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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크픽션] 1화 현재의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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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현재의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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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현재의 하나



나른한 오후였다. 커튼을 쳐놓은 창으로 햇살이 쏟아졌다. 만화카페 안은 후덥지근했다. 에어컨 온도를 내렸다. 시원한 바람이 살갗을 스쳤다.


오늘도 손님은 없었다. 가게 벽면에 빽빽하게 꽂혀 있는 만화책은 전부 내가 읽기 위해 갖다 놓은 것처럼 느껴졌다. 이 카페를 차리기 위해 들인 인테리어 비용과 매달 나가는 월세를 생각하면 꽤 값비싼 취미인 셈이다.


한때 작가주의 영화감독을 꿈꿨던 나는, 만화책을 읽으며 하루를 때우고 있다. 그래도 적당히 벌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매일 읽고 살 수 있다면 그리 실패한 인생은 아니라고 자위하곤 했다.


나는 배고픈 게 싫다. 영화를 한답시고 충분히 배가 고파봐서 그렇다. 시계가 열한시 삼십분을 가리키자 반사적으로 냉면집 전단지를 집어 들었다. 물냉면으로 할까 비빔냉면으로 할까, 둘을 저울질하며 고민에 빠지는 이 시간이 참 행복했다.


갑자기 실내가 후끈했다. 전단지에 눈을 붙인 채로 에어컨 리모컨을 찾아 실내 온도를 낮췄다. 하지만 얼굴에 열기가 끼칠 정도로 온도는 달아오르기만 했다.


그때야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새 만화카페 안이 온통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119에 전화라도 걸어야 하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불길은 순식간에 만화책을 집어삼키더니 카페 한편에 쌓아둔 시너 통으로 옮겨붙기 시작했다.


가만, 뭔가 이상했다. 저 시너통을 언제 쌓아뒀더라…… 하지만 기억을 되살리기도 전에 불길은 시너통을 덮쳤다. 폭탄이 터진 것 같은 굉음과 함께 만화카페가 뒤흔들렸다. 불길이 나를 향해 곧장 날아들었다.


으악, 뒤늦게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 쳤다. 의자가 뒤로 넘어가면서 바닥에 심하게 머리를 찧었다. 이렇게 가는구나 하는 생각에 눈을 떴다. 엉? 주위를 둘러보니 만화카페 안은 여전히 조용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불길도 없었고, 시너통도 없었다. 마음이 놓이는 순간, 뒤통수가 지독하게 아팠다.


뒤통수를 문지르며 정수기로 가 물을 한 잔 마셨다. 만화책을 읽다가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시원한 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자 저절로 한숨이 났다. 불길에 휩싸이는 악몽은 5년 전 한 5층 건물에서 끔찍한 화재를 겪은 이후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왔다. 어쩌면 나는 평생 이 악몽을 안고 살아야 할지 몰랐다.


마음을 진정시켰다. 불길에 휩싸이는 악몽을 꾼 만큼 아무래도 시원한 물냉면을 먹어야 할 것 같았다. 냉면집에 전화를 걸려는데, 전화가 왔다. 수화기를 들자 여보세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에 건물을 좀 재건축하려고 하는데…… 다음 달에 계약 끝나지? 가게 좀 비워줘. 보증금은 그때 정산하는 걸로 하고.


건물주는 계약할 때 말고는 얼굴 한 번 본 적도 없는데 전화를 할 때마다 반말이다. 그러나 대부분 임대료를 독촉하는 전화라 아니꼬워도 참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가게를 비워달라고 하는 것이다.


아직 권리금도 못 뽑았다. 이대로 쫓겨나면 내 손에는 보증금 천만 원만 달랑 남는다. 이 도시에서 천만 원으로 열 수 있는 가게는 없다. 단지 길거리에 나앉을 뿐이다.


이보세요, 이대로 나가라고 하면 저는 어떻게 합니까? 제 사정도 좀…….


건물주는 퉁명스럽게 내 말을 잘랐다. 그럼, 법대로 하자고. 툭, 소리와 함께 뚜뚜뚜 신호음이 들렸다. 건물주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은 거였다. 재빨리 다이얼 버튼을 눌렀다. 신호는 가지만 전화를 받지는 않았다.


수화기를 던지듯이 내려놓았다. 전화 한 통 때문에 인생이 또다시 꼬일 조짐이다. 고개를 돌렸다. 시계가 거인의 눈처럼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열두시였다. 공교롭게도 처음 인생을 꼬이게 했던 전화도 5년 전, 정오에 걸려왔었다는 기억이 났다.

작가 한마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