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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야 나비야] 1. 매화 꽃 지던 날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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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매화 꽃 지던 날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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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매화 꽃 지던 날 (1)



하늘은 유난히 맑은 쪽빛으로 사방으로 풀려 있었다.

저게 봄을 앞둔 하늘이련가 싶을 정도로 푸른빛이 창창하고 맑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갈퀴손을 세운 바람이 대지를 들쑤시고 장지문을 긁어대더니만 오늘은 바람도 얌전하고 햇빛도 충일했다.


그 충일한 햇빛 속에 벌겋게 맨살을 드러낸 채 낮고 유순한 모양으로 엎디어 있는 앞산이 왠지 불경스러워 보였다. 음부 같은 계곡마다 우거진 나무들로 가림막을 삼고 살아 있는 목숨들을 유혹해야 했거늘 그 산은 전설만 무성할 뿐 정작 나무 한 그루 거방지게 키워내지 못했다.


정중동이라고, 정지해 있는 듯싶던 구름이 어느새 앞산 등허리를 넘고 먼 산 산마루를 넘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희롱하듯 앞서거니 뒤서거니 날아가는 새들도 구름의 높이를 따라잡지 못하고 착지할 곳을 찾아 그때그때 날개에 실은 바람을 털어내며 쪽빛 하늘에 원만한 포물선을 그렸다.


사람이라는 게, 살아 있다는 게 옥봉은 무언지 몰랐다. 살아 있으되 죽어 있는 것과 같고, 사람이되 사람이 아니었다.


죽어 있는 것과 같고, 사람이 아니라면 꿈틀거리는 이 목숨은 무엇이란 말인가. 한 번씩 가슴을 긋고 지나가는 싸한 통증은 무엇이며, 희노애락애오욕, 오욕칠정의 허방에 빠져 허우적대는 이 육신은 또 뭐란 말인가. 부질없네, 부질없네, 세상 것 부질없네 하루에도 수천 번 수만 번 되뇌어보지만 그악스럽게 살아나는 이 서러움은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옥봉은 저도 모르게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숨결에 옥봉의 자주색 비단 옷고름이 희미하게 나붓거렸다.


옥봉은 차라리 저 구름이 부러웠다.

순한 바람에도 저항하지 않고 제 몸 흩트리며 소멸하는 구름의 체념이 부러웠다. 저를 고집하지 않고 건듯 부는 바람에도 저렇듯 자신을 해체할 수 있다니. 그럴 수만 있다면 가슴에 지옥불로 타고 있는 생각들을 쉽게 부려놓을 수 있을 것이다.


글을 익히지 않았더라면, 아니 차라리 마소로 태어났더라면 더 좋았을 뻔했다. 아니, 아니, 아예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 인간의 몸을 받고서도 인간으로 살지 못할 바에야 그저 한 방울 물이거나, 한 결의 바람이거나, 한 톨의 흙먼지거나, 불의 기운으로 우주를 떠돌다 그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져야 했다.


언감생심, 세상 것에 대한 욕심은 없었지만 자신을 지우는 일은 힘들었다. 그저 그림자로, 살아 있는 허깨비로 하루하루를 살아내자고 다독여도 마음속에 묵직하게 들어앉아 있는 생각들은 어떻게 떨쳐버릴 수 없었다.


자신을 지우는 일, 자신 안에 이는 욕망을 털어내는 일, 눈 감고 귀 막고 입 닫으면 되는 줄 알았다. 유령처럼 살아가면 되는 줄 알았다. 그렇게만 하면 자신을 무화시킬 줄 알았다. 헌데 복병은 다른 데 있었다. 언제부턴지 가슴속에 불티들이 날아다니더니 이내 불땀 좋은 불덩이로 살아 너울거렸다. 불덩이들은 사납고도 질겼다. 옥봉은 그 불덩이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으므로 어떻게 다스릴 수도 없었다.


“또 넋을 잃고 있는 게냐?”


곁에서 나리의 물색 도포를 짓고 있던 어머니가 수심 가득한 얼굴로 옥봉을 바라보았다. 둥근 얼굴에 가는 목, 작은 몸피가 애달파 보이는 여자였다.


“요새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는 게냐? 사람이 불러도 도통 듣지를 못하니. 한두 번이야 그런다 치지만 요새는 숫제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는 듯하니 걱정스럽기 짝이 없구나.”


어머니의 말에 옥봉은 애매하게 웃었다. 웃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웃지 않는 것도 아닌. 한순간 툭하고 연꽃 벌어지듯 입가가 열렸지만 이내 닫히고 말았다. 옥봉의 낯빛이 물위에 뜬 백련처럼 희고 윤기가 흘렀다.


“아무래도 너에게 글을 가르치는 게 아니었지 싶다. 여자가 글을 익혀 무얼 한다고. 게다가 언문도 아닌 한시라니. 나리가 원망스럽구나.”


옥봉은 어머니를 향해 다시 웃어주고 싶었지만 마음속의 울증이 깊고 무거워 이번에는 입가 한 번 씰룩이지 못했다.


어머니. 가슴속에 불덩이가 살아요.

어머니는 이 불덩이의 정체를 아나요? 아시면 가르쳐주세요.


하지만 말들은 한마디도 입술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했다.


노란 비단 저고리에 남색 치마를 입은 여자는 어머니였다. 노비문서에 이름을 올려두고 고달픈 삶을 살아가는 목숨. 어머니의 저고리에 달린 푸른 고름이 슬퍼 보였다.


어머니는 푸른 고름 하나로 여자이기를 드러내고 싶었을 것이다. 고름을 매듯 제 삶에 인연인 것들은 제 생에 단단히 묶어두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마음 한 번, 육신 한 번 편히 놓아두지 못했을 것이다.


천첩. 누대로 솔거노비에 마름노비로 살아온 가계 태생인 천민출신의 첩이 바로 이 여자였다. 첩이로되 가족이 아닌 재산 목록으로 분류되는 여자.


어느 날 밤 아직 열리지 않은 처녀의 몸으로 나리를 받은 뒤 첩이 되었노라 했다. 수줍고 두려워 제 몸을 더듬는 남정네의 손길을 비껴내지도 못하고 그저 그렇게 몸을 여는 대로, 몸속으로 들어오는 대로 눈 질끈 감고 어머니는 한 남자의 여자가 되어야 했다.


매화가 난분분 떨어져내리던 밤, 천지에 스며 있는 매화 향기는 홀리듯 그녀를 후원으로 이끌었다. 요요한 달빛에 흩날리던 흰 매화는 서기마저 서려 있더란다.


그 상서로운 빛들이 어머니의 신체에 난 아홉 개의 문으로 함부로 쳐들어와서는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더라고 어머니는 꿈꾸는 얼굴로 말했다. 그 매화가 바로 너라고. 그날 밤의 매화꽃잎이 자신의 몸속으로 들어와 함부로 몸 안을 헤집어놓더니 옥봉이 네가 생겼느니라고 어머니는 아련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자신이 안은 것은 나리가 아니라 꽃이었노라고도 했다.

그 꽃을 안고 난 뒤 얼마 안 돼 달거리가 끊기더니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다고, 낳고 보니 너였다고, 지금도 매화꽃만 보면 가슴의 뛰고, 아랫도리가 설렌다고, 영락없이 봄바람 난 여자라고 어머니는 얼굴 붉히며 이야기했다.


옥봉은 그렇게 말하는 어머니가 매화꽃 같다고 생각했다. 바람 끝에 파르르, 떨리는 꽃술은 어머니의 기다란 속눈썹 같았고, 앙증맞은 작은 꽃잎은 어머니의 하얀 얼굴과도 같았다.

첩의 자식은 첩의 자식으로 평생을 살아야했고, 노비의 자식은 노비로 대를 이어야 했다. 똑같은 사람 형상을 하고, 사람의 말을 하고, 사람의 구실을 했지만 사람은 아니었다. 비록 제 몸속을 떠도는 절반의 피는 이 나라 지존인 왕실의 피를 물려받았지만 그건 마음속의 미망만 키울 뿐이었다.


“내 딸이라서가 아니라 참 곱기도 하구나. 날아가던 나비도 꽃인 양 날아와 놀다가겠구나. 너한테서 나는 향인지, 매화향인지 방안이 다 향으로 환하다. 좋은 시절가기 전에 어서 빨리 좋은 남자 만나 혼인을 해야 할 텐데……”


어머니는 말끝에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얼굴에 분홍빛 그늘이 잠시 드리워졌다 사라졌다.

작가 한마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