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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터 슐레밀의 놀라운 이야기] 페터 슐레밀의 놀라운 이야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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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터 슐레밀의 놀라운 이야기 (1)

  • WHITE


I


내게는 무척 힘겨운 항해이긴 했지만 그래도 우리는 무사히 항해를 마친 후 마침내 항구에 도착했네. 보트로 옮겨 타고 육지에 닿자마자, 나는 자질구레한 짐 보따리를 짊어지고 북적대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지나 근처에서 맨 먼저 간판이 눈에 띄는 작은 여관으로 갔네.


방을 하나 달라고 하자 종업원은 나를 흘긋 쳐다보고는 지붕 밑 방으로 안내하더군. 나는 냉수를 한 잔 달라고 하면서 토마스 욘 씨의 집이 어디 있는지 자세히 설명해 달라고 부탁했네.


“북쪽 성문 밖, 오른쪽으로 보이는 첫 번째 별장입니다. 붉은색과 흰색 대리석으로 지은 기둥이 많은 새 저택이죠.”


좋았어!


그러나 아직 이른 시각이었네. 그래도 나는 당장에 짐을 풀고 새로 맞춘 검정색 양복을 꺼냈지. 제일 좋은 옷으로 말쑥하게 차려입은 후 소개장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그길로 길을 나섰네. 욘 씨가 내 소박한 소망을 이루어 줄지 모르는 일 아닌가.


나는 북쪽으로 향한 길을 한참 올라가 성문에 도착했네. 나무들 사이로 저택의 기둥들이 번쩍이는 것이 곧 보이더군. 여기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네. 손수건으로 신발에서 먼지를 털어 내고 넥타이를 고쳐 맨 후 용기를 내어 초인종을 잡아당겼지. 문이 활짝 열렸네.


현관에서 나는 심문을 거쳐야 했네. 어쨌거나 문지기는 내가 온 것을 알렸고, 나는 정원으로 부름을 받는 영광을 얻었네. 정원에서는 조촐한 파티가 열리고 있었네. 욘 씨의 자만에 찬 뚱뚱한 풍채를 보고 나는 대번에 그를 알아보았지. 나를 제법 그럴싸하게 맞아 주었네.


부자가 거지를 대하는 투였지만 나를 향해 몸을 돌리기까지는 했으니까. 하지만 여전히 좌중의 손님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내가 내민 편지를 낚아챘네.


“아, 알았소! 내 동생의 편지로군. 오랫동안 소식을 듣지 못했는데. 내 동생은 잘 지내오? 저 자리에다…….”


그는 내 대답은 듣지도 않고 손님들을 향해 말을 이으며 편지를 든 손으로 언덕을 가리켰네.


“저 언덕 위에 새 집을 지을 생각이오.”


그리고 편지 봉함을 떼면서 얘기를 계속했네. 이제 화제는 재산에 관한 것으로 넘어갔지. 그가 불쑥 말을 던졌네.


“백만금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은,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하지만, 불량배나 다름없지요.”


“오, 당연하지요!”


나는 감동에 찬 어조로 외쳤다네. 내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는 내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네.


“여기 그냥 머무시오. 나중에 이것에 관한 내 생각을 말해 줄 시간이 있을지 모르니까.”


그는 편지를 가리키고 나서 그것을 집어넣은 뒤, 어느새 다시 손님들을 향했네. 그는 한 젊은 귀부인에게 팔을 내밀었고, 나머지 신사들도 다른 미녀들을 차지하려고 애쓰더군. 그렇게 짝들이 어우러졌네. 이어서 모두들 장미꽃이 만발한 언덕을 순례하러 나섰다네.


나는 남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살그머니 그들 뒤를 따랐지. 어차피 아무도 더 이상은 내게 관심을 두지도 않았네. 손님들은 잔뜩 기분이 좋아 농담을 주고받으며 시시덕거렸네.


더러는 별일 아닌 것을 진지하게, 더러는 진지한 일을 별일 아닌 것처럼 얘기했고, 특히 그 자리에 없는 친구들과 그들의 사정에 대해 신나게 농담을 주고받더군. 그 모든 것을 이해하기에 나는 그 자리가 몹시 낯설었고, 또 그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들의 의미를 캐고 있기에는 나 자신의 걱정에 골똘히 빠져 있었다네.


우리는 장미 숲에 이르렀네. 그런데 그곳에서 이날 파티의 여주인공인 듯한 파니라는 이름의 미녀가 꽃이 핀 장미를 가지째 억지로 꺾으려다가 그만 가시에 찔리는 불상사가 일어났네. 짙은 장미꽃에서 흘러나오듯이 그녀의 고운 손에 보랏빛 피가 흘렀지.


이 일로 손님들 모두가 어수선해졌네. 누군가 영국식 반창고를 찾았지. 그때 곁에서 말없이 함께 걸어가던?나는 여태껏 그 남자가 있는 줄도 몰랐네?큰 키에 비쩍 마른 한 늙수그레한 남자가 한물간 회색 윗도리의 착 달라붙은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작은 지갑을 하나 꺼내 열더니, 귀부인에게 공손하게 절을 하며 찾던 물건을 건네주는 게 아닌가.


부인은 그 남자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감사하다는 말도 없이 반창고를 받아 상처에 붙였네. 그리고 모두들 계속해서 언덕을 올라갔네. 언덕 마루에서 정원의 초록빛 미로 너머 끝없이 펼쳐진 대양의 전망을 즐길 생각이었지.


그 광경은 정말로 장관이었네. 짙은 물결과 푸른 하늘 사이의 수평선으로 한 점 광채가 떠올랐네.


“망원경을 가져오너라!”


욘 씨가 소리쳤네. 주인의 부름에 하인들이 미처 움직이기도 전에, 아까의 회색 옷 남자가 공손하게 절을 하며 어느새 양복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멋진 망원경을 꺼내 욘 씨에게 건네주었다네. 욘 씨는 즉시 망원경을 들여다보고, 그것은 어제 출항한 배이며 역풍을 맞아 항구로 되돌아오는 중이라고 손님들에게 일러 주었네. 망원경은 이 사람 손에서 저 사람 손으로 옮겨 갔지만 다시는 주인에게로 돌아가지 않았지.


나는 어안이 벙벙하여 회색 옷의 남자를 쳐다보았고, 저렇게 큰 물건이 어떻게 저 작은 안주머니에서 나올 수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네. 그러나 아무에게도 그 점이 눈에 띄지 않는 듯 보였고, 사람들은 내게도, 또 회색 옷의 남자에게도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았네.


각 지방의 진기한 과일들이 값진 그릇에 담겨 다과로 나왔네. 욘 씨가 주인으로서 가볍게 예의를 갖추어 내게 두 번째로 말을 건네더군.


“과일을 들어 보시오. 항해하는 중에는 먹어 보지 못한 것들일 거요.”


나는 인사를 했지만, 그는 내 인사는 받지도 않고 어느새 다른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었네.


축축한 땅을 꺼리지만 않는다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마주하고 비탈진 언덕에 눕고 싶은 마음이었네. 과연 손님들 가운데 누군가가 터키산 양탄자를 여기 깔면 정말 좋겠다는 말을 하더군.


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회색 옷의 남자가 이미 양복 안주머니에 손을 넣고 눈에 띄지 않게 실로 겸손한 태도로 금실을 짜 넣은 화려한 터키산 양탄자를 꺼내려고 애를 쓰고 있는 걸세. 하인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양탄자를 받아 원하는 자리에 펼치더군.


손님들도 서슴없이 그 위에 앉았고. 나는 다시 어리둥절해서 회색 옷의 남자와 그의 안주머니와 길이 20자에 폭 10자가 넘는 양탄자를 보았지. 특히나 아무도 그 점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더더욱 영문을 알 수가 없어 눈을 비빌 수밖에 없었네.


나는 그 남자의 정체를 알고 싶어서 저분이 누구냐고 묻고 싶었지만 누구에게 물어보아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네. 시중 받는 신사들보다도 시중을 드는 하인님들이 더 무서웠으니까. 결국 용기를 내어 비교적 덜 거드름을 피우는 것으로 보이고 곧잘 혼자 있곤 하던 한 젊은 남자에게 다가갔지. 그리고 조그만 소리로 저기 회색 옷을 입은 친절한 남자가 누구냐고 물어보았네.


“저 남자 말씀이오. 재단사의 바늘에서 뛰쳐나온 실오라기처럼 보이는 사람 말이오?”


“그렇습니다. 저기 혼자 서 있는 남자분 말입니다.”


“나는 모르는 사람이오.”


그는 이렇게 대답하고는 나와의 대화가 길어지는 것을 피하려는 듯 몸을 돌려 다른 누군가와 시시한 얘기를 나누더군.


햇볕이 따갑게 내리쬐기 시작하자 귀부인들께서는 견디기 힘들어했네. 아름다운 파니가, 내가 본 바에 의하면 여태껏 아무도 말을 건넨 적이 없는 그 회색 옷의 남자에게, 혹시 천막을 갖고 있느냐고 지나가는 말투로 가볍게 물어보았네.


그는 황송하다는 듯 공손하게 몸을 굽히는 것으로 답을 대신하고는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지. 그리고 거기에서 천, 막대기, 끈, 쇠 연장, 한마디로 화려한 여행용 천막에 필요한 모든 것이 줄줄이 나오는 것을 나는 목격했네. 젊은 신사들이 천막 치는 일을 도왔고, 그 천막은 양탄자 면적을 전부 덮을 만큼 넓게 펼쳐졌는데, 이번에도 그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네.


나는 아까부터 으스스한, 정말로 오싹한 기분에 휩싸였네. 그다음에 누군가 소원을 말하자 그 문제의 남자가 또 안주머니에서 세 필의 승마용 말을, 그야말로 안장과 비품을 완비한 커다란 흑마 세 필을 꺼내는 것을 목격했을 때 내 기분이 어땠겠나! 세상에, 생각해 보게.


이미 작은 지갑, 망원경, 길이 20자에 폭 10자의 양탄자, 똑같은 크기의 여행용 천막, 거기에 필요한 막대기와 연장을 쏟아 낸 바로 그 안주머니에서 이번에는 안장을 갖춘 말 세 필이 더 튀어나오다니!


맹세코 내 눈으로 똑똑히 봤단 말일세. 그게 아니라면, 자네로서도 분명 믿기지 않는 이야기지. 그 남자 자신은 얼뜨고 겸손해 보이는데도, 또한 다른 사람들은 그에게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데도, 그런 만큼 더더욱 나는 그의 창백한 모습에서 눈을 뗄 수 없었고, 그 모습이 너무나 무서워서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네.


나는 일행들 몰래 빠져나오기로 마음먹었네. 그 무리 안에서 내 역할이라는 게 어차피 별 볼 일 없는 것이었기에 자리를 뜨기가 쉬울 것 같았지. 나는 일단 시내로 돌아갔다가 내일 아침에 욘 씨를 다시 찾아 내 행운을 시험해 볼 생각이었네. 또 그럴 만한 용기가 생기면 그 기묘한 회색 옷의 남자에 대해서도 물어볼 참이었지. 그렇게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나!


나는 살그머니 장미 숲을 지나고 언덕을 무사히 내려와 확 트인 잔디밭에 이르렀네. 그러고는 멀쩡한 길을 놔두고 잔디밭을 가로질러 가다가 들킬세라 겁이 나서 주변을 돌아보았지.


그런데 문제의 회색 옷의 남자가 바로 내 뒤를 쫓아오다가 내게 다가오는 것을 보고 얼마나 기겁을 하고 놀랐는지! 그는 곧 내 앞에서 모자를 벗고 깊이 머리를 숙여 절을 했네. 여태껏 그렇게까지 정중하게 내게 인사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네.


의심의 여지없이 그는 내게 말을 걸 생각이었는데, 나는 실례를 무릅쓰지 않는 한 그걸 피할 도리가 없었네. 나도 모자를 벗어 답례를 한 후, 땅에 뿌리가 박힌 듯 땡볕에 맨머리로 서 있었지.


나는 공포에 질려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고, 마치 독사의 눈초리에 사로잡힌 한 마리 새의 꼴이었다네. 그 사람도 무척 당황한 듯이 보였네. 그는 시선도 들지 않고 여러 차례 허리를 굽혀 절을 한 뒤, 좀 더 가까이 다가와 소리 죽인 불안한 음성으로, 마치 구걸하는 사람의 어조로 내게 말을 걸었네.


“면식도 없이 선생을 찾은 내 무례함을 용서하시오. 선생께 한 가지 청이 있소이다. 부디 내 부탁을…….”


“무슨 말씀을, 나리!”


나는 불안한 마음에서 소리를 쳤네.


“소인이 무엇을 해 드릴 수 있겠습니까? 나리 같은 분에게…….”


우리는 둘 다 말문이 막혔고, 내 생각으로는 둘 다 얼굴이 상기됐을 걸세.


그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다시 입을 떼었네.


“짧은 시간이었지만 선생 곁에 있으면서 행복을 맛보았소이다. 선생, 감히 말을 하겠소. 실로 이루 형용할 수 없이 감탄스러운 마음으로 선생의 너무나 아름다운 그림자를 여러 차례 관찰할 수 있었소. 선생께서 햇빛 속에서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그야말로 품위 있게 무심히 발치에다 던진 그 훌륭한 그림자 말이오. 당연히 무리한 청이 되겠지만, 혹시 선생의 그 그림자를 내게 양도할 의향은 없으시오?”


그는 입을 다물었네. 내 머릿속은 물레바퀴가 돌듯이 어지러웠지. 내 그림자를 팔라는 이 기막힌 제안에 대해 내가 어떻게 해야 했겠나? 이 사람은 정신이 나갔어, 하고 나는 생각했지. 그래서 그의 굽실거리는 태도에 어울리도록 나도 말투를 바꾸어 이렇게 대답했네.


“원, 이보시오, 이 양반아! 당신은 당신 그림자로 충분하지 않소? 내 보기엔 이건 있을 수 없는 별난 거래 같구려.”


그가 바로 대꾸했네.


“내 안주머니에는 선생이 제법 값지다고 여길 만한 것들이 많이 있소이다. 물론 아무리 값을 많이 쳐 준다고 해도 이 대단히 소중한 그림자 값으로는 어림없겠지만.”


안주머니를 떠올리자니 또다시 소름이 끼쳤네. 내가 어떻게 그를 이 양반아, 하고 부를 수 있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네. 나는 다시 말을 꺼내며 가능한 한 정중한 태도로 내 행동을 만회해 보려고 했네.


“오, 나리, 보잘것없는 소인을 용서하십시오. 나리의 뜻을 잘 알 수가 없습니다. 소인이 어떻게 단지 제 그림자만…….”


그가 내 말을 잘랐네.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그 고귀한 그림자를 거두어 넣도록 허락만 하시오. 그 일을 어떻게 할지는 내가 알아서 하겠소. 그 대신 진심에서 우러나온 감사의 표시로, 내 안주머니 안에 넣고 다니는 온갖 보물 중에서 뭐든 골라잡을 기회를 선생께 드리겠소이다. 마법의 풀뿌리1, 만드라고라 뿌리2, 요술 동전3, 마법의 은화4, 롤랑 크나펜의 수건5, 병 속의 악동6이 있소. 아니, 이런 것들은 선생에게 아무것도 아닐 것 같소. 그보다는 튼튼하게 새로 수선한 포투나7의 마술 모자가 좋겠소. 또한 옛것 그대로의 행운의 주머니도 있소이다.”


“행운의 주머니요.”


나는 그의 말을 가로막았네. 몹시 불안함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은 그의 그 한마디 말에 포로가 되어 버렸다네. 현기증이 났고, 눈앞에 금화가 여러 겹 어른거렸네.


“자, 선생, 이 행운의 주머니를 잘 구경하고 시험해 보시오.”


그는 안주머니에서 튼튼한 가죽 끈이 두 줄 달려 있고 질긴 코르도바 가죽으로 꼼꼼하게 바느질된 큼지막한 주머니를 꺼내 즉시 내게 건네주었네. 나는 그 안에 손을 넣고 금화 열 닢을 꺼냈지. 그리고 다시 열 닢, 또 열 닢, 또 열 닢을 꺼내 보았지. 나는 얼른 그에게 손을 내밀었네.


“좋습니다. 거래를 끝냅시다. 이 주머니를 주고 내 그림자를 가져가십시오.”


그는 나와 손뼉을 마주치고 나서, 주저 없이 내 앞에 꿇어앉았네. 나는 그가 놀랄 만큼 익숙한 솜씨로 머리에서 발끝까지의 내 그림자를 소리 없이 풀밭에서 떼어 내어 들어 올린 후 둘둘 말아 접어 안주머니에 넣는 모습을 지켜보았네.


그는 일어서서 다시 한 번 내게 절을 한 후 장미 숲으로 되돌아갔지. 그가 혼자서 슬그머니 웃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네. 그러나 나는 행운의 주머니 끈을 꽉 부여잡았네. 주변은 햇빛을 받아 환히 빛나고 있었고, 그때까지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네.



II


마침내 다시 정신이 들자, 나는 더 이상 어떤 일에도 얽히고 싶지 않아 서둘러 그곳을 떠났네. 나는 우선 호주머니를 모조리 금화로 채우고 나서, 행운의 주머니 끈을 단단히 둘러맨 후 그것을 옷 속에 숨겼네. 어느새 공원에서 나와 길에 이르러 시내로 향했지. 생각에 잠겨 성문을 향해 가고 있는데, 등 뒤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네.


“젊은 양반, 이봐요! 젊은 양반! 내 말 안 들리오?”


뒤를 돌아보니, 한 노파가 나를 부르더군.


“이봐요, 당신은 그림자를 잃어버렸군요.”


“감사합니다, 어르신!”


나는 선의에서 우러나온 충고에 감사하며 노파에게 금화 한 닢을 던져 주고는 나무들 아래로 갔지.


성문 앞에서 나는 다시 보초가 하는 말을 들었네.


“선생은 대체 어디다가 그림자를 두고 왔소?”


곧이어 몇몇의 여자들이 말했지.


“하느님 맙소사! 그림자가 없는 불쌍한 인간이로군!”


나는 기분이 언짢아지기 시작했고, 햇빛에 나서는 것을 조심스럽게 피했다네. 하지만 그건 어디로 발걸음을 내딛어도 불가능했지. 이를테면 내가 당장 건너가야 할 넓은 길에서, 참 운 나쁘게도, 마침 아이들이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는 시간이니 어쩔 수 없었다네.


아직도 눈앞에 생생하네. 한 빌어먹을 곱사등이 장난꾸러기가 내게 그림자가 없다는 걸 대번에 알아차렸지. 그 녀석은 비명을 지르고, 교외에 사는 모든 먹물 먹은 부랑아들에게 나의 존재를 폭로했네. 그러자 그 녀석들은 나를 살펴보더니 쌍욕을 해 댔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햇빛에 나가면 그림자를 끌고 다니는 법이지.”


나는 그 녀석들에게서 벗어나려고 한 움큼의 금화를 던지고 동정심 많은 사람들이 빌려 준 마차로 달려갔다네.


달리는 마차 안에서 혼자가 되었을 때 나는 절규했네. 이미 내 마음속에서는 어떤 예감이 싹텄네. 이 세상에서 아무리 돈이 공적과 미덕보다 귀하다고 해도, 그림자보다는 못하다는 것을. 예전의 나는 양심을 위해 돈을 포기했는데, 이제는 그깟 돈을 얻으려고 그림자를 포기했다는 것을. 이 세상에서 나는 무엇이 될 수 있으며, 또 어떻게 될 것인가!


마차가 낡은 여관에 도착했을 때에도 나는 여전히 매우 혼란스러웠네. 저 형편없는 지붕 밑 방에 발을 들여놓는 상상을 하고는 깜짝 놀랐네. 나는 마부에게 내 물건을 가지고 내려오라고 시키고 경멸의 눈초리로 초라한 짐을 받은 후, 금화 몇 닢을 던지며 고급 호텔로 가자고 명령했네.


호텔이 북쪽에 위치해 있어서 나는 햇빛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네. 나는 마부에게 금화를 줘서 제일 좋은 방을 잡게 했고, 방에 들어선 뒤 숨어 있었지.


내가 이제 뭘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오, 사랑하는 샤미소. 자네 앞에서 고백하는 것조차 얼굴이 붉어지는군. 나는 옷 속에서 불행의 주머니를 꺼내고는, 타오르는 불처럼 내 안에서 커져 가는 일종의 분노를 느끼며 그 안에서 금화를 꺼냈네.


꺼내고 또 꺼내고, 계속해서 꺼냈지. 금화들을 바닥에 뿌려 놓고는 쩔렁거리는 소리가 나도록 밟았네. 반짝이고 쩔렁대는 금화가 내 가엾은 마음을 기쁘게 해 주었고, 계속해서 금화 위에 금화를 던져 댔다네.


그리고 마침내 기진맥진하여 금화가 그득한 침대에 쓰러져서도 금화에 취해서 금화를 뒤적이고 그 위에서 뒹굴었다네. 그렇게 낮이 가고, 저녁이 지났지. 나는 방문을 열지 않았고, 밤에는 금화 위에 누워 있는 나를 발견했네. 이후 졸음이 쏟아지더군.


자네 꿈을 꾸었지. 나는 자네의 작은 방 유리문 뒤에 서서 해골과 시들어 버린 꽃다발 사이의 책상에 자네가 앉아 있는 모습을 본 것 같았네. 자네 앞에는 할러8, 훔볼트9, 린네10의 책들이 펼쳐져 있었고, 소파 위에는 괴테 전집과 『마법의 반지』11가 있었지.


한동안 자네를, 그리고 방에 있는 모든 물건들을 관찰하고 나서 또다시 자네를 관찰했네. 그러나 자네는 움직이지 않고 숨도 쉬지 않았지. 자네는 죽어 있었네.


그리고 나는 잠이 깼다네. 아직은 너무 이른 시간 같았지. 시계가 멈춰 있었네. 나는 녹초가 되어 갈증이 나고 배도 고팠지. 어제 아침부터 먹은 게 없었네. 조금 전까지 내 어리석은 마음을 만족시켜 주었던 이 금화들이 불쾌하고 넌더리가 나서 발로 차 버렸네.


화가 나니까 이제는 뭘 해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더군. 그렇게 널려 있게 둘 수는 없었네. 나는 행운의 주머니가 다시 금화들을 삼키는지를 시험해 보았네. 소용없었지. 내 방 창문들은 어느 것 하나 바다 쪽으로는 통해 있지 않았네.


어쩔 수 없이 진땀을 흘려 가며 금화들을 별실에 있는 커다란 옷장으로 끌고 가 그 안에 쑤셔 넣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네. 몇 움큼만은 바닥에 남겨 두었지. 일을 마친 후 지칠 대로 지친 나는 긴 의자에 앉아 호텔에 있는 사람들이 움직이길 기다렸네. 인기척이 나자마자 나는 주인을 불러 음식을 주문했지.


나는 장래의 내 집을 어떻게 꾸밀지 그 사람과 상의했네. 그는 가까이에서 나의 시중을 들 벤델이라는 사람을 소개했다네. 벤델의 성실하고 영리한 인상은 단박에 내 마음에 들었네.


벤델은 그때부터 충성을 다해 내 비참한 삶을 위로하며 나와 동행했고, 암담한 운명을 견디어 내도록 도와준 장본인일세. 나는 하루 종일 내 방에서 주인 없는 떠돌이 하인, 구두장이, 재단사, 상인들과 시간을 보내며 방 안을 꾸미고 값비싼 귀중품과 보석을 사는 걸로 잔뜩 쌓인 금화들을 덜어 냈네. 그래도 금화 더미는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더군.


그사이에 나는 불안한 의혹에 싸인 채로 그런 상황을 어영부영 흘려보냈네. 문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저녁이 되면 방 안에 40개의 밀랍 초를 켜놓게 하고서야 어둠 속에서 밝은 곳으로 내 모습을 드러내었지.


개구쟁이 학생들이 놀리던 무시무시한 소동이 생각났네. 굉장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나는 사람들의 의견을 시험해 보기로 결심했네. 그즈음 밤에는 달이 환히 비췄지. 저녁 늦게 나는 헐렁한 외투를 걸쳐 입고 모자를 눈에까지 눌러쓴 뒤, 죄를 지은 사람처럼 벌벌 떨면서 호텔 밖으로 살금살금 나왔네.


멀리 떨어진 광장에서야 비로소 그때까지 방패막이가 되었던 주택들의 그림자에서 빠져나와 달빛을 받았지. 지나가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내 운명을 들어 볼 각오를 하고.


사랑하는 친구여, 내가 견뎌야 했던 그 모든 것들을 고통스럽게 반복하고 싶지 않네. 여자들은 종종 나에 대해 깊은 동정심을 표했네. 그 표현들은 어린 녀석들의 조롱과 남자들, 특히 널찍한 그림자를 드리우는 비대한 몸집의 남자들의 우쭐대는 멸시 못지않게 내 마음을 찌르는 것들이었지.


부모와 동행하는 듯 보이는 어떤 아름답고 순결한 소녀가 발치만 내려다보고 걷다가 돌연 반짝이는 눈을 내게 돌렸네. 소녀는 내게 그림자가 없는 것을 알아보고는 기겁을 하여 그 예쁜 얼굴을 베일로 덮은 후 고개를 숙인 채 말없이 지나갔다네.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네. 눈물이 줄줄 흘렀지. 그리고 에이는 가슴으로 비틀거리며 어둠 속으로 들어갔네. 넘어지지 않게 여러 주택들에 몸을 기대야 했고, 천천히 걷느라 한참 만에 내 방에 도착했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네. 다음 날 내가 제일 먼저 했던 일은 회색 옷의 남자를 찾게 하는 것이었네. 어쩌면 그를 다시 찾는 데 성공할지도 모르고, 그 남자도 나처럼 어리석은 거래를 후회하는 참이라면 얼마나 다행일까! 나는 벤델을 불렀네. 그는 민첩하고 재치 있어 보였지.


나는 그에게 회색 옷의 남자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고, 그의 수중에 한 가지 보물이 있는데, 그것이 없으면 내 인생은 고통일 뿐이라고 했네. 그리고 그 남자를 본 시간과 장소, 그 자리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에 대해 설명한 후, 망원경, 금실을 짜 넣은 터키 산 양탄자, 화려한 여행용 천막 그리고 마지막으로 흑마에 대한 진상을 알아오라고 시켰네.


그 이야기들은 확실치는 않아도 모두에게 무심히 보이는 수수께끼 같은 남자와 관련된 것이며 그 사람의 등장이 내 인생의 평온과 행복을 파괴했다고 덧붙여 말했다네.


이야기를 끝내고 나는 들 수 있을 만큼의 금화를 꺼내 왔네. 그리고 보다 더 중요한 일을 위해 보석과 장신구들을 추가로 주었지.


“벤델…….”


나는 말했네.


“이것이 많은 길을 터 줄 것이며, 불가능해 보이는 많은 일들을 쉽게 해 줄 것이네. 내가 인색하지 않듯이, 자네도 아끼지 말고 쓰게나. 그리고 자네의 주인인 나를 기쁘게 해 줄 소식들을 가져오게. 내 희망은 그 소식들에 달려 있네.”


벤델은 출발했네. 하지만 느지막이 슬퍼하며 되돌아왔네. 욘 씨의 하인들이나 손님들 중에?벤델은 그 모두와 만나 이야기를 했네?회색 옷의 그 남자에 대해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걸세.


새 망원경이 거기 있었지만 그것이 어디에서 왔는지 아무도 몰랐고, 양탄자와 천막이 언덕에 여전히 펼쳐져 있었지만 하인들은 주인의 재산을 자랑할 뿐 그 값비싼 새 물건들이 언제부터 주인의 것이 되었는지 아무도 모른다더군.


주인 자신이 그 물건들에 만족할 뿐 그 물건들이 어디에서 생겼는지 모르면서도 그런 사실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걸세. 젊은 신사들은 타고 다녔던 말들을 마구간에 넣은 후에 그날 자신들에게 말을 선물한 욘 씨의 넓은 아량을 칭찬했다네.


벤델의 상세한 이야기를 통해 밝혀진 것은 고작 그 정도로, 성과는 없었지만 나는 벤델의 신속한 움직임과 사려 깊은 태도를 마땅히 칭찬해 주었네. 그리고는 침울해져서 혼자 있게 해 달라며 그에게 나가라고 손짓했지.


하지만 벤델은 다시 말을 이었네.


“주인님께 전해 드릴 가장 중요한 일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그 일을 하러 오늘 아침 나서던 참에 문 앞에서 만난 사람이 제게 전해 달라고 한 부탁입니다. 그 남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페터 슐레밀 씨에게 전해 주시오. 이곳에서는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할 거라고요. 나는 바다로 나갈 겁니다. 순풍이 나를 항구로 불러서 말이죠. 그러나 몇 년 며칠 후 내 직접 찾아와서 슐레밀 씨에게 꽤나 괜찮은 거래를 제안할 거요. 안부 전해 주시고 내 고마워한다고 전해 주시오’라고요. 제가 그에게 누구냐고 묻자, 그는 주인님께서 자기를 이미 알고 계신다고 했습니다.”


“그 남자가 어떻게 생겼던가?”

작가 한마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