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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즈 나이트 라이크에덴] Track 12. 관리인(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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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 12. 관리인(13)

  • WHITE


“이 녀석들보다 선수를 쳐서 세르지오의 모가지를 따려면 나 혼자서는 무리야. 너희들의 도움이 필요해.”


다섯 갱단의 전직 보스와 그에 준하는 전투력을 가진 광신도.

지금의 제일에게는 더없이 중요한 전력이다.


“질문이 있습니다.”


자키야가 손을 들어올렸다.


“그 6위부터 8위까지의 암살자가 대단한 사람들이라는 건 알겠습니다. 당신이…… 아니, 리리나리아 아가씨와 당신이 그 사람들보다 앞서서 세르지오를 죽여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도 이해했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초점이 어긋난 시선으로 제일의 방향을 향했다.


“시간, 부족하지 않습니까?”


세 사람은 지금 즉시 출발한 상태다. 당장 출발해서 그들을 막아도 시원찮을 판인데 한가롭게 회의나 하고 있다.


이런 상황 자체를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실은 무지 여유로운 거 아닌가 하는 착각이 일 정도다.


“……녀석들의 암살 예정 시각은 오늘 새벽. 몇 시간 정도의 유예는 있어.”

“고작 몇 시간 정도로 작전을 짜고 출발해도 괜찮은 겁니까?”


당연히 괜찮지 않다. 허나, 아무런 대비책도 갖추지 못한 채 그들을 상대로 뛰어드는 것보다는 낫다.


“그치만 녀석들 중에는 <블러디 발렌타인>의 능력자가 있어.”


무조건 목표물을 죽일 수 있는 필살의 <특권>이지만 4시간이라는 어마어마한 준비시간이 필요하다.


“무조건 센 놈들을 배치해서 목표를 없애버린다…… 우리 사장이 떠올릴 법한 생각인데, 셋을 보낸 이상 셋 모두가 활약하려고 들겠지.”


암살자를 여럿 파견하는 이유는 상대를 확실히 살해하기 위해서.


회사의 방침상 팀으로 파견된 이들은 자신들의 능력을 적재적소에 활용해가면서 타겟을 암살한다.


조합을 잘못 짜면 한없는 비효율이 되어버린다.

바로 지금처럼.


“<블러디 발렌타인>은 상당한 강자야. 하지만 셋 중에서 가장 확실한 약점을 가지고 있지. 이 놈이 있는 한, 저 무적의 암살팀은 4시간동안 세르지오를 죽일 수 없어.”


다른 둘은 준비시간을 들이지 않는다.


타겟에게로 접근해 바로 죽일 수도 있다. <블러디 발렌타인>처럼 확실한 죽음을 보장하지는 않지만 사정거리내로 다가갈 수만 있다면 세르지오라 해도 죽이는 게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다른 둘이서도 죽일 수 있는데 굳이 4시간을 기다리겠습니까?”

“기다려. 그게 이 회사의 룰이거든.”


보수의 균등한 배분을 위해서라도 팀으로 나서는 암살자들은 반드시 협력을 해야만 한다.


“이 과정 속에서 꼭 능력을 쓸 필요는 없지만…… <블러디 발렌타인>의 사용자는 자기 능력에 자부심이 엄청난 놈이거든. 다른 둘은 그 놈 때문에라도 4시간을 기다려야만 할거야.”


상상이 간다. 아마 경호로 배치된 <특권> 사용자를 <오버킬>이 1:1 결투로 살해하고, 세르지오를 백업하려드는 관계자들을 <블러디 발렌타인>이 일제히 침묵시킨다.


마지막 마무리를 지근거리까지 접근한 <라크리모사>가 해낸다.


“그럼 이 4시간동안 녀석들을 어떻게 상대할 것인가…… 이게 관건인데.”


이쪽의 전투요원은 셋. 제일 자신과 자키야, 레온이다.


“댁은 분명…… 초 재생능력을 가지고 있댔지?”

“아앙? 말투가 왜 이렇게 싸가지 없어!”

“오케이, 그럼 <오버킬>은 맡길게.”


오버킬의 전투는 맨손으로 이루어진다. 같은 도수공권이라면 레온 이상의 적임자가 없을 것이다. 설령 전투능력이 딸려 몇 차례고 당한다 하더라도, 녀석의 회복력이 있다면 놈을 계속해서 잡아둘 수 있다.


“그리고 <블러디 발렌타인>은…… 네가 잡아라.”

“상성상으로 유리한 게 있습니까?”


자키야가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물론 그딴 건 없다.

다만 <라크리모사>를 상대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판단했기에 배치한 것이다.


“<라크리모사>는 자기 능력의 패널티로 존재감을 잃어버렸어. 감지능력이 떨어지는 놈은 상대하기 어려워.”


제일은 스스로에게 열쇠를 찔러 넣어서 감각능력을 강화시킬 수 있는지라 그녀를 탐색할 수 있지만, 자키야의 경우는 전적으로 오감에 의지해야만 한다.


상대조차 안 될 터이니 배치는 이렇게 하는 것이 맞다.


계산을 마친 그는 화이트보드에 간단한 동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우스꽝스럽게 데포르메된 3인의 얼굴을 그려놓고는, 각각 상대할 이들의 이름을 적는다.


“이렇게 3:3 싸움을 하는 도중에…… 남는 사람이 세르지오를 친다.”


제일을 제외한 전원의 얼굴에 “누가?” 라는 의문이 떠오른다.


“누구긴 누구겠어, 바로 너지.”


그 손가락 끝은 리리나리아를 향해 닿아있었다.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제일! 이건 네 의뢰잖아! 어떤 암살자가 자기 타겟을 의뢰인에게 떠넘겨!”


시엘이 쿵쾅거리는 걸음으로 달려오며 제일의 멱살을 부여 쥐었다.

보기 드물게 확고한 분노의 시선을 담아 제일을 쏘아본다.


“너…… 무슨 꿍꿍이야.”

“꿍꿍이라니, 그딴 게 있을 리가.”

“헛소리 하지마! 네가 그러고도 암살자야?”


한 사람에게 한 가지만 허용된 <특권>을, 둘이나 가지고 있는 놈이다.


<도어즈>를 사용해서 상대의 자아를 바꿔버릴 수 있는데다가, <체리파이>를 써서 원하는 대상들을 둘로 합쳐버릴 수도 있다.


그 모든 것들이 없다 하더라도 세르지오는 기생형 마물로서 평범한 인간보다 월등히 뛰어난 신체능력을 발휘해낼 수 있다.


“암살은커녕 전투의 기본조차 모르는 보통 사람이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아뇨, 제가 할게요.”


결연한 얼굴의 리리나리아가 다가와 멱살 쥔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갠다.


“처음부터 제일에게 한 의뢰는 그거였어요. 내가 세르지오를 죽일 수 있게 도와달라는 거. 그게 약간 어려워진 것 뿐이에요.”


“리리나리아…….”


“제가 할거예요. 세르지오 루루타는…… 세르지오 루루타의 안에 들어간 기생형 마물은 제가 없애버리겠어요.”


“치잇…….”


시엘이 불쾌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위험도가 너무 높다.

다른 암살자들을 막아봤자 세르지오의 경호원까지 치울 수 있는 건 아니다.


“회사를 적으로 돌릴지도 모르는 일이야. 지령에 반하는 일이라고.”

“어차피 세르지오를 죽이기 위해 입사한 회사인걸요.”


말려봤자 듣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처음부터 놈을 죽이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

한 번은 거의 성공할 뻔 하기도 했고, 보기 좋게 실패로 돌아갔었다.


막을 것인가, 보내줄 것인가.

시엘의 안에서 갈등의 불길이 피어올랐다.


“……나도 간다.”

“엉? 야, 잠깐…….”


이번에는 제일이 시엘을 말리려 든다.

아까와는 구도가 정반대가 된 셈이다.


“시끄러워, 제일. 이 애를 혼자 보낼 순 없다고. 내 <이방인의 노래>를 쓰면…….”

“그치만 세르지오는……!!”


네 자식일지도 모른다고.

제일은 거기까지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그녀가 기생형 마물이라는 것을 아는 것은 자신뿐이어야 하니까.


“그러니까 내가 세르지오랑 만나는 일 없도록, 네가 제대로 하란 말이야. 알겠어?”

“……둘이 연애해요?”


묘하게 풍기는 고혹적이고 요염한 분위기에 리리나리아가 툭 던지듯이 딴죽을 걸었다.

확실히, 두 사람 사이에는 자신이 모르는 공기가 감돌고 있긴 하다.


어쩐 일인지 진지하게 물어보면 둘 다 정색을 하며 부정하고는 하지만.


“자 그럼 해산. 무기 같은 게 필요하면 내 이름 대고서 장비 신청하고, 출발할 때까지 준비들 하고 있어.”


일행이 느릿느릿 움직이기 시작한다. 리리나리아가 자키야, 레온을 이끌고 서류를 작성하기 위해 이동했고 제일이 지쳤다는 듯이 그 자리에 앉아 휴대전화의 전원을 켠다.


“뭐야, 암살 밑준비가 아직 남았어?”

“아니, 게임하는데.”


화면을 보니 과연, 온갖 미소녀의 일러스트가 파렴치한 자세를 취하며 살색을 자랑하고 있었다.


한 방 먹여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쓸데없는 흉계를 꾸미는 건 아니겠지, 제일.”

“설마. 난 그렇게 착실한 인간이 아닌데. 시킨대로 움직일 뿐이지.”


히죽 웃으며 게임의 화면을 조작해나간다.


온라인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하고, 때로는 도움을 주기도 하면서 20분가량을 게임에 몰입한다.


“망할, 물속성이 부족하잖아!”

“뭐 하자는건지, 정말…….”


의자에 앉은 채 게임 화면만 들여다보는 제일의 목덜미에 음료수 캔을 디민다.

난데없는 싸늘함에 제일이 가볍게 몸서리를 친다.


죽이려는 기세로 노려보니 시엘이 히죽히죽 웃고 있다.


“뭐 하는 짓이야…….”

“암살자가 그렇게 뒤를 쉽게 내줘도 되는건가? 응?”


제일이 그녀가 건네준 캔콜라의 탭을 연다.

탄산이 가볍게 빠져나가면서 청량감 넘치는 소리가 들린다.


그것을 벌컥벌컥 마시고는 힘을 넣어 휙 던졌다.


겨냥하지도 않고, 힘을 가늠하지도 않은 채 아무렇게나 던졌는데도 그것은 보기 좋게 쓰레기통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끄윽.”

“더럽게.”


시엘이 스커트를 정리하며 제일의 옆에 앉는다.


이미 내근 직원들의 퇴근 시간은 한참 넘어섰다.


별 일이 없는 한, 사내에 남아있는 것은 당직 근무자들 몇 사람과 한가한 암살자들 정도다.


“샤를을 1:1로 이겨야 하는데, 괜찮겠어?”

“괜찮을 리 있겠냐? ……그래도 그나마 세 명 중에서는 나랑 제일 잘 맞으니까 내가 맡는거지.”


그는 시엘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게임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게임 동료인지 뭔지와 쉴새없이 채팅을 주고받으면서 다음엔 어떻게 공격하네 하는 소리나 해대는 중이다.


회사에 소속된 암살자들에게 동료의식 같은 것은 없었다. 의뢰가 겹치면 라이벌이고, 일하던 중에 사원을 적으로 만나면 죽이기도 한다.


전투를 피하는 경우가 있다면 의뢰 여건상 그래야만 할 때, 자신의 능력으로는 상대하기 어려울 때 정도다.


이번 일은 후자다. 제일의 전투능력은 <라크리모사>의 사용자인 샤를 클로네에 비해 뒤떨어진다.


“만약 네가 <라크리모사>를 막는데 실패한다면……. 녀석이 리리나리아를 제쳐두고 세르지오를 죽이려 들겠지?”


“그렇겠지. 겸사겸사 방해되는 리리나리아랑 너도 죽일테고.”

“아, 정말! 뭐 이딴 플랜을 짜놓은거야!”


냉정을 잃은 시엘이 자기 머리를 가볍게 쥐어뜯으려 든다.


오랫동안 함께 지내온 녀석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도 거의 없는 일이기에, 제일의 마음 속에 걸어 잠갔던 비밀주의 빗장이 사르르 풀리려 들었다.


“자.”

“뭐야, 이 손바닥은?”

“콜라 한 캔 더 사주면 전략을 알려줄게.”


시엘이 못 말리겠다는 듯이 새 콜라를 뽑아 제일의 손바닥 위에 올렸다. 늘 그랬던 것처럼 캔을 따고 벌컥벅컥 마신 후 쓰레기통 속에 던져넣는다.


그런 태평한 태도 하나하나가 시엘의 신경을 건드렸다는 것은 구태여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야, 작작 좀…….”

“……냄새가 안 나.”


제일이 휴대전화를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아까, 벌레 브라더스가 나한테 오줌을 먹이려 들었어. <앨리스 인 체인스>의 패널티로 맛을 못 느끼는 내게는 딱 맞는 함정이지. 그치만 보통 그런 거에 걸리진 않잖아? 아무리 미각이 없어도.”


그러나 제일은 보기좋게 마셔버렸다.


이 콜라, 조금 미지근하군.

탄산이 빠진 것도 같은데?


이 정도의 인상만을 품고서 타인의 소변을 마셨다.


“다가오지마, 더러운 놈.”

“……둘만 있다고 신비주의고 뭐고 내팽개쳤구만.”


그 직후 진상을 알게되어 모조리 토해내기는 했으나 자신이 후각을 완전히 상실했음을 깨달았다.


“아무래도 내 능력이 강화된 것 같다…… 이 얘기지.”


패널티의 지불이 강해지는 것과 함께 <특권>의 능력이 강화되는 건 드문 일이 아니다.

이 타이밍에 무기 하나를 손에 넣었으니 암살자로서는 기뻐함이 옳다.


그러나 한 번 패널티로 지불해버린 것은 돌려받을 수 없다.


이건 인간과 이 세계간의 거래로, 백제일이라는 인간은 앞으로도 영원토록 후각과 미각이 마비된 인간으로 살아가야만 한다.


그런 부담감을 애써 잊기 위해, 제일은 능청을 떨며 노래하듯 중얼거렸다.


“이만하면 <라크리모사>를 상대로도 부족함이 없을…… 앗 따거!”


자기도 모르게 느껴진 따끔한 통증에, 제일이 말을 멈추고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짚었다.

모기라도 있는 걸까 싶어 찡그린 얼굴로 짚었던 손바닥을 들여다보니.


갓 흘러나오기 시작한 피가 끈적이고 있었다.


“……!!”


재빠르게 나이프를 꺼내어 자세를 잡는다. 사슬을 구현화시켜 나이프와 고정시키고는 시엘을 보호하듯이 양 팔을 펼친다.


“뭐야, 제일? 왜 그래?”

“……조심해, 누가 있어.”


인기척이라고는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침입하는 그림자도 보지 못했고 시엘 외 다른 인물은 아무도 없다.


거기에 남아있는 것은 그저 백제일이 공격당했다는 결과 뿐이다.

마치 과정을 통째로 잘라낸 것만 같은 방식으로 공격당했다.


“젠장…….”

“상처는 그렇게 크지 않아. 막말로 반창고 하나 붙이면 끝나는 수준이야. 하지만…….”


하지만 상처의 모양이 말해준다.

이것은 명백한 공격이라는 것을.


제일의 상처를 손본 시엘이 백색 눈동자를 번뜩이며 주위에 대한 경계를 강화해나간다.

살상력으로 치면 그녀가 가진 능력이 제일보다 몇 배는 우수하다.


“<앨리스 인 체인스>, 뭔가가 걸리는 대로 바로 물어버려.”


사슬을 소용돌이모양으로 펼쳐 지면을 자신의 영역으로 삼았다. <특권>으로 창조해낸 사슬이 미묘한 공기의 움직임까지 감지해 포착된 적을 바로 처치할 수 있도록.


“……시엘.”

“지금은 적에게 집중해.”


여느 때와 같은 냉정한 가면을 뒤집어쓴 시엘이 차가운 목소리로 제일을 나무랐다. 그녀의 판단은 합리적이었고, 평소라면 제일도 군말없이 그녀의 지령에 따랐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평소였다면.


“너…… 대체 언제 당한거야……?”

“뭐?”


제일의 말에 시엘이 뒤늦게 자신의 몸에 일어난 이변을 알아차렸다. 와이어 등으로 목을 감기라도 한 듯, 목에 긴 선이 남아 있었다.


“……큭!”


원형의 상처에서 피가 주르륵 흐른다. 나무를 베어내고 수액을 채취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시엘의 목에서 출혈이 일어나고 있다.


“<라크리모사>인가! 세르지오를 습격해야 할 녀석이 왜 여기에 있는 거야?”


당연하다면 당연할 수 있는 의문을 입에 담았다. 능력이라기보다는 패널티로 인해 발생한 이 특성은, 상대가 눈앞에 있더라도 인지할 수 없게 된다.


“그럴 리 없어…… 그 녀석의 패널티는 존재감의 상실. 거기에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 뿐이야. 샤를이 상대라면 내 사슬이 못 알아차릴 리 없어.”


그 사이 또 피가 뿜어져 나온다. 피부에 공격이 닿는 순간 피하기 위해 바짝 긴장하고 있었는데도 대처조차 못했다.


“제기랄!”


도움도 안되는 사슬의 경계선을 모두 회수해버리고 팔을 크게 휘둘렀다.

사슬에 달린 나이프가 사납게 요동치며 실내의 모든 기물에 파괴의 손길을 선사한다.


휴지통에서부터 시작해 자판기, 화이트보드, 의자와 책상 등.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제일의 나이프에 의해 착실하게 파괴되어 가고 있었다.


“그만, 제일! 체력을 낭비하지마!”

“그럼 어쩌라고! 이대로 영문도 모르고 죽을 순 없잖아!”


모습이 보이지 않는 적을 상대해본게 처음은 아니다. 가깝게는 지난번 창공회의 암살자였던 량 창셴이 있었다.


허나 이번의 적은 그와는 궤를 달리하는 상대다. 공격을 당하는 순간조차 감지해낼 수가 없다. 정신 차리고 보면 이미 당한 뒤라는 식이다.


“없어…….”


마구잡이로 공격을 뿌리고 나서야 간신히 알아차렸다.


“투명화 능력 같은 게 아니야. 존재감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등을 맞대고 있는 시엘을 제외한 모든 기물을 향해 전방위 공격을 가했다. 여기에 누군가가 들어온다면 나이프에 피가 묻어나야만 한다.


베어냈다는 감각조차 없었단 말이다.


“그런데…… 당했다 이거지.”


시엘이 식은땀을 한 방울 흘리며 물었다. 제일의 가슴에 비스듬한 칼자국이 나 있었다.

이번에도 깊지는 않은 상처에서 피가 흐른다.


“대수롭지는 않지만…… 언제 당했는지도 모르겠다는 게 무섭지.”


미지라는 의미로 놓고 보자면 레디나 휀과도 비슷한 이미지다.


“<라크리모사>는 확실히 아니지?”

“아니야. 그 녀석이라면 이런 찌질한 상처를 남기는 대신 키스로 공격하지.”


완벽하게 죽일 수 있는 방법을 놔두고 상처만으로 끝내는 바보가 있을 리 있겠냐.

이건 전혀 다른 미지의 상대가 있다고 봐야 한다.


제일은 사슬을 짧게 거둔다음 두 자루의 나이프를 양손으로 각자 쥐었다.


한 자루는 역수로 쥐어 충분히 힘을 실을 수 있도록 만들었고 한 자루는 정수로 쥐어 대응력을 갖출 수 있도록 했다.


“그래도…… 정보는 얻었어. 슬슬…… 반격의 타이밍이지.”


제일이 가슴의 상처를 슥 문지르며 쓰라린 통각을 즐겼다.


“내가 공격할까?”

“아니, 기다려. 너는 놈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처치하는 역을 맡아줘.”


시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스펙상으로는 시엘이 한참 우위에 있지만 현장경험은 제일을 따라갈 수 없다. 전투에 있어서는 그의 지시를 따르는 쪽이 낫다.


“<앨리스 인 체인스>, 출혈을 멈춰라.”


이걸로 피는 멎었지만…… 아직 정보가 모자라서 무턱대고 움직일 상황은 아니다.


“원거리에서 공격하는 건 아닐까?”


제일이 적의 능력을 파악해내기 위해 시엘에게 물었다.


“옛날 일본인들은 대기 중에 진공이 발생하여 그 기압차이로 피부를 베는 일을 요괴의 소행이라고 믿었대. 알아? 카마이타치라고.”


“무슨 헛소리야. 기압 차이로 피부가 왜 찢겨, 물리학이라는 거 알아? 배워두면 편하니까 공부 좀 해.”


“……아니, 일본만화에서 나왔던 얘긴데. 그보다 물리법칙을 무시하니까 <특권>이라고 불리는거잖아! 너야말로 공부 좀 해라!”


꼭 진공으로 공격했다고 치부해버릴 수만은 없고, 그런 것을 <특권> 등으로 재현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인위적으로 아주 날카로운 바람을 생성하여 피부를 베어낸다거나. 물리법칙을 무시하는 일 정도는 일으킬 수 있지만…….


“적은 우리를 정확히 겨냥해서 부상을 입히고 있으니 그건 아니겠지.”


원거리에서 적을 공격하기 위해선 적의 위치를 포착해야 한다. 어떤 저격수라 해도 보이지도 않는 적을 쏴맞출 수는 없다.


“……보라고, 시엘. 창문조차 없다고.”


두 사람이 머물러 있는 곳은 회사 지하에 위치한 휴게실을 겸한 회의실. 외부에서 들여다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관제실 등을 점령당했고, 감시카메라로 우리 위치를 보고 있다면 어때?”

“……그건 생각 못했네.”


사슬을 던져 내부에 설치된 감시카메라를 부쉈다.

시엘의 추론이 사실이라면 여기서 공격이 멈춰야 하는데…….


“큭……!!”


시엘이 다리를 휘청이며 어깨를 감싸 쥔다.


“뭣…… ‘거머리’라고?!”


이는 암살회사에서 사용하는 표준장비로, 주사바늘의 형태를 띤 금속제의 무기다.


혈관을 노려 특정 각도로 꽂아 넣어 과다 출혈을 유도하는데 다루기가 까다로운데다가 <앨리스 인 체인스>로 커버할 수 있어 제일은 잘 쓰지 않는 물건이다.


“적도 암살자인가…….”


힘껏 당겨 거머리를 뽑아냈다. 시엘의 하얀 피부와 셔츠가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출혈은 내 스스로 멈출 수 있어, 걱정하지 마.”


평소보다 더욱 창백한 얼굴로 보이는 것은 기분 탓일까.

제일이 이를 빠득 갈며 거머리를 움켜쥐었다.


“하지만 상대도 바보군.”


그 분노를 가라앉히려는 것처럼, 시엘이 움켜쥔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갠다.


“이걸로 확실해졌어. 원거리 공격은 아니야. ……맞지?”

“어어…… 그렇지.”


거머리같은 도구는 철저한 근접전용 도구다.

상대와 바짝 다가가지 않으면 쓸 수 없다.


암살자 중에는 이걸 탄환처럼 쏘아 맞춘다는 발상을 품었던 이도 있었으나 생각으로 그쳤다. 탄환과는 달리 공기의 저항을 거스르기 어려우며, 정확하게 각도를 조절해 맞추는 것도 불가능에 가깝다.


<특권>으로 조작해서 맞춘다면 가능하겠지만 굳이 그런 비효율적인 방법을 취할 암살자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진정해, 오빠.”

“……오빠라고 부르지 말라고.”


시엘의 말에 제일이 냉정을 찾았다. 그녀의 흰색 눈동자에 입을 굳게 다문 자신이 비치고 있다.


“할 수 없구만…….”


손바닥으로 눈을 덮어 냉정함을 되찾는다. 스승이 알려줬던, 시야를 차단하여 평정심을 되찾는 방법이다.


그 상태 그대로 손바닥을 쓸어올려 이마를 가린 앞머리를 뒤로 넘긴다.

피를 왁스삼아 올백머리를 만든 후, 결의를 담기 위해 각오를 입으로 내뱉는다.


“진지하게 상대할 수밖에 없잖아.”


진지하게 상대할 수밖에 없다.

기껏 폼을 잡은 그의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


“……얼레?”


제일의 왼쪽 가슴에 붙은 세 마리의 거머리가 피를 뽑아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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