주려는 참이거든!”


삼류 악당이나 할 법한 소리를 내며 제일이 사슬을 회수하려 든다.


‘지금이다!’


당장 멈출 수 있는 시간은 5초 남짓. 이거면 충분하다.


제일은 나이프에 연결된 사슬을 던졌었다.

그리고 지금, 멈춰있는 시간 속에서 제일의 손은 사슬을 회수하기 위해 자신의 손으로 쥐고 있다.


<특권>으로 창조한 물건이라 하더라도 사슬은 일단 금속.

전기가 통하는 전도체다.


스턴건의 출력을 최대로 높이고 스위치를 넣었다.


정지한 시간 속에서 전류는 흐르지 않는다.

시간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놈의 몸은 감전된 상태로 몸부림치게 될 것이다.


5초 경과.

시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끄아아아!”


제일이 비명을 지르며 사슬을 놓친다.

<특권>으로 창조된 사슬이 사라지고, 나이프가 제어권을 잃은 채 바닥으로 떨어진다.


“뭐야아, 이 꼬마아! 무슨 짓을 한 거야아!”


의수와 의족을 단 여자가 절그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자신에게 손을 뻗는다.

이번에 정지할 수 있는 시간은 2초.


의수 여자와 마물에게 각각 거머리를 찔러 넣었다.


‘왜 여기에 캐시 켄트가…….’


캐시에게는 붙일 마음도 없고, 붙이려 해도 시간이 없다.

의수 여자의 사정거리로부터 벗어난 후 다시금 숨을 멈췄다.


“제…… 기랄!”


몸이 마비된 상태의 제일을 향해 숨을 멈춘 채 달렸다. 호흡정지 상태에서 몇 초나 달릴 수 있을까.


그의 곁을 여유롭게 빠져나가고 복도의 모퉁이를 꺾는다.

시엘이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푸하!”


멈췄던 호흡의 한계가 찾아왔다.

숨을 토해내며 시엘을 정면에 둔 채 시간을 멈춘다.


달리던 중이어서 몇 초나 멈출 수 있는지는 세지 못했지만 시간 정도는 벌 수 있다.


‘너는…… 상당히 위험해.’


스턴건의 배터리를 교체하여 출력을 최대치로 높인 전격을 선사해주었다.

같은 위력이라 하더라도 제일이 당했던 것과는 다를 것이다.


심장에 직격으로 전격을 먹여줄 거니까.


정지한 시간동안 배터리의 한계치만큼 전기 세례를 부어준 후, 스턴건을 과감하게 버렸다.

설령 죽는다 하더라도 개의치 않을만한 전압과 전류였다.


시간 정지가 해제되기 무섭게 다시 달려가기 시작한다.

연달아서 호흡을 멈췄기 때문에 이 이상 숨을 참기 버겁다.


“윽……!!”


거기에 나이가 어려지는 패널티가 작용했다.

키가 다소 줄어들어 신발이 벗겨진지라 그 자리에서 넘어지고 만다.


뒤를 돌아보니 아직 놈들은 자신의 뒤를 포착하지 못한 상태다.

이쯤 했으면 안심해도 되지 않을까.


“헤헤, 꼴 좋다…….”


정면승부였다면 이렇게 애를 먹을 일도 없었을 것을, 꽤나 귀찮게 됐다.


‘그래도 아직 방심하지 말아야지, 앞으로 좀 더 잡아두고 있어야 하니까.’


제일 일행을 잡아두고 그 사이 세르지오의 암살이 이루어진다면 회사 측의 승리다.


설령 잡아두지 못한다 하더라도 저 정도의 전격을 먹었다면 제대로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시엘과 백제일이 제대로 움직이지 못 하면 이 팀은 그 셋을 상대로 절대 이길 수 없다.


“결국 10대도 벗어난 것 같은데…… 쳇.”


죠제는 혀 짧은 소리를 내며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았다.


나이를 역행하고 말았지만 이 시기는 성장이 빠른 시기이니 몇 달간 능력사용 없이 요양을 하면 금방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자, 그럼 다음 준비를…….’


이어서 제일을 붙잡아두기 위해 책략을 도모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만에 하나라도 놈들이 회복한다면 더 붙잡아둘 수는 있어야 할테니까.


여기부터는 난이도가 확 낮아진다.


전기충격으로 인해 두 사람의 피지컬은 떨어졌고, 이쪽은 호흡을 확보해서 안정적으로 시간을 멈출 수 있다.


필요하다면 트랩까지도 설치할 수 있는 상황이니 얼마든지 붙잡아둘 수 있다.


‘그런데…… 왜 하필 그 타이밍에 세 명과 부딪친거지.’


죠제는 제일 일행을 너무나도 얕잡아보고 있었다.


가령, 죽이기 위한 싸움이 아니더라도 제대로 준비만 갖췄더라면 얼마든지 초반 제압에 성공했을 것이다.


그녀는 백제일과 그 일행을 너무나도 얕본 나머지, 거머리 몇 개와 커터 나이프 정도로도 충분히 발을 묶어둘 수 있다고 생각했다.


완벽한 오산이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스턴건 등의 무장을 갖추거나 그에 준하는 대비책을 갖춘 상태에서 제일을 맞았어야만 했다.


가볍게 소풍이라도 나가는 기분으로 그들의 앞에 선 것이 가장 큰 불찰이었다.


제일의 파트너인 시엘이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도 몰랐고, 제일의 동료중에 누가 있는지도 몰랐다.


또한, 암살자이기에 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암살자의 의뢰인이 움직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잡았다.”

“……뭣?”


리리나리아가 케이블 타이를 조여 죠제의 작은 손을 구속했다.

자신의 손목과 죠제의 손목을 붙잡아 빠져나갈 수 없는 환경을 만들어버린다.


“어떻게……?”


어떻게 리리나리아 루루타가 여기에?

아니, 어떻게 자신을 알아보고 붙잡은 거지?


죠제의 머리에 두 개의 의문이 스쳤다. 당연한 의문이다.

조금 전 까지만 해도 이들의 머릿속에 죠제 루페라는 이름은 없었다.


“제일이 단체 메시지를 돌렸어. 브라질계 여자애는 적이니까 붙잡으라고.”

“무슨……!! 암살자가 자존심도 없는 거냐! 의뢰인에게 마무리를 맡기다니!”


시간을 멈추고 커터 나이프로 케이블 타이를 끊었다.

리리나리아의 구속에서 빠져나간 후, 그녀의 목덜미에 거머리를 붙여 과다출혈을 유도한다.


그녀의 배후에 있는 두 명은 제법 단련된 육체의 소유자로 보인다.

다소 거칠게 나가더라도 죽지는 않을 것이다.


와이어를 꺼내어 두 명의 목을 동시에 감아버린다음 천정의 보철물에 연결시켜 공중에 고정시킨다.


힘과 체중이 모자라도 한참 모자랐던지라 높이 띄워올릴 수는 없었다.

이래서는 잠깐 발을 묶어두는걸로 그치겠지.


하지만 마침 리리나리아가 소구경 권총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빼앗아 두 명을 향해 겨누고는 두 발씩 먹여준다.


운동에너지를 담은 탄환이 공중에 고정된 채 머물러 있었다.

총을 그대로 던져두고서 걸음을 재촉했다.


이걸로 또 나이를 빼앗기고 말겠지만 부아가 치밀어서 견딜 수 없었다.

요즘 젊은 암살자들은 대체 정신머리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


기껏 암살회사라는 걸 만들어놓고, 투자를 받기 위해 벌레 사냥꾼이라는 일까지 겸하게 되었으며 암살자들을 위한 세상을 만들어놨건만 공들여 세운 성을 이따위로 무너트리는 중이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암살자가 의뢰인에게 일을 맡기다니.

암살자란 의뢰인을 대신해 사람을 죽이는 도구다.


이 기본 알고리즘을 파괴하면 라이크에덴의 암살자들은 장사를 접어야 할 판이다.

의뢰인을 대신해 손을 더럽히는 대신, 모든 죄와 죄책감을 의뢰인에게 떠넘긴다.


따라서 암살자들은 돈을 받지 않으면 누군가를 죽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암살자들은 의뢰인의 요망을 최선을 다해 이루어준다.


이 개념을 이룩해내기 위해 죠제를 포함한 숱한 암살자들이 자신의 인생을 바쳐왔다.

그것을, 백제일은 무너트린 것이다.


모든 암살자들의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부정해버린 것이다.

이는 암살회사 그레이트풀 데드의 임원이자, 설립 멤버로서 용납할 수 없다.


그는, 암살자들의 관리인을 거스르고 말았다.


“이 망할 꼬마가…… 거기 못 서냐!”

“되는 일이 없구만…….”


그 사이 전격에서 몸을 회복한 제일이 벽을 짚어가며 기어오듯이 다가온다.

자신의 인생을 부정한 풋내기 암살자가, 쓰잘데없는 분노를 품은 채 다가온다.


“잠깐, 제일! 뭔가 이상해! 기다려!”


아직 전격으로 인해 마비된 상태인 시엘이 파트너를 다급히 불러세운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죠제 루페는…….

화가 나고 말았다.


“……내가 회사로부터 받은 건 발을 묶어두라는 의뢰였지만.”


천천히 호흡을 멈춘 그녀가, 맘속으로 숫자를 센다.


‘절대로 죽이지 말라는 말 까지는 듣지 않았지.’


죠제가 시간을 멈췄다.

천천히, 한 걸음씩 다가가 제일의 가슴에 대형 거머리를 꽂아 넣는다.


물론 이것만으로 죽음에 이르지는 않는다.

진정 고통 속에서 죽는 것은 이제부터다.


“죽어.”


지금까지는 손으로 뽑아낼 수 있도록 거머리를 설치했다.

그렇게 위험하지 않은 혈관에 한해서.


이번에는 경우가 다르다. 이 건방진 놈에게는 제재를 가해야만 한다.


죠제의 작은 손바닥이 가슴에 박힌 거머리를 있는 힘껏 밀었다.

가슴에 뚫린 구멍이, 결코 막히는 일이 없도록.


<앨리스 인 체인스>는 신체능력을 조작하는 기술.

상처를 막을 수는 있더라도, 체내에 삽입된 이물질을 배출해낼 수는 없다.


이윽고 멈추었던 시간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심장에 직통으로 연결된 제일의 혈관에서 피가 뿜어져나왔다.






작가 한마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