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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즈 나이트 라이크에덴] Track 01. 암살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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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 01. 암살자 (1)

  • WHITE



그 무렵 그녀는 죽어가고 있었다.

태양빛으로 달군 사막의 모래는 떨어진 땀방울을 삽시간에 증발시켰다.


“오빠…….”


남아있는 힘을 쥐어짜내, 이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 이를 조용히 불러본다.


공기마저 죽어버린 것 같은 사막의 한복판에서, 그녀는 조용히 자신의 생명이 사라져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형편없는 인생이었다.


부모에게는 버림받고, 유일한 혈육인 오빠는 행방불명이 되어버리고.


일자리를 알선해주겠다는 업자에게 속아 소지품을 모조리 빼앗긴 채 여기까지 내몰리고 말았다.


그 과정 속에서 신체의 일부를 잃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리라.

트럭에서 과감히 뛰어내리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


뛰어내려서 결과가 크게 달라졌는가 하면 그것도 아닌 것 같지만.


사막하면 으레 떠오르는 선인장이나 오아시스라고는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 작열지옥의 한복판이었다.

태양의 빛과 열기를 온 몸으로 느끼며 살이 타들어가는 감각을 맛본다.


여기서는 이제 살아서 나갈 수 없다.

이대로 비쩍 마른 시체가 되겠지.


폐와 기도가 불타버릴 것만 같았다.

숨을 쉬는 게 아니라 화염을 마시는 것 같았다.


생명의 끈을 놓치지 않게 손을 꽉 움켜쥐어도, 뜨겁게 달궈진 모래만 잡힐 뿐이었다.


차라리 빨리 숨이 끊어진다면 이렇게까지 괴롭지는 않을 텐데.

얼른 죽어버리면 편해질 수 있을 텐데.


얼른 죽고 싶다.

아니, 죽고 싶지 않다.


“싫…… 어…….”


보고 싶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알고 싶고 고생은 하고 있지 않은지, 혹 자기처럼 나쁜 사람들에게 속은 게 아닌지도 알고 싶다.


“오…… 빠…….”


죽어가는 그녀의 위를, 한 사내의 그림자가 덮는다.

자기 위에 드리워진 그늘 아닌 그늘을 인식하며, 그녀는 가까스로 고개를 들었다.


“오빠……?”


아니다. 처음 보는 이방인이다.

낯선 사내가 그녀를 차가운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살…… 려, 주…… 세요.”


이방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방인이라 우리말을 모르는 걸까? 아니, 이런 상황인데 사태를 모를 리가 없다.


일으켜 세워주지도 않고, 물을 주는 것도 아니거니와, 편히 세상을 떠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도 없이.

그저 내려다보고만 있다.


왜지? 왜 그냥 보고만 있는 거지?

죽일 맘도 살려줄 맘도 없으면서 보고만 있는 거야?


이게 그 저승사자인가 하는 그건가? 사람인줄 알았는데 환각일 뿐인가?

아니면 죽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숨이 끊어지는 대로 몸을 해체해서 내장을 팔아치우려는 악덕업자인가?


온갖 생각이 그녀의 머리에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이제 한계에 달한 것이다.

의식이 완전히 끊어진 그녀의 고개가, 풀썩 쓰러진다.


그제야 비로소, 이방인 사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생명을 앗아가던 얄미운 햇님.

그것을 등에 진 이방인은.

어처구니없게도, 태양을 꼭 닮은 것 같은 사내였다.


사막 한복판에서 죽어가던 여성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방인의 만남.


누구도 알지 못한, 세계의 변두리에서 일어난 이 조우는.


향후, 세계를 크게 뒤흔들어버리는 만남으로 자리 잡게 된다.






1주일 후.


천국과 가장 가까운 도시, ‘라이크에덴’의 중앙거리.


제법 더운 날인데도 불구하고, 리리나리아는 긴 옷을 입고 있었다.


카디건은 얇았지만 살이 비쳐 보일 정도는 아니었고, 바지는 통이 넓은 긴 바지였다.

단단해 보이는 검은 색의 부츠가 맨질맨질한 표면을 한껏 자랑하며 빛을 반사하고 있다.


리리나리아는 선글라스를 슬쩍 들어 올려 눈앞의 건물과 스마트폰에 떠오른 화면을 대조해보았다.

지도상으로는 이 건물이 확실했다.


“조심해, 멍청아! 죽고 싶냐?”


굵고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사람의 머리 대신 코뿔소의 머리를 달고 있는 남자가 그녀를 치고 지나간 것이다.


둔중한 머리에 어울리는 우락부락한 몸집을 하고서, 자기보다 작은 체구에게.

꼴을 보아하니 마찰을 빚기 위해 일부러 그런 것이 틀림없다. 강한 척 허세를 부리는 양아치겠지.


괜한 말썽을 만들고 싶지 않은 마음에, 리리나리아는 상대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코뿔소 머리의 남자는 리리나리아의 저자세에 그럭저럭 만족했는지 침을 퉤 뱉으며 그녀에게서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넓은 걸음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지나가던 행인 하나하나에게 일일이 시비를 걸어댄다.


“뭘 봐? 확 그냥……!”


양아치 자식.

자기가 먼저 쳐놓고서는 시비네.


그녀는 굳이 머릿속에 떠오른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어차피 저런 놈은 금방 죽어.”


누군가가 리리나리아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린다. 돌아보니 은발의 청년 하나가 싱긋 웃고 있었다.


“언니, 라이크에덴은 처음이야? 관광 온 거라면 안내라도 해줄까?”


“필요 없어.”


리리나리아는 남자의 손을 살쌀 맞게 치워냈다.

아닌 게 아니라 관광 안내따위는 정말로 필요가 없었다.

도시의 외곽이기는 해도 일단은 여기서 살고 있고.


“아니아니, 유쾌해보이지만 정말 위험한 도시라서 말야. 당장 봐. 저 멍청이만 해도…….”


은발의 청년이 가리킨 것은 좀 전의 코뿔소 사내.

그는 여전히 커다란 덩치와 기괴한 머리만을 믿고서 행인들에게 민폐를 끼치고 있었다.


“얼마 전에 막 건너온 마물일거야. 마물 알아? 처음 봤지? 다른 동네 사람이면 처음 봤을 텐데.”


“그렇지도 않아.”


리리나리아는 짧게 대답하고서 코뿔소 사내에게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자기보다 작고 약해보이는 사람에게 가서 시비를 걸고서는, 조금만 마음에 안 들면 있는 대로 성질을 부린다.


전형적인 뒷골목 불량배답다.

너무나도 진부해서 웃음조차 나오지 않는다.


“어엉? 너, 지금 나 무시하는 거냐? 이 몸이 누구인지 알기나 해?”


시비의 대상이 된 것은 비쩍 마른 미라 같은 남자였다.

압도적으로 커다란 덩치의 코뿔소 사내를 앞에 두고서 바들바들 떨고 있다.


“아뇨아뇨, 그게 아니라……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아아…….”


마른 남자가 계속해서 고개를 숙여댔고, 코뿔소 사내는 그런 남자의 머리를 힘으로 짓눌렀다.


“너 같이 약해빠진 놈이 함부로 걸어다닐 거리가 아니라고! 알아듣겠냐? 약한 놈은 순식간에 죽는단 말이지!”


“죄송합니다, 용서해주세요…….”


이쯤에서 말려야 하는 것 아닌가 싶어 리리나리아가 튀어나가려던 차에, 은발의 남자가 그녀의 손목을 덥썩 붙잡았다.


“뭐야?”


“놔둬. 이제부터 재밌어질 테니까.”


“재밌어진다고?”


코뿔소 사내는 봉이라도 한 마리 잡았다는 듯, 히죽 웃으며 비쩍 마른 남자의 어깨 위에 두꺼운 팔을 턱 걸쳐댔다.


“그렇지, 험한 거리에서 살아가려면 든든한 경호원이 필요할 거야. 그치?”


“네에. 그러네요. 그렇지요…… 강한 사람이 보호해준다면 좋겠지요, 하하…….”


“그래서 이 몸이 저렴한 요금으로 지켜주겠다 이거야. 어때, 싼 값으로 든든한 경호원을 고용하는 거지. 흠씬 얻어맞는 것보단 낫잖아?”


코뿔소 사내가 위협이라도 하듯, 상대의 멱살을 잡고서 번쩍 들어올렸다.


아무리 마른 사람이라도 수십 킬로그램은 나갈 터인데, 솜털이라도 들어올리듯 한 손만으로 가볍게 든다.


“우와아아, 내려주세요! 저…… 고소공포증이라…….”


“어때,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해서라도 경호원이 필요할 것 같지 않아?”


“아뇨…… 그…… 괜찮은데. 저어, 혹시…… 당신은. 제게서 삥을 뜯으려 드는 건가요?”


코뿔소 사내는 사뭇 불쾌해졌다는 듯 남자를 자기 발아래에 내팽개쳤다.

지면과 충돌한 남자가 이리저리 뒹굴며 비명을 질러댄다.


“자, 괴롭지?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해서 돈을 지불해서라도 자신의 몸을 지켜야 하는 거야. 잘 알겠지?”


“으으으, 그렇군요……. 아파…….”


남자가 비틀비틀 일어서며 품속에 손을 넣었다.

두툼하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가죽지갑을 꺼내어 그 안에 손을 집어넣는다.


제대로 봉을 잡았구나. 하고 코뿔소 사내가 만족스럽다는 듯 씨익 웃었고.


남자는 지갑에서 칼을 뽑았다.


“어?”


잘 쳐줘도 손바닥만 한 세로 길이의 지갑이다.

한데 거기에서, 칼이 뽑혀 나왔다.


나이프도 아니고, 사람의 신장만 한 장검이다.

물리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그 일에, 당사자인 코뿔소 사내도 구경하던 리리나리아도 입이 쩍 벌어졌다.


『캬아아아, 캬아아아!!』


지갑에서 뽑아낸 칼이 짐승 같은 울음소리를 낸다.

도신이 꿈틀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검게 빛나는 칼이, 적을 눈앞에 두고서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남자는 벌벌 떨면서도 그것을 굳게 쥐고는 코뿔소 사내를 응시한다.


“지켜야 해, 내 돈을 지켜야…….”

“잠깐! 내가 잘못……!”


코뿔소 사내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지갑에서 나온 검이 그린 궤적이 그의 몸을 사선으로 두동강 냈고, 그의 뒤에 있던 건물조차 반으로 갈라 우르르 무너트린다.

남자는 뽑아낸 검을 다시 지갑에 집어넣고는, 거리의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소란을 피워 죄송합니다.”


라는 말을 짧게 남기고는, 무너진 건물에서 항의하러 나온 사람들을 피해 후다닥 달아난다.


“걱정할 거 없다고 했지? 저 녀석, 이 거리의 명물이거든. ‘절대로 삥 뜯기지 않는 남자’ 라고 하는데…… 멋모르는 양아치들이 함부로 시비를 걸다가 역으로 당하고는 하지.”


은발의 청년이 키득키득 웃으며 리리나리아와 눈을 마주쳤다.


“어때? 거리의 안내라면 도와줄 수 있어.”

“아니, 나는 당신 뒤에 있는 회사에 볼일이 있는 거라서…….”


은발의 청년이 고개를 한 번 으쓱이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특별할 것 없는 5층짜리 건물이었다.


“진짜로? 진짜로 여기에 볼일이 있어서 왔다고?”


청년은 놀랍다는 듯 식은땀을 한 방울 흘리며 되물었다.


“뭐야, 입사 지망자? 관둬, 여기는 사람이 일할 만한 곳이 아냐. 제대로 된 사람이 들어갈 만한 곳도 아니고. 충고하겠는데, 그만둬. 그러다가 죽어. 진짜로 죽어.”


“아니…… 일을 맡기러 온 건데?”


청년의 표정이 하얗게 물들었다.

말도 안 되는 것을 들었다는 얼굴이다.


“여기가 뭐 하는 곳인지는 알아?”


하지만 리리나리아는 태연한 얼굴이다.


“알지. 암살회사잖아. 돈만 주면 누구든 죽여준다는 곳. 왜, 내가 잘못 왔어?”


잘못 왔다면 이런 반응을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정확히 찾아왔다.


“관둬, 언니. 평범한 사람이 찾을 만한 회사가 아냐. 좀 더 건실한 놈들이라면 내가 소개해줄 수도 있어.”


그런 말에 넘어갈 사람이었다면 여기까지 찾아오지도 않았겠지.


청년도 그 정도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기에 자신의 발언을 정정했다.


암살회사라는 명칭으로 쉽게 짐작할 수 있겠지만, 암살자를 파견해 고객이 원하는 살해대상을 없애주는 일을 하는 곳이다.


그런 곳이니만큼 사원들이 하나같이 나사 빠진 놈들로만 구성되어 있다.

멀쩡한 감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런 곳에 의뢰하지도 않을 것이다.


지독히도 원한이 깊은 놈을 죽이고 싶은 것이거나, 이 여자 또한 어딘가 나사가 빠진 사람이라는 뜻이다.


청년은 고개를 절레절레 휘저었다.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상대는 지금 이 거리를 너무 얕보고 있다.


“아니야…… 여기는 진짜 아니야. 나라면 좀 더 저렴한 업자를 알선해줄 수도 있지만…….”


아니지. 암살회사에 의뢰하려는 사람이 이런 평범한 유혹으로 넘어올 리 없겠지.

어떻게 해야 말릴 수 있을지를 고뇌하던 은발의 청년에게, 리리나리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대꾸했다.


“그래? 그럼 소개해줘.”

“어? 진짜로?”


“응. 그놈을 죽일 수만 있다면 누구든 상관없는데, 싸게 해준다면 나야 좋지. 수수료도 줄 테니까, 소개해줘.”

“그…… 그렇구나! 그러면 이쪽으로 따라와. 확실한 녀석들을 소개해줄게! 틀림없이 마음에 들 거야!”


리리나리아는 슬쩍 고개를 돌려 암살회사의 건물을 돌아보았다.

가능하면 신용도가 제일 높은 업체에 의뢰하려 했지만, 별수 없지.


제대로 비용을 지불할 자신도 없었으니, 너무 미련 갖지 말자.


……라고 생각했던 그녀는, 불과 5분도 안 되어 자신의 판단을 후회하게 된다.





“미안,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마.”


은발의 청년은 히죽히죽 웃으며 들고 있던 주사기를 휙 내던졌다.

근육이완제 계열의 약물이 들어 있었던 모양인지, 몸에 힘이 들어가질 않는다.


뒷골목의 벽면에 기댄 채, 리리나리아는 아랫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뭐야, 깨물어서 제정신 차려보려고? 안 돼. 그런 걸로 깨어날 거였으면 이런 장사는 하지도 않았지.”


청년은 시원시원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리리나리아의 얼굴을 살폈다.

걷어차주고 싶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얼굴은 참 예쁘네. 근데 우리는 그런 쪽 사업은 안 해서 말이야. 잠깐 자고 있으면 금방 끝날 거야.”


실수였다.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로 인해 한순간 마음을 놓고 있었다.

라이크에덴 중앙이 이런 거리라는 것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는데.


“그냥, 마물 손님들에게 질 좋은 식사를 대접해드리기 위해 식재를 납품하는 일을 하거든. 언니 같은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들은 좋은 상품이지.”


움직여, 움직여, 제발 움직이라고.

몇 번이나 머릿속으로 되뇌며 탈출하려 했지만 도통 움직이지를 않는다.


“그러니까, 금방 자고 있으면 식탁에 오를 수 있을 거야. 언니 잘못이라고…… 그러게 왜 모르는 남자를 함부로 따라오고 그래?”


이럴 줄 알았으면 곧바로 암살회사 건물 안으로 들어갈 것을.

설령 죽더라도, 놈을 죽여달라는 의뢰는 하고 죽었어야 했는데.


분하다. 이렇게 끝나기 위해 라이크에덴 중앙거리로 온 것이 아니었는데.

마물들의 한 끼 식사가 되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게 아니었는데.


놈을, 놈을 죽여야 하는데……!


분해서 눈물이 흐른다.

은발의 청년이 전화를 들고서 운반책에게 연락을 취하고 있다.


누가, 누가 좀 구해줘……!


리리나리아는 그렇게 간절한 마음을 담아 기원했고.

그녀의 염원은 기이한 형태로 나타났다.


“그러니까 상품의 이름은…… 잠깐만요. 이 언니 지갑에 신분증이 있었는데…….”


거래 상대와 연락하던 청년이, 이상을 느끼며 눈살을 찌푸렸다.


“응? 리리나리아 루루타……?”


리리나리아의 풀네임을 입 밖에 내뱉은 순간.

청년이 들고 있던 휴대전화가 절반으로 나뉘어 바닥에 툭 떨어졌다.


“뭐야, 이거 왜 이래…….”


만약, 청년에게 거울이 있었다면 자신에게 일어난 이상에 대해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코 아래에, 기이한 실금 같은 것이 나 있다는 것을.


“전화해야…….”


청년은 유언조차 남기지 못했다.

코 아래에 난 실금을 따라, 얼굴이 스르르 미끄러져 내려가 바닥에 철퍽 떨어진 것이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동자가 꿈뻑이다가 경련을 일으키고는 그대로 멈추었다.

이윽고 얼굴의 절반을 잃은 청년의 몸이 스르르 무너진다.


“실례, 약속시간에 되어도 방문해주시지 않았기에 그만 주제넘게 나서고 말았습니다.”


연미복을 차려입은, 세련된 분위기의 노신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흐트러짐을 조금도 보이지 않는 우아한 동작으로 손수건을 하나 꺼내고는, 리리나리아의 얼굴에 튄 피를 조심스럽게 닦아준다.


마치 높은 귀족을 모시는 일류 집사와도 같은 모습이다.


정성들여 기른 콧수염과, 주름하나 잡히지 않은 셔츠.

그 무엇 하나도 흠잡을 만한 곳 없이 신사다운 모습을 자랑했다.


“정말 쓰레기가 많은 거리라니까요. 회사의 방침을 또 어기고 말았습니다. 주제넘게 의뢰와 관계없는 살상을 하고 말았군요.”


노신사는 회수한 손수건을 반듯하게 접어 자신의 재킷 안주머니에 집어넣고는,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리리나리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리리나리아 루루타 님…… 이시지요? 연락은 받았습니다. 암살회사 ‘그레이트풀 데드’에 의뢰를 주셔서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노신사의 미소 너머에는, 한계를 가늠하기 어려운 무시무시한 살의가 깃들어 있었다.


“그러면…… 누구를 죽이고 싶으신지, 사무실에서 천천히 들어보도록 할까요?”




작가 한마디

처음 뵙겠습니다, 신소음이라고 합니다. 가즈나이트라는 걸작의 외전을 맡게 되어 영광입니다. 모쪼록 여러분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작품이 될 수 있게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