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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그램 여신] 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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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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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결혼식 하기에 오늘만큼 좋은 날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인천대교의 새까만 아스팔트 위에 엎어진 채로, 점차 의식을 잃어가는 중이다.


저 앞에 내 차가 보였다. 보닛은 가드레일 사이에 낀 채 마치 히말라야 산맥 모형처럼 구겨져 있었고, 그 밑에선 시커먼 연기가 풀풀 피어올랐다. 그 연기 너머로, 사랑하는 아내가 앞 유리창을 뚫고 튀어 나가 보닛 위에 쓰러져 있는 게 보였다. 온통 피범벅이 된 아내를 본 순간 시간이 멈춰버린 것만 같았다. 내 숨도, 생각도, 다른 모든 것도, 전부 제자리에 멈춘 것 같았다. 그러나 갈기갈기 찢어진 웨딩드레스는 시시각각 빨갛게 물들어가고, 연기는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그래, 시간이 멈출 리가 없다.


저 연기 속에서는 숨도 제대로 못 쉴 것이다. 빨리 일어나서 아내를 도와줘야 하는데, 병원에 데려가야 하는데, 괜찮으냐고, 정신 좀 차려보라고 해야 하는데, 몸이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의식이 점차 혼미해진다. 슬픔, 절망감, 자책감, 두려움, 서러움 같은, 지금 내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모든 감정이 서서히 멀어져간다.


주변이 어두워진다. 나는 아내를 바라본다. 의식이 혼미해질수록, 반쯤 벌어진 그녀의 입술이 점점 커져간다. 주변의 어둠을 먹어가면서, 마치 비밀스러운 전설이나 우화를 노래하는 여신의 입술처럼, 점점 거대해진다. 나는 결국 그 아득한 입술 속으로 떨어져 내린다.


*


빗방울이 창문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린다. 차들이 젖은 아스팔트 위를 달리는 소리, 네온사인에 전류가 흐르는 소리, 에어컨의 팬이 돌아가는 소리, 냉장고의 모터가 돌다 멈추는 소리도 나직하게 들려온다. TV에서는 낭랑한 여자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다.


“안녕하십니까. 2025년 7월 30일, 현재 시각 오후 일곱시. 뉴스 스트리밍, 간추린 소식입니다. 인천광역시 행정민영화 시범정책에 반대하는 행정공무원 및 경찰공무원 노조의 집회가 호우 속에서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들과 인천시 간의 입장 차이, 시민들의 생각과 주변 교통 상황에 대해 이민정 기자가 잠시 후 보도합니다.”


짙은 초록색 가죽 소파에 누운 태하가 손을 뻗는다. 나무 탁자 위를 더듬던 손에 아바나 담뱃갑과 라이터가 잡히자 한 개비를 뽑아 불을 붙인다. 태하의 나른하고 멍한 눈동자가 담배 연기를 좇으며 깜빡인다.


“또 이상한 꿈을 꿨어요?”


소파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의자 삐걱거리는 소리, 신발 끄는 소리가 난다. 그러고는 한 남자가 얼굴을 내민다. 삐죽삐죽하게 세운 머리카락, 홀쭉한 얼굴, 작은 눈과 유난히 큰 코. 흰색 반팔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발목까지 오는 갈색 워커를 신고 있다.


“대웅, 퇴근 안 하고 뭐 했어.”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태하가 창가로 걸어간다. 작은 에어컨이 창문에 박힌 채 돌아가고 있다. 대충 잘라낸 유리와 에어컨 사이의 틈을 하얀 스티로폼이 메우고 있고, 덕지덕지 붙은 누런 박스테이프가 나머지 틈새를 막고 있다.


“스카이텔레컴이 신개념 가상현실 서비스 ‘스위트룸’을 본격 운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시민과 기자들이 스위트룸 발표 행사에 참석해 스카이텔레컴의 가상현실 기술을 직접 체험했는데요, 잠시 후 김지웅 기자가 자세한 소식을 전합니다.”


태하가 창문을 조금 열고 창밖을 본다. 콘크리트처럼 짙고 뭉글뭉글한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있다. 도로를 가로지르는 전선, 가로수의 무성한 잎, 상점들의 차양 끄트머리에서 빗물이 떨어져 내린다. 홀로그램 간판과 네온사인 불빛에 흠뻑 젖은 거리 위로 굵은 빗방울이 쏟아지고 있다. 태하가 뱉은 담배 연기가 창밖으로 빠르게 흘러 나간다. 젖은 아스팔트에 반사된 자동차 전조등 불빛이 태하의 눈언저리를 스치고 사라진다. 건물 외벽의 네온 간판은 치직치직 나직한 소리를 내고 있다.


“자신의 부모를 살해하고 한 달간 시신을 유기한 30대 남자가 오늘 오후 이웃 주민의 신고로 경찰에 검거됐습니다. 10년 가까이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은둔형 외톨이 생활을 하던 강 모 씨는 부모가 자신을 강제로 방 밖으로 끌어내려 하자 이에 분개해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태하가 장초를 창밖으로 던지며 마지막으로 빤 담배 연기를 뿜고는 창문을 닫는다. 그러고는 사무실을 둘러보며 말한다.


“불 좀 켜라.”


대웅이 걸어가 출입문 안쪽의 스위치를 건드리자 천장에 붙은 형광등이 껌벅거리며 하얗게 빛난다. 열댓 평 되어 보이는 사무실을 구색이 안 맞는 이런저런 집기들이 채우고 있다. 출입문 안쪽에는 형광등 스위치와 세면대와 수건걸이, 그리고 세면대 높이보다 약간 더 높을 뿐인 작은 냉장고가 있고, 사무실 중앙에는 짙은 올리브색 가죽 소파 두 개와 갈색 나무 탁자가 놓여 있다. 그 뒤쪽에는 커다란 철제 책상 하나와 검은 가죽 의자, 철제 캐비닛이 보인다. 반질반질하게 연마된 자갈 무늬 시멘트 바닥에는 금색의 가느다란 금속선이 종횡으로 박혀 일정하게 구획을 나누고 있다. 천장은 하얀색, 벽도 하얀색이다. 한쪽 벽은 전부 창문이고, 그 창문들 사이에 하나 서 있는 기둥엔 작은 벽걸이 TV가 걸려 있다.


“인천 남동공단 외국인 총격 사태로부터 20일. 사건 당시 드러난 경찰의 늑장 대응과 여전한 관할 떠넘기기 관행에 대해 유족들과 시민들의 생각을 들어봤습니다. 잠시 후 아홉시에 뵙겠습니다.”


태하가 소파에 앉으며 리모컨으로 TV를 끄자, 화면이 사라지는 동시에 거울이 되어 실내를 비춘다. 대웅이 태하 건너편에 앉으며 묻는다.


“비가 꽤 쏟아지나 봐요?”


“어, 좀 오네.”


대웅이 싱글거리며 자신의 왼쪽 손목을 태하에게 내민다. 손목에서 희미한 연두색 빛이 반짝거리고 있다.


“뭔데?”


“암터미널(Arm Terminal)요. 멋지죠?”


“노래를 불러대더니 소원 성취하셨네. 카를로스한테 가서 한 거야?”


“네, 있으니까 확실히 편해요. 인터넷, 전화, GPS, 결제, 영화나 음악 같은 건 그냥 손목에 플레이리스트 뜨고요.”


“이어폰 구멍이랑 배터리는 어디로 뺐어?”


“에이, 언제 적 얘길 해요. 요즘 건 그냥 귓가에서 들려요. 생체 전기로 충분하고.”


그때 출입문 너머에서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손님 오기로 했어?”


“그런 거 없는데?”


대웅이 출입문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문을 열자,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서 있다. 살짝 올라간 눈매, 작지만 곧은 코, 얇은 입술, 갸름한 턱. 화장을 아예 하지 않았거나 옅은 화장만 한 얼굴이다. 여자의 구불구불한 검은색 머리칼은 어깨에 닿아 있다. 푸른 민소매 원피스에 얇은 흰색 카디건을 입고, 작고 납작한 금색 핸드백을 어깨에 걸고 있다.


“박이슬 씨 소개로 왔는데, 맞게 찾아온 건지 모르겠네요.”


여자의 짙은 남색 우산에서 물이 떨어져 내린다. 대웅이 문을 더 활짝 열며 말한다.


“아, 이슬이요. 맞게 오셨네요. 맞아요.”


“근데 간판은…….”


여자가 손가락으로 문 바깥쪽을 가리킨다.


“그건 그냥 위장이에요, 사설 조사 찾아오신 거잖아요.”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대웅이 우산을 받아 세면대 옆에 세워 두고는 소파로 안내한다.


“거기 편하게 앉으시고요. 차는, 냉커피 괜찮습니까?”


태하가 회색 철제 책상 앞에 앉으며 말을 건넸다.


“아무거나 상관없어요.”


그러자 대웅이 누렇게 색이 바랜 냉장고에서 1.5리터 커피 페트병과 얼음을 꺼낸다.


“비가 많이 오죠?”


“그냥 추적추적 내리는 정도였는데, 갑자기 쏟아지네요.”


“수건 좀 드릴까요?”


“괜찮아요.”


태하가 손가락으로 책상 표면을 건드리자 책상 위 허공에 홀로그램 화면이 나타난다. 태하가 책상 표면 위에서 이리저리 손가락을 움직여 화면 속에 보이는 녹음 버튼을 클릭한다. 그러고는 소파로 가서 여자의 맞은편에 앉는다.


“조사 의뢰하러 오신 거죠?”


태하가 묻자 여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지금부터 하시는 말씀은 따로 부탁을 안 하셔도 철저히 비밀에 부쳐지니까, 뭐 다른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지금 이 대화는 녹음되고 있는 거 알고 계시고요, 원치 않으시면 서면으로 기록할 수 있습니다.”


“괜찮아요.”


대웅이 냉커피를 담은 컵 세 개를 차례로 탁자에 내려놓고 여자 옆에 앉았다. 여자가 컵을 들어 커피를 마신다. 아무 장식도 없는 투명한 유리컵이다. 컵을 탁자에 내려놓고는 입을 연다.

작가 한마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