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rybook

[종손들 이야기]

이전 다음
최상단 최하단

  • WHITE





지금 우리는 그 시대의 갖가지 어리석은 해학을 투영한 동판화가 실린 한 낡은 달력을 넘겨다보고 있습니다. 어쨌거나 그 시대는 한 편의 동화처럼 과거지사가 되었군요! 프랑스라는 이름이 붙여진 보편적인 혁명이 모든 체제를 무너뜨리기 전, 그 당시 세상은 얼마나 충만했었는지! 이제 세상은 너무나도 천편일률로 무미건조해져 버렸습니다. 그 시기로부터 수세기를 훌쩍 뛰어넘은 것 같습니다. 다만 우리들 젊은 날의 세월이 그 시대에 속했다는 것을 가까스로 기억해 낼 뿐. 코도뷔키가 대가의 손길로 우리에게 남겨 준 이 진기한 명작들의 깊이에서 우리는 당대의 정신적 명료함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그 정신에 걸림돌이 되었던 요소들을 투영한 화폭들에서도 쉽사리 판독할 수 있답니다. 이 동판화는 그 같은 요소들을 대담하게 초지상적으로 묘사했어요. 단순히 사회적인 외관만 드러내지 않은 그런 구성과 명암을! 모든 개개인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외향과 복장으로 자신만의 고유한 세계를 나타내죠.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 지구상에 불멸의 것을 남기려고 합니다. 모든 이들에게 그렇게 배려되었듯이, 유령을 불러내고 볼 줄 아는 강신술사, 비밀 결사원들과 기이한 모험가들, 외과 의사들과 예시력을 지닌 환자들까지도 닫힌 가슴을 꿰뚫고 내다볼 수 있는 심오한 마음의 동경을 누렸지요. 이처럼 풍요로운 장면들을 눈여겨보노라면, 인류는 고차원의 세계에 성급하게 서둘러 접근했다는 추측이 몰려옵니다. 그리고 인류는 반쯤 베일을 들춘 미래의 광채에 눈이 멀어서 밝아 오는 미래를 위해 무모한 자멸의 길로 치달으면서, 지상적 현존에 대한 절박함에 얽매였으리라는 추측도 듭니다. 현존이란 우리에게 온 힘을 요구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그 보상은 느긋하게 돌아오는 법인데 말이지요.

그 같은 시대는 일체의 변화에 맞서서 진지하고 대단하게 고수된 온갖 종류의 후원 재단의 은덕으로 수많은 세기를 지탱해 왔습니다. 그리하여 ◦◦◦라는 대도시에 ○○○라는 영주의 상속 저택이 남아 있게 되었지요. 30년 전부터 그 저택에는 아무도 살고 있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 누구도 사용하지 않지만 모두가 관람하도록 허용된 가재도구들이 후원 재단의 기부금으로 온전히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케케묵은 낡은 저택이었으나 여전히 그 도시의 특별한 명소로 인정받을 수 있었어요. 거기에는 해마다 기부금의 일정 금액이 은제 식기며 식탁보, 그림들을 늘리는 데에, 요컨대 한 집안을 꾸려 가는 데 지속적으로 요구되는 물건을 확충하는 데에 사용되었지요. 특히 지하실에는 해묵은 최고급 포도주들이 풍성하게 수집되어 있었습니다. 저택의 상속주는 모친과 함께 외지에 살고 있었으며, 그의 여타의 수입 규모로 보아 이 저택을 그가 쓰지도 않고 남겨 둔 것을 아쉬워할 필요가 없는 처지였습니다. 기부금에 맞게 저택 관리인은 모든 것을 조절했고, 곡식을 갉아 먹는 쥐를 잡을 몇 마리의 고양이를 길렀으며, 토요일마다 성에 사는 가난한 이들에게 몇 푼씩 나누어 주었습니다. 종손이 성장하는 동안 다른 후손들의 존재를 완전히 잊은 것을 가난한 사람들이 부끄러워하지 않았더라면 이들 가운데서 이 집안의 친척을 쉽게 찾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도대체가 종손은 많은 행운을 가진 것 같지가 않았어요. 많은 것을 소유한 자들은 자신의 부유함을 그다지 기뻐하지 않지만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은 이들을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이지요.

이를테면 매일처럼 일정한 시간에 이 종손의 저택 앞을 무거운 발걸음으로 지나치는 현재 저택 소유주의 한 사촌이 있었지요. 소유주보다 서른 살은 더 나이가 들었지만 재산은 형편없이 적은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고개를 흔들면서 한 줌 담배를 피웠어요. 아마 이 도시 전체에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이 빨간 코의 노신사만큼 유명한 사람은 없었을 겁니다. 시청 시계에 달린 금속 기사처럼 그는 종탑이 울리기 전에 집을 나서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사내아이들에게는 학교 갈 시간을 상기시켜 주고, 또한 나이든 시민들에게는 목재 뻐꾸기시계의 시간을 맞출 수 있게끔 걸어 다니는 표준 시계 노릇을 했습니다. 그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귀족들에게는 사촌으로 불렸지요. 그가 왕족의 직계와 친척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었으며, 그 자신도 그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명예인 이 같은 호칭으로 불리는 것을 좋아했으니까요. 한편 서민들은 그를 단지 소위라고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젊은 시절 소위 노릇을 했고 지금도 소위 계급의 복장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요컨대 지난 30년 사이에 의상도 유행 따라 많이 바뀌었다는 사실이 그와는 무관한 것 같았어요. 아마 30년 전에만 해도 천을 훨씬 질기게 만들었던 모양이에요. 털이 닳아 버린 뒤에도 지금 보이는 굵게 꼬아진 실올들이 그 점을 말해 주고 있었습니다. 붉은 옷깃은 벌써 겹겹이 해져 반질반질해졌고, 단추들은 그의 코처럼 붉은 구릿빛으로 퇴색했어요. 양모 깃이 달린 적갈색의 삼각 군모도 비슷하게 퇴색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체 복장 중에서 가장 예사롭지 않은 것은 칼자루에 달린 장식 술이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해적의 머리 위에 있는 칼이 머리카락에 걸려 있는 것처럼 단 한 가닥 실올만이 칼에 달려 있었습니다. 이 칼은 유감스럽게도 이 가엾은 자에게 불행을 불러왔었지요. 한 귀부인을 놓고 경쟁을 벌이던 중 궁중의 총애를 받았던 연적의 생명줄을 끊어 버렸던 겁니다. 이 불운의 결투에 대한 책임은 그의 연적에게 전가됐고 아무도 그에게 죄를 묻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군대에서의 그의 출셋길을 막아 버렸지요. 이 사건 이래 그가 어떻게 세상을 살며 자구책을 찾았는지는 기이한 행적으로 남아 있지만, 어쨌든 그는 성공했습니다. 끈질기고 대담하게 요청을 하고 지칠 줄 모르고 편지를 써 보냄으로써, 각종 가문의 문장紋章들을 최고로 완벽하게 수집한 것입니다. 또한 이렇게 수집한 것을 방대한 양으로 모조하고, 입수하지 못할 때는 복사까지 하고 말끔하게 붙이는 법을 터득했지요. 그리고는 이 수집본들을 한 서점상의 중재로 어른들과 아이들의 요구에 맞추어 고액을 받고 팔았지요. 그 밖에 또 다른 그의 취미는 칠면조나 날짐승을 기르고 야생 비둘기들을 도시 위로 날려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이 비둘기들은 몇 마리 새를 끌고 그의 지붕의 비밀 통로로 늘 다시 돌아오곤 했습니다. 이 사업은 인정 많은 하녀 우어줄라가 그에게 주선해 주었지요. 이 장사에 대해서는 아무도 그에게 언급할 수 없었습니다. 그랬다가는 싸움이 일어날 테니까요. 이렇게 번 돈으로 그는 유대인 골목 옆, 도시에서 가장 후미진 구역에다 초라하고 음침한 집 한 채를 구입하고는 경매장에서 온갖 낡은 잡동사니들을 사들였습니다. 이것들로 그는 방들을 꾸몄어요. 그 방들을 나름대로 정돈할 때면 오로지 혼자서 했기 때문에, 그 안이 대체 어떤 모습인지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런 한편 그는 부지런히 교회에 가는 신도였습니다. 그럴 때 그는 굳이 여러 가족 묘지에 새겨진 해묵은 문장들로 장식된 한 벽 앞에 앉곤 했지만, 그러는 것 말고는 설교를 들으러 교회에 오는 여느 신도들과 다름없이 행동했어요. 하지만 예배가 끝나면 어김없이 나이든 귀부인을 방문했습니다. 다른 날에는 그녀의 집 앞에서 쉰 번이나 재채기를 해 대야 하는 슈네베르크산 코담배를 피우며 그녀의 집으로 밀고 들어갈 기세인 우스꽝스럽고 거드름 피우는 팔자걸음, 맵시꾼의 걸음걸이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면 그가 옛날식으로 상의 주머니에 꽂고 있는 칼이 그의 다리 사이에서 흔들거렸지요. 높이 부풀려 올린 머리 모양에 새하얀 분칠, 붉게 칠한 화장, 애교 점까지 붙인 이 늙은 귀부인은 그 불운의 결투 이후 30년이 지나도록 그에게 이렇다 할 응답의 표시를 주지 않은 채, 여전히 그에 대해 소리 없는 힘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거의 매일처럼 운을 정확히 맞추어서 온갖 허구의 상황을 담아 그녀를 향한 노래를 지었어요. 하지만 그녀의 영혼 앞에서 특별한 두려움을 품고 있었던 탓에, 자신의 뮤즈가 토로한 감성을 감히 그녀에게 보이지는 못했습니다. 일요일마다 그녀 주위를 맴돌다 그녀의 커다란 검정 푸들 강아지에 대해 질문하며 강아지 털을 쓰다듬어 주는 것이 간절히 기다렸던 일요일의 소득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그의 행동에 대한 그녀의 답례인 온화한 미소로도 충분한 보상이 되었습니다. 그 누가 그런 것을 보상이라고 여겼을는지는 몰라도 말이지요. 창가에서 꼼짝 않고 그물 뜨개질거리를 보거나 가까운 화장대의 거울을 들여다보는 이 얼굴, 푸른 막대로 새하얗고 붉게 화장한 이 무표정한 얼굴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차라리 기이한 술집 간판 같아 보였지요. 얘기가 나온 김에 말이지만, 지난날 그녀가 시중을 들었고 그녀보다 앞서 고인이 된 두 공주 몫의 은급으로 그녀는 제법 넉넉히 살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은으로 된 화장실化粧室(화장에 필요한 시설과 도구를 갖춘 방)로 궁중 사람들과 사신들의 방문을 받는 것, 그리고 방문 시에 그녀 자신의 아름다움을 유지시킬 온갖 액즙을 바르며 즐기는 것이 의례적인 축제가 되어 버렸고, 동시에 그 일상의 새 소식을 나누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어느 봄 일요일이었어요. 거리에 사람들이 잔뜩 몰려 있어서 어떤 특별한 새로운 사건에 이 귀부인의 이목이 끌리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눈길을 끈 특별한 일의 대상이 이번에는 소위였습니다. 아니 봄 따라 회춘한 그의 외관이었습니다. 양털 대신 깃털을 단 최신 유행의 새 모자, 번쩍이는 검대, 좁아진 옷자락의 새 제복, 짧게 달린 조끼 주머니, 그리고 검정 새 벨벳 바지가 세계사의 새로운 장을 알리고 있었습니다. 소위도 기쁜 얼굴을 하고 곧 방으로 들어왔고 귀부인에게 소식을 전했습니다.

“사랑하는 사촌이여, 조만간 종손께서 온답니다. 모친은 돌아가셨고요. 극심한 열병으로 종손의 건강도 나빠졌는데 어떤 예언력을 지닌 여자 환자가 이곳으로 가라고, 여기서 안정을 찾을 거라고 충고했다는군요. 그 젊은이는 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를 듣고 종가의 저택을 싫어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세요. 그는 전적으로 내 집에 머물고 싶다면서, 방 하나를 안락하게 꾸며 달라고 부탁해 왔어요. 거금을 주겠다고 하면서요. 그런데 내 오두막은 호강에 길든 그런 부자 도련님에게는 어울리지 않아요. 훌륭한 가문인 우리 집안의 사정이 이래요, 유감스럽게도! 고양이의 경우처럼 첫째로 태어난 아들은 배불리 먹이고 나머지 새끼들은 내동댕이친답니다.”

“당신도 지난날 상속을 받을 수도 있었잖아요.”

귀부인이 말했습니다.

“물론이죠.”

그가 대답했습니다. “내가 서른이었고 외삼촌이 예순이었지요. 그런데 외삼촌과 첫 부인의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어요. 그래서 다시 한 번 젊은 여인과 결혼할 생각이 들었답니다. 잘된 일이라고 전 생각했었어요. 젊은 부인은 늙은 남편의 죽음을 재촉할 테니까. 그런데 상황은 더 나쁘게 굴러갔어요. 젊은 부인은 노인이 죽기 직전에 아들을 낳았지요. 이 종손을 말입니다. 난 아무것도 얻은 게 없었지요!”

“이 젊은 종손이 죽게 된다면 당신이 상속인이 되겠군요. 젊은이도 죽을 수 있는 것이고, 늙은이야 당연히 죽은 것이죠.”

귀부인은 태연하게 말했습니다.

“공교롭게도 오늘 신부님도 그런 점에 대해 말씀하셨지요, 설교를 하시면서.”

소위가 대꾸했습니다.

“그럼 찬송가는 무엇을 불렀나요? 우리 집에서 드리는 예배를 위해 알고 싶군요.”

귀부인이 물었습니다. 소위가 찬송가를 펼쳐 주자 귀부인은 조용히 노래를 불렀습니다. 소위는 감탄하여 귀 기울여 들으며 습관적으로 푸들 강아지를 쓰다듬어 주었어요. 소위가 인사를 하고 자리를 뜰 때 귀부인은 어린 사촌이 도착하면 얼른 자신의 집에 데려와 달라고 당부했습니다.

소위가 집에 돌아왔을 때, 창백하고 키가 큰 젊은 남자와 맞닥뜨렸습니다. 젊은이는 지금껏 소위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차림새였어요. 엄격한 격식에 맞추지 않은 헤어스타일은 가히 환상적이었습니다. 가볍고 가느다랗게 말아 올린 피가로식 웨이브는 반원을 그리며 두 귀를 감싸고 흘러내리고 있었어요. 뒤쪽으로는 한 가닥 고수머리로 빗질한 머리칼이 굵직한 카틸론과 잘 어울렸고요. 소위는 화려한 금속 단추가 달린 줄무늬 재킷과 구두의 큼직한 은장식만 보아도 종손의 풍족함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종손도 소위가 모친에게 보낸 편지들로 금방 사촌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소위에게 밤낮을 역마차로 여행해 왔으며, 집이 얼마나 마음에 드는지 뭐라 표현할 길이 없을뿐더러 완전히 자기의 취향에 맞는다는 것, 다만 자신을 위해 마련된 큰 방 옆의 좁은 골목을 내다보는 작은 방도 쓰게 해 달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전혀, 또는 거의 외출을 하지 않아서 좁은 거리의 활기를 특히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말이지요. 소위는 기꺼이 종손에게 유대인 거리와 접한 그 초라한 방을 쓰라고 했고, 햇빛에 바래 흐릿해진 창유리들을 다른 커다란 창으로 바꿀 채비를 했습니다. 하지만 종손은 소리쳤어요.

“고마운 사촌! 이 희뿌연 창유리들은 내게는 대단히 기쁨을 준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여기 한군데 맑은 부분을 통해 그녀가 눈치채지 않게 그녀의 방을 들여다볼 수 있으니까요. 그 표정이나 몸짓이 내 어머니를 연상시키는 소녀랍니다.”

“아니, 이런 일이” 하며 사촌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그 특유의 걸음걸이로 창 쪽으로 어슬렁거리며 다가갔습니다. 그러고는 허겁지겁 한 줌 코담배를 피우고 재채기를 한 뒤 딱 잘라 말했습니다.

“저기 운명이 있군요.”

“나의 운명?”

당황하여 종손이 물었습니다.

“무엇이라고 이름 붙이든.”

사촌이 말을 이었어요. “하여튼 운명이지. 유대인 소녀요. 이름은 에스터. 골목 저 아래에 가게를 하나 가지고 있지. 교육도 받은 소녀라네. 예전에는 큰 말 상인이었던 아버지와 여러 도시를 방문하면서 온갖 지체 높은 분들을 상대했었지. 저 소녀는 여러 나라 말도 구사할 줄 안다네. 저 아이가 이 고장에 올 때마다 볼만한 구경거리였지. 그런데 어린 자식들이 딸린 계모 바스티가 이들 부녀를 헐뜯고 다녔다네. 그렇다고 누구도 그것에 대해 반대의 말을 할 수 없었지. 왜냐고? 그 계모는 타고난 성품으로 괜찮은 고객을 꼬여 아버지에게 조달했으니까. 그러다 끝내는 아버지에게 큰 불행이 닥쳤지. 한 동업자가 그의 재산을 가지고 도망쳐 버린 걸세. 결국 가난뱅이가 된 그는 그 처지를 참을 수 없어 하다 죽음을 맞게 되었지. 그는 첫 결혼에서 태어난 딸 에스터에게 약간의 재산을 남겨 주었네. 계모에게 죽도록 구박을 당하지 않게 하려고 말일세. 그런데 계모 바스티는 그 몫마저 악착같이 챙기려 들고 있지.”

“끔찍스러운 일이로군요.”

종손이 소리쳤어요. “서로 미워하고 증오하는 두 사람이 한 집에 있다니! 나도 창가에서 바스티를 한 번 본 적이 있어요. 심술궂은 인상이었어요!”

“한 집에서 살기는 하지만 각자 자신의 가게와 생활 공간을 가지고 있다네.”

사촌이 대답했습니다.

“조만간 내가 그 소녀한테 뭔가 돈 벌 거리를 마련해 주겠어요. 여기에 유대인이 많이 사는 것 같아요.”

종손이 말했어요.

“유대인만 살고 있지.”

사촌이 외쳤습니다.

“여긴 유대인 거리라네. 유대인들이 개미처럼 우글거리며 몰려 있어. 끊임없이 값을 후려치면서 물건을 팔고 싸움질을 하고 예배 의식을 치르고 하는 일이 벌어지지. 또 한 줌 입에 들어가는 음식을 갖고 늘 번거로운 치다꺼리를 벌이고. 어떤 것은 금지되어 있고, 또 어떤 것은 율법에 쓰여 있고, 또 어떤 것은 익혀 먹으면 안 되고 뭐 그런 식이지. 한마디로 그들에게는 허구한 날 그런 악마의 푸닥거리가 벌어지고 있다네.”

“그렇지 않습니다. 사촌, 당신이 잘못 아는 겁니다.”

종손이 사촌의 손을 잡으며 말했습니다. “파리에서 내가 한 여자 환자 곁에서 본 것을 당신이 보았더라면, 악마를 믿음의 아버지로 여길 수는 없을 겁니다. 아니, 장담컨대 악마는 어디까지나 모든 믿음의 적이랍니다! 신도가 지닌 모든 신앙은 신에게서 나온 겁니다. 그리고 진실한 것입니다. 맹세코 우리가 단지 우스꽝스러운 장식물이라고 보는 이교도의 신들도 고스란히 살아 있답니다. 그 신들은 옛 힘을 발휘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여전히 평범한 인간들보다는 무엇인가 더 큰 작용을 합니다. 그래서 나는 누구에 대해서든 나쁘게 말하고 싶지 않아요. 나는 그 신들을 나의 제2의 눈으로 똑똑히 보았을 뿐만 아니라 이야기까지 나누었어요.”

“빌어먹을! 어안이 벙벙해지는걸.”

사촌이 외쳤어요.

“우리가 그 신을 군주에게 보여 줄 수만 있다면 궁중에서 엄청난 세력을 손에 쥘 수 있겠군.”

“그렇게 간단히 되는 게 아닙니다, 사촌.”

종손이 진지하게 대답했습니다.

“신을 보는 인간은 수년간의 명상을 통해서 자신에게 현시될 영들보다 더 많은 준비를 해야만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양자는 서로를 무서워하게 되고 인간 편에서 견디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내면의 세계까지 들어간 자라도—나처럼 겉보기에는 여전히 살아 있다 해도—정진하는 명상 과정에서 소멸됩니다. 이런 점을 어머니는 나로 인해 알게 되셨지요. 그 때문에 어머니는 돌아가시면서도 내가 무엇이 될지 걱정을 하셨어요. 내가 학업과 내면 성찰에 몰두하는 동안 어머니는 돌아가시기까지 모든 사업을 뛰어난 통찰력을 갖고 정연하게 관리하셨어요. 나는 내 시간을 혼신을 다해 활용하였고 누구 못지않게 노력했으며 소수에게만 주어지는 경지에 도달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내게 닥쳐온 일거리들이 나를 압박했으며, 감당할 수가 없었어요. 미칠 지경으로 정신이 산만해졌지요. 나는 체념하려고 했으며, 한 단계 높은 일을 저속한 일에 희생시키려고 했지요. 이런 고통이 나의 건강을 해쳤어요. 예시력을 지닌 한 여자 환자가 내게 말해 주었어요. 이곳 사촌 곁에서라면 내가 안정을 찾게 될 것이라고요. 당신은 현실적인 삶에 드문 재주를 지녔으며 나의 재산을 당신의 투기 능력으로 서너 갑절로 늘릴 거라고 말입니다. 오, 사촌이여! 돈과 재산의 짐을 나에게서 덜어 주십시오. 당신이 부를 향유하십시오. 저는 조금만 있으면 돼요. 그리고 혹시 내가 세속의 영과 다시 손을 잡는 경우나 아이들이 내 집에 넘쳐나는 경우에, 저의 수입의 절반을 전반적인 관리를 위해 당신에게 맡기겠습니다.”

이렇게 장황한 말을 하는 동안 종손의 눈에서는 두 줄기의 진심에 찬 눈물이 흘렀습니다. 한편 사촌은 종손의 그럴싸한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썹을 치켜세우고 어리둥절한 듯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옆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곧이어 종손은 화제를 돌리려고 말을 이었습니다.

“나의 삶의 세계가 시작되었던 이 도시 안에서 이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일지 벅찬 느낌으로 마차를 타고 큰길을 내려올 때, 나는 무척 초췌한 모습의 사람들이 카페를 향해서 제대로 발걸음을 옮기지조차 못하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그럴 것이, 끝나지 않은 소송들 때문에 평안을 찾지 못한 불행한 영혼들이 그들의 옷자락을 뒤에서 와락 잡아당기면서 그들에게 처참한 상상을 뒤따라 안겨 주었기 때문이지요. 그 영혼의 무리 중에서 나의 아버지도 보았습니다. 한 파산 소송을 끝맺지 못했기 때문이랍니다. 당신이 아버지의 영혼을 평온하게 해 주세요. 나는 너무 힘이 없어요.”

“실상…….”

사촌이 외쳤습니다.

“일요일마다 대법정의 고문관과 서기, 그리고 회계사들이 부인과 아이들을 거느리고 정원이 있는 카페로 가려고 성문 쪽으로 나가는 거라네.”

“마부도 그들의 옷자락에 매달려 있는 것은 아이들이라고 그랬어요.”

종손이 말을 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렇게 처참한 얼굴을 하고 있진 않지요. 그것은 그들의 태만 때문에 그들을 에워싼 악령들이랍니다. 사촌! 사촌에게 외삼촌이기도 한 내 부친의 불쌍한 영혼을 편안히 쉬게 해 주십시오.”

사촌은 겁에 질려 침침한 방을 둘러보았습니다. 마치 혼령들이 코담배 연기처럼 공중에 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곧이어 외쳤어요.

“자네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하겠네. 그런 일거리가 없으면 난 불행하다네. 소송 사건이 내겐 연애 사건보다 더 좋아. 그리고 자네의 사건들은 곧 해결될 걸세. 나의 문장 수집처럼.”

이렇게 말하며 그는 종손을 문간방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러면서 말끔하게 왁스칠이 된 자신의 서랍 상자들을 구경시켜 주면 종손이 마음을 딴 데로 돌리고 가다듬지 않을까 희망했어요. 상자 안에는 휘황찬란한 문장들이 들어 있었는데, 그중에는 적색 진사로 찍혀 있고 프락투어 고문자로 이름이 새겨진 것들도 있었습니다. 종손은 다른 분야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이 분야에도 해박한 것 같았습니다. 사촌은 그의 한마디 한마디 촌평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지요. 그런데 사촌이 프랑스 문장들이 들어 있는 서랍을 열자 종손은 흥분해서 소리쳤습니다.

“맙소사! 이 무슨 소란이람! 늙은 기사들이 자신의 투구를 찾는 꼴이로군요. 투구들은 그들에게 너무 작아졌고, 문장들은 좀이 쏠았어요. 방패가 녹이 슬어 구멍이 났단 말입니다. 폭삭 내려앉아요. 참을 수가 없어요. 어지러워요. 이 처참한 꼴을 내 가슴은 견딜 수가 없어요.”

사촌은 그 불운의 서랍장을 밀쳐 내고 종손이 숨을 돌리게 하려고 창가로 데리고 갔습니다.

“누가 떠나가는 거지요?”

종손이 소리쳤어요.

“주검이 마부석에 앉아 있고, 배고픔과 고통이 말들 사이에 있어요. 외팔에다 외다리인 혼령들이 마차 주위를 떠돌면서, 카니발의 들뜬 기분으로 혼령들을 바라보는 잔혹한 자에게 팔과 다리를 달라고 하고 있고요. 잔혹한 자를 고발한 무리들이 고함을 치며 그를 뒤쫓습니다. 그들은 때 이르게 세상에서 쫓겨난 영혼들입니다. 사촌! 여기 어디 경찰이 없나요?”

“자네의 맥박을 짚을 사람을 부르겠네.”

사촌이 대꾸했습니다. “이곳의 가장 뛰어난 외과 의사라네. 자네는 일인용 의자의 좁다란 마차를 타고 있던 그 사람을 알아볼 걸세. 마부는 물론 비쩍 말랐고 말들은 마차를 끄느라 지쳐 있지만, 참새들이 마차 주변을 에워싸고 날고 있고 골목의 개들이 마차를 뒤따라가며 짖어 대지.”

“안 돼요.”

종손이 대답했어요.

“의사는 절대 부르지 마세요! 그자들은 항상 들쑥날쑥 뛰다가 소리 없이 멎는 나의 맥박을 짚어 보고 나서는 십중팔구 내가 이미 죽었다고 소리를 지를 겁니다. 그리고 결론적으론 그들의 말이 맞아요. 왜냐하면 역시 앓고 있는 선한 영혼의 이성만이 나를 지탱시키고 있으니까요. 그건 그렇고, 사촌, 내가 이번에는 뜬금없이 당신을 놀라게 했군요. 다만 프랑스 귀족이 처한 위험을 말한 것입니다. 나는 프랑스가 낡은 성들에서 혼령들로 인해 혼란을 겪고 있으리라고 망상했답니다. 당신의 수집품에는 혼령이 없어요. 나는 내가 진리의 눈으로 보아야 할 것과 나 자신 구상해 내는 것을 엄밀히 구분할 수 있어요. 진실로 나는 나 자신에 대한 훌륭한 관찰자랍니다. 그리고 심령 과학은 예로부터 내가 좋아하는 연구 분야였어요.”

이런 심령 과학과는 아무런 연관도 갖고 싶지 않았던 소위는 집 안을 설명하는 것으로 말꼬리를 돌렸습니다. 종손은 하인은 별로 필요 없고 단지 최소한의 환경만으로 견딜 수 있다고, 그래서 손수 머리 손질도 하고 수염도 깎을 것이니 모든 하인들을 내보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 집 하녀는…….”

종손이 말했습니다. “숭고한 영혼입니다. 머리에 후광을 두르고 있는 것이 당연하지요.”

“후광이라니! 그건 머리에 둘러 묶은 흰색 수건일 뿐이야.”

사촌이 투덜대며 말하고는 이어서 목청을 높였습니다. “하느님께서 하잘것없는 것에서 성녀를 조각해 내려 드신다면야!”

그리고 종손은, 자신은 대개 낮에 잠을 자고 해가 떨어져야 침대에서 나와 자신의 조용한 작업을 이행한다고 덧붙였습니다. 그러자 사촌은 몰래 중얼거렸어요.

“머릿속의 도깨비가 그렇게 해서 생기는구먼. 부엉이처럼 살아서.”

저녁 식사 후 사촌은 밤 인사를 하고 물러났습니다. 하녀도 잠자리에 들었어요. 그런 한편 종손은 자기의 큰방을 밀랍 양초로 낮처럼 환하게 밝혀 놓고 서성대면서 책과 필사본들을 느긋하게 뒤적이고 자신의 일생의 중요 과제인 일기 쓰기를 했습니다. 이렇게 켜진 양초의 환한 불빛은 이웃에게는 새로운 현상, 즉 종손이 그들에게 마련해 준 최초의 불안한 현상이었습니다. 절약하며 사는 소위의 성품으로 보아 그곳에 화재가 난 것이라고 추측할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이웃들은 집 앞으로 모여들었고, 열린 창으로 플루트의 구슬픈 가락이 울려 퍼지는 것을 듣고 나서는 다시 안심을 하고 거리의 지저분한 것을 밝혀 주는 불빛을 반가워했습니다. 플루트 연주자는 종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연주는 본래 에스터만을 위한 것이었어요. 그는 바로 이웃한 방의 어두운 창가에서 그녀가 옷을 벗어 던지고 사랑스런 잠옷 차림으로 우아한 화장대 앞에 앉아 머리를 땋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답니다. 그 골목의 촘촘하게 세워진 건축물들은 방 안 공간을 조금이라도 늘리려고 집집마다 들보를 살짝씩 돌출시켜 놓았지요. 그 덕분에 종손이 한 번 펄쩍 뛰면 그녀의 방으로 날아들 만큼 두 사람의 창문은 바싹 붙어 있었어요. 하지만 뛰어넘는 것이 그에게는 중요하지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는 상당한 거리에서 나는 소리도 들을 수 있는 유난히 섬세한 자신의 청력을 동원했어요. 맨 처음 그에게 들린 것은 쾅 하는 소리, 아니면 그 비슷하게 뭔가 부딪치는 소리였어요. 그때 에스터는 벌떡 일어나 한 편의 이탈리아 시를 온갖 감정을 담아 읽었습니다. 화장대에서 사랑의 신들이 봉사하는 모습을 그린 시였지요. 그러자 곧 보드라운 날개를 단 수많은 사랑의 신들이 방 안에 활기를 채우는 광경을 그는 보았습니다. 사랑의 신들은 에스터에게 머리빗과 머리띠를 주고, 앙증스러운 물병도 건네주었어요. 또 던져진 옷가지를 정돈했고요. 에스터의 손짓에 따라 모든 일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지만 곧이어 그녀가 침대에 들자, 사랑의 신들은 요술을 부릴 때 그려지는 둥근 테처럼 그녀의 머리를 에워싸고 맴돌다가 점점 희미하게 빛이 바래더니 꺼져 가는 침실 등불 속의 연기 속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대신에 등불의 연기 속에서 그의 어머니의 모습이 나타나더니, 에스터의 이마에서 날개 달린 한 작은 빛의 형체를 들어 올려 품에 안았지요(아기가 어머니의 옷자락에서 잠을 청하는 밤의 영상처럼). 그리고 어머니는 그 빛의 형체를 안고 한밤중까지 방 안에서 요람을 흔들듯 아래위로 둥실 떠다녔습니다. 마치 아기에게서 불안한 꿈을 몰아내려는 듯. 그러나 곧이어 어머니는 아찔하게 깊은 골목길을 훌쩍 넘어, 그녀가 안고 있던 빛의 형체 안에서 환한 후광에 싸인 에스터의 모습을 확연히 알아보고 감탄스럽게 바라보던 종손의 눈앞으로 바싹 그 형체를 끌고 왔어요. 하지만 그녀의 그 모습은 경악의 비명 소리와 함께 홀연히 흩어져 버렸지요. 그도 그럴 것이, 이 비명 소리와 함께 그는 한 단계 높은 영적인 상태, 즉 껍질 속 알맹이에서 돌아가 주저앉아 버렸고, 그 어떤 염원도 그에게 그 같은 축복에 찬 광경을 되돌려 주지 않았으니까요. 침대에 누워 있는 에스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방은 어두웠어요. 쥐들이 하수 도랑의 다리 밑에서 먹이 사냥을 하는 소리만 요란할 뿐 골목에는 정적이 감돌았습니다. 그 밖에는 털모자를 추켜 쓴 늙은 계모 바스티가 창밖으로 기침을 해 대다가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는데, 그때 웬 황소가 가까이에서 요란하게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집 안에서 종손은 황소 울음이 들리는 쪽으로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뒤쪽 창문을 통해 엄청나게 덩치가 큰 황소 한 마리가 묘석들이 박혀 있고 울타리가 쳐진 초록빛 풀밭에서 떠오르는 달빛을 받으며 한 묘비를 파헤치고 있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그런 한편에서 숫염소 두 마리가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공중제비를 넘으며 황소의 존재를 괴상야릇하게 여기는 것 같았어요. 순간 종손은 이성을 잃었습니다. 신성한 묘지에서 벌어지는 이런 어이없는 소동에 잔뜩 화가 나서 하녀의 방문을 두드렸습니다. 하녀는 곧 문을 열고 무엇이 필요한지를 물었어요.

“아니, 아무것도 필요 없소.”

그가 대답했지요.

“그런데 이 도깨비놀음은 대체 뭔가?”

하녀는 창가로 가서 살펴보고 말했습니다.

“제 눈에는 유대인의 종손들 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요. 저것은 그들이 율법에 따라 신에게 바치는 첫 번째로 태어난 짐승들이지요. 그 짐승들은 여기서 충분히 잘 길러지고 있답니다. 종손들이 할 일은 없고요. 그렇지만 누구든 기독교인이 저 짐승들을 때려죽인다면 유대인들에게는 좋은 일을 하는 거예요. 그들의 지출을 줄여 줄 테니까요.”

“불쌍한 종손들” 하고 속으로 한숨을 쉬며 그는 물었습니다.

“그런데 왜 저놈들은 밤에 조용히 쉬지 못하는 건가?”

“저들 짐승들이 밤중에 무덤을 파헤치면 혈통 중의 누구인가가 죽어 가고 있는 거라고 유대인들은 말해요.”

여인이 대답했습니다.

“저놈이 파헤치는 무덤에는 에스터의 부친이 묻혀 있지요. 그분은 말을 팔던 대상인이었답니다.”

“오, 안 돼” 하고 종손은 외치고는 침울한 기분으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고, 다시 열정적으로 플루트를 불며 울적한 기분을 풀려고 했습니다.

드디어 날이 밝았습니다. 청명한 하늘 아래로 집들의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습니다. 소녀들이 이날만은 깨끗한 신발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듯 마른 디딤돌만을 골라 팔짝거리며 뛰어다녔어요. 그런가 하면 제비들은 어제 내린 비가 장만해 준 그럴싸한 진흙 반죽이 있는 곳으로 다투어 날아가 그것으로 사람이 사는 건물의 여기저기 틈새를 메우고 있었어요. 에스터의 방을 향한 창가에도 오늘은 두 마리 잿빛 제비가 지저귀면서 유일하게 깨끗한 창유리를 통해 그가 에스터를 보는 바로 그 지점에다 둥지를 틀려 하고 있었어요. 그때 종손은 망설이며 서 있었습니다. 그놈들을 방해해야 할지, 그가 보기에 꽤나 의미심장해 보이는 그 모든 일을 두고 보며 기다려야 할지. 그의 육감은 기다리는 쪽으로 무게가 기울었습니다. 그의 시야에서 에스터는 가려졌고, 이제 그는 즐겁고 부지런하게 집을 짓는 제비들의 귀여운 모습을 줄곧 바라볼 수가 없었습니다. 마치 그 자신이 그곳에서 집을 짓는 것 같은, 잠자리에 들기 전에 제비들이 집을 완성하는 것에 자신의 행운이 달려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그래서 만돌린에 맞추어 노래를 불렀습니다.


햇빛이 벽에 비치는데

제비가 벽에다 집을 짓네.

오, 햇빛이여, 오늘은 멈추어 서렴,

제비가 집을 온전히 지을 수 있도록.

제비의 보금자리는 수없이 부서졌지,

미처 완성되기도 전에.

그래도 제비는 홀린 듯이 집을 짓고 있네.

햇빛은 눈부시게 빛나고 있네!

여기에다 집을 짓는 그 마음은

어리석으면서 애틋하구나.

드높이 비상하는 중에는

멀리 허공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무것도 아닌 법

그것은 이미 사라져 버린 것이니

그것은 지금의 시대에 맞지 않는다네.

이 시대의 즐거움과는

천차만별의 것이라네.


저녁 무렵, 종손이 깨어났을 때 벌써 훌륭한 저녁 식사를 가지고 사촌이 그의 방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또한 그는 사촌이 베풀어 준 뜻밖의 배려에 대해 이야기했어요. 그러자 사촌은 골목을 내다볼 수 있는 옆방으로 그를 안내했어요. 그곳에는 소파와 의자들, 옷장과 책상이 들어와 있었고, 창문도 깨끗이 닦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비들은 보이지 않았어요. ‘내 착한 수호천사들이 쫓겨났군’ 하고 종손은 생각했어요. ‘내 죽음의 천사를 봐야 하는데…… 나를 괴롭혔던 그 모든 꿈을 겪어야만 하는 건데…… 내가 그 꿈에서 보았던 것 중의 한 가지가 벌써 실현되었으니까 말이야.’

“아니, 왜 그리 슬퍼 보이나, 자네?”

소위가 물었습니다.

“편안하게 자지 못했어요.”

종손이 말했어요. “에스터 꿈을 꾸었지요. 그녀가 나의 죽음의 천사로 나오더라고요. 말도 안 되는 개꿈이겠죠! 에스터는 수많은 눈이 달린 옷을 입고 나에게 고통의 잔을 주었어요. 죽음의 잔을 말입니다. 그리고 난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마셔 버렸어요!”

“자면서 갈증이 났던 모양일세.”

소위가 말했습니다. “이리 와서 앉아 식사를 하지. 좋은 포도주가 있네. 진짜 웅거산이지. 건포도와 흑빵으로 내가 직접 빚은 걸세. 아 참! 자네가 조만간 노 귀부인을 한번 방문해야겠네. 자네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오라고 하는 통에 오늘 죽도록 시달렸지. 그 부인은 자네 부모님의 친구 분일 걸세.”

“그러려면 하루 낮을 잡아야 해요. 그런데 난 낮 동안 자는 것이 더 좋거든요.”

종손이 대답했어요. “그 일은 그만두세요. 방을 꾸며 줘서 고맙습니다! 한 가지 더 사고 싶은 게 있는데, 창에 칠 비단 커튼입니다. 창유리를 너무 깨끗이 닦아 놓으셨더군요. 그래서 골목을 내다볼 때 나를 숨길 수가 없네요.”

“그건 저 골목 아래 아름다운 에스터의 상점에서 살 수 있네.”

사촌이 말했습니다.

“그럼 창유리를 통해서보다는 훨씬 가까이서 그녀에게 자네를 소개할 수 있지. 우리네 종손들은 모조리 사랑에 빠지는 집단이었지. 오, 자네도 예외일 리가 없네! 물건을 속아 사지 않도록, 또 그 처녀가 쌀쌀맞게 구는 경우 자네가 당황하지 않게 내가 동행을 하도록 하지.”

그리하여 종손은 소위에게 이끌려 골목으로 들어섰습니다. 뒤따르던 종손은 구경꾼으로부터 몸을 감출 길이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높은 목조 건물들이 마치 마분지 조각을 짜 맞추어 놓은 것처럼 여겨졌어요. 사람들은 어린아이들의 장난감처럼 실에 매달려 있는 것 같았고 거대한 태양의 궤도가 돌아가며 시키는 대로 움직이고 있었어요. 그들은 상점 문을 닫기 시작했습니다. 청소를 하고 하루의 매상을 계산하고 있었어요. 그런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종손은 제대로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여기, 여기일세!”

소위가 불렀습니다. 종손은 막 한 상점 안으로 들어가려는 참이었는데, 상점 안에는 에스터가 아니라 한 심술 맞게 생긴 유대인 여인이 있었어요. 독수리 같은 코에다 석류석처럼 번득이는 눈, 그을린 거위 가슴 같은 피부, 시장처럼 불쑥 나온 배를 가진 여인이었어요. 그녀는 어느새 상품을 추천하면서, 자신이 그의 방을 직접 봐야 하는지를 물었습니다.

“손님께서 단 한 치도 사시지 않더라도 최상품을 보여 드리지요. 지체 높은 양반이시잖아요!”

종손이 막 상점 안으로 발을 들여놓으려는데, 소위가 그의 윗옷 자락을 잡아끌며 소곤거렸습니다.

“예쁜 에스터는 다른 상점에 있네!”

그러자 종손은 몸을 돌리고 어색해하며, 뭘 사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다만 구석에 희극 포스터가 있는지 살펴보았을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에스터가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옆 상점으로 몸을 돌렸어요. 그러나 유대인 노파는 그를 놓치지 않으려고 열심히 소리를 질러 댔습니다.

“젊은 양반! 여기 우리 가게에도 포스터가 있어요. 아마 한 장은 있을 거예요! 들어와 보세요. 에스파냐 기사의 포스터도 있다고요!”

이 바람에 종손은 정신이 헷갈려 뒤를 돌아보았지요. 하지만 유대 노파의 머리 위에 까만 까마귀가 한 마리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멈칫거렸어요. 이러는 사이 소위는 벌써 에스터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그녀는 성가시게 하려는 기색 없이 답변을 해 주었습니다. 소위가 종손을 에스터의 가게로 끌고 들어가자, 유대 노파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끔찍스럽게 꽥꽥대는 비명 소리가 그의 뒤통수에서 맴돌았습니다. 반쯤은 히브리어 욕지거리로, 상스럽기 짝이 없는 유대 사투리로 노파는 가엾은 딸을 향해, 방정치 못하게 꼬리를 치면서 기독교인들을 자기 가게로 꼬여 가서 어머니인 자신의 돈벌이를 가로채고 있다고 비난을 퍼부으면서, 있을 수 있는 모든 고통을 당하라고 저주했습니다. 마침내 따스한 날씨인데도 겨울철처럼 김을 내뿜으며 격분하던 여인의 거친 숨결이 잦아들었어요. 그러고 나자 이번에는 지나가는 어린 사내 녀석 몇 명에게 과자를 주겠노라 약속하고 그 대신 욕을 퍼붓는 일을 도와달라고 부추겼지만 헛수고였습니다. 에스터는 창피해서 얼굴이 상기되었지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어요. 마침내 그녀의 가게에 손님이 오자 노파는 서둘러 가 버렸습니다. 종손은 머리 위에 까마귀를 앉힌 험상궂은 노파가 누구인지 물었습니다.

“저의 계모입니다.”

에스터가 대답했습니다. “선생께서는 아마도 뾰족하게 길게 올려 쓴 검정 스카프를 까마귀로 착각하셨나 보군요.”

에스터의 목소리를 가까이서 듣고 나서야 비로소 그는 그 울림이 친숙하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창을 통해 들었을 때보다 한결 그의 어머니와 닮았다는 생각이 몰려왔어요. 에스터는 그의 어머니만큼 생기에 넘쳐 있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젊은 나이였지요. 안쓰러운 창백한 기운이 으스스한 봄 안개처럼 그녀의 고운 얼굴, 심지어는 예쁜 윤곽의 입술에도 뒤덮여 있었습니다. 그녀의 두 눈 역시 빛을 이기지 못하는 것 같았으며, 해 질 녘 꽃잎들이 꽃받침을 싸고 오므라들듯이 자신도 모르게 가느스름하게 뜨고 있었지요. 그녀가 황급하게 비단 천을 펴 보이는 사이에 소위는 계모가 곧 죽을 것이라며 희망을 장담하는 식으로 얼토당토않게 그녀를 위로하려 들었어요.

“어머니가 오래 살길 바라요.”

착한 에스터가 대답했습니다. “돌보아야 할 아이들이 있거든요. 죽음의 천사의 쓴잔을 누가 먼저 맛볼지 누가 알겠어요! 오늘 신경을 너무 써서인지 피곤하군요.”

종손은 죽음의 천사가 날아가는 것뿐 아니라 날갯짓을 치는 소리까지 들린다고 말했어요.

“날갯짓을 치는 소리가 참 대단하군요!”

그러나 에스터는 뒷문으로 가서 문을 닫고는 바람이 세차게 들어오게 두어서 죄송하다고 말했어요. 남동생이 뒷문을 열어 놓았다고 변명하면서요.

종손은 비단 천을 고르며 재고품 중에 또 다른 색상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에스터는 곧장 어머니의 상점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먹구름이 한숨에 걷힌 것 같은 환한 얼굴로 에스터의 계모가 종손이 찾던 천을 들고 왔어요. 소위는 값을 많이 깎으려고 들었지만 종손은 요구한 대로 돈을 치렀습니다. 어머니가 부른 값이 너무 지나치다면서 에스터는 은화 몇 닢을 종손에게 되돌려주었어요. 그러자 계모는 다시 호통을 치기 시작했는데, 이번에는 히브리어로만 떠들었습니다. 에스터가 이번에도 지그시 참으며 눈을 감자, 소위가 히브리어로 대꾸했습니다. 그러자 노파는 흔하지 않은 그의 언어 능력에 혼비백산하여 뛰쳐나가 달팽이처럼 그녀의 가게로 움츠리며 들어가 버렸습니다. 이 일에 대해 에스터는 참고 욕설을 듣는 편보다 더 마음의 상처를 입은 듯했어요. 그래서 종손은 에스터를 배려하여, 승리의 환호성을 지르려는 사촌을 잡아끄는 동시에 비단 천을 손수 다른 팔에 끼고 나왔습니다.

집으로 돌아와서 종손이 소위에게 어디서 히브리어를 배웠는지 묻자 그가 대답했습니다.

“유대인들과 교제하기 위해서는 히브리어가 필요했다네. 그러느라 지불한 책값이며 수업료는 충분히 거둬들인 셈이지. 이제는 그들의 모든 비밀을 이해할 수 있으니까. 여보게, 책장에는 유대인의 설화집, 그들의 관습과 전통에 관한 책자들이 잔뜩 있네. 그 늙은 계모가 마지막에 무어라고 했는지 아나? 에스터가 죽으면 좋겠다고 했네. 그러면 실속 있는 흥정을 붙일 수 있을 테니까! 실제로 에스터는 부친의 유산으로 온갖 고급 가구들을 장만했다네. 그리고 사람들 말로는, 부친의 생존 시처럼 훌륭한 신사들이 그녀를 방문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그녀는 저녁마다 혼자서 화려하게 치장을 하고 마치 파티를 열듯이 차를 끓여 놓고 온갖 나라 말로 얘기를 한다네.”

그러나 종손은 모든 정신이 설화집에 쏠려 있었기에 건성으로 들었습니다. 소위가 잘 자라는 인사를 하고 방을 나가자마자 종손은 해묵은 책들을 읽어 내려갔습니다. 그러자 모든 대주교, 예언자, 랍비 그리고 그들의 기이한 행적들이 설화집에서 빠져나와 방에 나타났습니다. 그 엄청난 수에 방이 비좁아 보였어요. 그리고 결국은 죽음의 천사가 그들 모두를 날개에 싣고 가 버렸습니다. 이 죽음의 천사 이야기야말로 아무리 읽고 또 읽어도 싫증이 나지 않았어요.

“릴리스는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함께 창조된 여인이다. 그러나 아담은 너무 수줍음을 많이 탔고 릴리스는 너무나 청순하여 그들은 서로에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못했다. 그러자 생명 창조의 욕구에 쫓기던 하느님께서는 아담의 갈비뼈를 떼어 한 여인을 창조하여 아담에게 주었다. 아담이 꿈에서 보았던 여인과 닮은 여인이었다. 이 첫사랑을 나누어 가져야 하는 여인의 탄생에 마음을 다친 릴리스는 아담에게서 도망쳐 최초의 인간들이 원죄를 저지른 후 죽음의 천사 일을 떠맡았다. 에덴동산의 아이들이 탄생하자마자 죽음으로 위협하며, 그녀의 칼에서 떨어지는 쓰디쓴 방울들을 아이들의 입 속으로 떨어뜨릴 수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아이들의 주변에서 기회를 엿본다. 쓰디쓴 방울이 죽음을 불러온다. 또한 죽음을 불러오는 그 물에다 죽음의 천사는 칼을 씻는다.”

이 구절을 읽으며 종손은 불안하게 방 안을 서성거리다가 힘주어 말했습니다.

“모든 인간은 세상을 시작하고 세상을 끝낸다. 나도 경외심을 갖고 한 순결한 릴리스를 사랑했었지. 바로 나의 어머니였어. 어머니의 완전무결한 사랑 속에 내 젊은 날의 행복이 머무르고 있다. 에스터는 나의 이브야. 어머니에게서 나를 끌어내어 죽음에게 넘겨 주는 거야.”

등 뒤에서 도사리고 있는 것만 같은 죽음의 천사의 두 눈빛을 그는 견딜 수가 없어서, 한낮의 여운을 즐기며 기분을 풀려고 외투를 둘러 입고 서둘러 거리로 나갔습니다. 마침내 지치고 힘들어지자 한 고가古家의 오목한 벽에 세워진 조각상 발판 뒤에 걸터앉았습니다. 그리고 한 마차 앞을 달리며 횃불로 밝혀 주는 사람들을 바라보았습니다. 릴리스가 마차 뒤를 따르고 있었고요. 환호성을 치는 젊은이들이 시끌벅적 술집에서 나와 집으로 향하면서 여전히 손톱으로 현을 뜯었고, 그 소리는 한참 동안 울려 퍼졌습니다. 이들 또한 죽음의 천사가 뒤쫓고 있었는데, 야경꾼의 나팔을 불고 있었어요. 죽음의 천사는 그의 눈앞에서 수없이 불어나면서 어울려 등장했고 연인들처럼 정다운 이야기를 나누며 나란히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그는 에스터에게 자신의 사랑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알아내고 싶은 듯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이들 연인들의 이야기는 장사꾼들에게 밀려나 버려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늙은 랍비와 함께 지나가던 바스티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제가 에스터를 어떻게 돌보아야 한다는 말씀인가요? 그 아이는 어쨌든 제 남편의 자식이 아니라 입양된 기독교도의 자식이랍니다. 제 남편은 자기 재산 대부분을 그 아이에게 다 써 버렸고요.”

“안심하십시오.”

랍비가 말했습니다. “남편이 아이와 함께 얼마나 많은 돈을 받았는지 알기나 하시오? 그게 전부였단 말입니다. 그 사람은 무일푼이었고, 그렇게 받은 돈을 몽땅 큰 장사에 투자할 수 있었지요. 남편이 돈을 날린 것이 그 아이의 책임이란 말이오?”

들을 수 있는 거리를 벗어나 버려 그가 쫑긋 귀를 세웠어도 더 이상 그들의 대화를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종손이 황급히 뒤따라갔지만 그들은 이미 어느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어요. 늘 그랬던 것처럼 그는 이번에도 너무 늦게 결단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그런 상황이 가리키는 암시가 이상하게 의미심장하게 여겨져서 생각에 잠겨 집으로 향했지요.

휴식을 취한 지 채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총성 같은 것이 들렸습니다. 창밖을 내다보았지만 누구도 그 소리를 들은 것 같지 않았어요. 마음이 놓인 그는 창가에서 늘 바라보던 자리로 가서, 아름다운 에스터의 방을 전날 밤보다 더 자세히 보려고 용기를 내어 창문 한 짝을 열어젖혔습니다. 그녀의 방은 많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원래 덮개가 벗겨지고 하얀 공단 천을 씌운 의자들이 화려한 찻상 주위에서 환하게 빛나고 있었고, 찻상 위에서 은주전자가 김을 내뿜고 있었습니다. 에스터는 뜨겁게 달구어진 삽에 향내 나는 물을 붓고 허공에 대고 말했습니다.

“나니, 머리를 곱슬하게 손질해야 할 시간이야. 손님들이 곧 도착할 거야.”

그러고 나서 에스터는 목소리를 바꾸어 대꾸했어요.

“아가씨! 모든 것이 다 준비되었어요.”

이 말을 하는 순간 귀여운 시녀가 에스터 앞에 나타나더니 그녀의 곱슬머리를 풀어 매만져 주고는 거울을 건네주었습니다. 그러자 에스터는 곱슬머리를 한탄했어요.

“세상에! 내 얼굴이 왜 이렇게 창백하담, 죽은 것도 아닌데. 대체 어떻게 이렇게 핏기가 없을 수가 있지? 화장을 하라고? 안 돼! 그러면 종손의 마음에 들지 않을 거야. 그분도 창백하거든, 나처럼. 나처럼 선량하고, 나처럼 불행하시지. 그분이 오늘 오신다면 좋을 텐데. 그분이 없는 파티는 즐겁지가 않아.”

이제 방 안의 모든 것이 정돈이 되었습니다. 우아하게 치장한 에스터는 소파 위에 예쁘게 장정된 영어책을 몇 권 올려놓았어요. 그러고는 역시 영어로 최초의 허공의 존재를 환영하며 자신의 아마추어 희극에 등장시켰습니다. 그녀가 그 존재 대신에 영어로 답변을 채 마치기도 전에 침울한 표정의 꺽다리 영국 신사가 예절 바른 태도로 그녀 앞에 서 있었어요. 당시 그녀가 유럽의 모든 나라 사람들 앞에서 보였던 예의범절이었답니다. 프랑스인들, 폴란드인들, 이탈리아인들, 또한 칸트학파의 한 철학자, 말 상인이 된 한 독일 영주, 또 한 사람의 젊은 계몽주의 신학자, 그리고 여행 중인 몇 명의 귀족들과 같은 허공의 영상들로 찻상은 혼잡해졌습니다. 에스터는 온갖 나라의 언어들 사이를 끊임없이 누비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프랑스에 관한 일련의 사건들을 주제로 언쟁이 터져 분위기가 무거워졌어요. 칸트주의자는 실례를 들어 논증을 펼쳤지만 프랑스인은 격분했어요. 에스터는 논쟁을 벌이는 두 사람을 재치 있게 떼어 놓으려고 애를 썼어요. 그러다가 마침내 좌중의 관심을 딴 데로 돌리려고 일부러 부딪친 것처럼 굴면서 뜨거운 찻잔을 칸트주의자의 바지에 엎질렀습니다. 그 일은 성공적이었어요. 사과를 했고, 바지를 닦아 주었어요. 그러고 나서 그녀는 종손의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고 확언하고, 그녀 자신도 이제 비로소 알게 되는 새로운 손님으로서 바로 얼마 전에 프랑스를 떠나 온 훌륭한 젊은이인데 그 사람이 문제의 논쟁에 대해 가장 적절한 답변을 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하는 동안 한 차가운 손이 종손을 부여잡았습니다. 그 자신이 등장하는 장면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그건 마치 뒤집혀 끌어내려진 장갑처럼 그 자신이 홀랑 뒤집히는 느낌이었어요. 그러고 나서 에스터가 내민 의자 위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적이 마음이 놓였습니다. 그러나 그 우아한 모임의 다른 손님들에게는 그의 출현이 섬뜩했던 모양이었어요. 에스터가 그에게 소곤거리는 동안 그들은 차례차례 작별을 고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모두가 떠나자, 에스터가 빈 의자를 향해 큰 소리로 말했어요.

“당신은 겉으로 보이는 내가, 내가 아니라고 딱 잘라서 말했지요. 겉으로 보이는 당신도 당신이 아니에요.”

곧이어 에스터는 대화 상대인 종손의 입장에서 답변을 했습니다. 그 음성이 얼마나 자신의 것과 똑같은지 당사자인 종손이 놀랄 지경이었어요.

“내가 해명을 하겠소. 당신은 세상 사람들이 당신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의 딸이 아니라오. 당신은 유괴된 기독교인의 자식이지요. 당신의 진짜 부모에게서, 당신의 참된 신앙에서 빼앗겼다는 말이오. 그리고 당신을 참된 신앙으로 되돌려야겠다는 나의 결단이 당신을 방문하게 만들었소. 나에게 좀 더 상세히 설명해 보세요.”

(에스터:) “그렇게 하지요. 나는 당신이고 당신은 저입니다. 그렇지만 이 일이 제자리로 돌아간다 해도, 그로 인해 제가 거기서 얻게 될 것이 있을 것 같지는 않군요. 당신은 엄청나게 많은 것을 잃게 될 거고요. 단지 징글맞은 빨간 코의 사촌만이 현기증이 일 정도로 높이 신분이 상승될 거예요.”

에스터는 입을 다물었습니다. 그러고는 이번에는 종손의 음성으로, 말을 계속해 달라고 스스로에게 간청했어요. 왜냐하면 사랑하는 어머니와 그녀가 닮은 비밀이 이제 반밖에 벗겨지지 않았으니까요. 에스터는 다시 말을 이었어요.

“자신의 사촌인 소위로 인해 수없이 마음의 상처를 입었던 선대의 종손께서 자신의 친아들에게 소중한 재산을 물려주고 싶어 하는 집념이 당신에게는 그렇게 불가사의한가요? 아내가 출산을 앞두고 있어서 그 같은 희망의 실현이 눈앞에 다가왔는데, 딸을 낳으면 만사가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우려가 그를 괴롭혔다고 상상해 보세요. 그래서 그가 수차례 입 밖에 내었던 그 우려스러운 상황을 한 교활한 귀부인이 이용하려 들었다면? 그녀는 자신이 일주일 전에 비밀리에 낳은 사내아이를 그에게 팔아넘기려고 감언이설로 꼬드깁니다. 그 판에 우려되었던 상황이 막상 현실로 들어선다면, 그런 식으로 자주 매수되었던 산파 한 사람 이상으로 뭐가 필요하겠어요? 그래서 아들 대신 내가 태어나는 것이고요. 나는 한 충실한 유대인에게 넘겨집니다. 그 유대인은 그 일을 통해 사례금 이외에도 자신의 종교에도 뭔가 기여하려고 희망합니다. 『현자 나탄』을 읽으셨나요?”

(종손:) “아뇨!”

(에스터:) “괜찮아요. 당신은 어머니의 젖을 먹습니다. 꾀꼬리가 뻐꾸기 알에서 부화되듯이. 그건 당연한 일이에요. 악의로 한 말은 아니에요. 제가 이 모든 일을 알게 된 것은 저의 양아버지가 임종 시에 해 주신 얘기 덕분이에요. 게다가 아버지는 자신이 내게 물려주는 재산이 종가의 재단에 요구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액수라고 강조했어요. 비밀을 지키는 대가로 아버지는 선친 종손으로부터 실히 세 갑절이나 되는 큰돈을 받았으며, 그것이 아버지가 큰 사업을 벌일 투자금이 되었노라고. 말문이 막히시나 보군요. 어째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시겠어요? 단지 자신의 명망만을 유지하려는 남성이라는 족속의 허영심이 저주스러우세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이미 당신이 그렇게 한 것처럼 가소로운 늙은 사촌더러 당신의 재산을 누리라고 하세요. 저의 길은 곧 끝날 거예요. 전 상황의 큰 변화를 견디지 못해요. 그런데 당신은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어요. 아, 처음 본 순간 당신의 눈빛을 알아보았어요. 하지만 우리의 사랑은 이 세상에서 이룰 수 없답니다. 이 세상은 모든 멍청한 짓거리로 저를 망가뜨려 놓았어요. 당신! 모든 남자들이 당신처럼 다 그렇게 나를 성실하게 대하지는 않았어요. 그들은 유치한 지능에서 나온 허영심만으로 나를 현혹했지요. 오늘은 여기서 헤어져요. 당신에게 나의 마음을 더 이상 완전히 줄 수 없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 힘이 드는군요. 내 마음은 부서져 산산조각이 났어요. 그리고 저세상에서 그 갈라진 틈이 치유될 거예요.”

이 말에 종손의 눈은 주르륵 흐르는 눈물로 침침해졌습니다. 그가 다시 눈을 들어 건너다보니 에스터는 불을 끈 후 잠옷 차림으로 창가에 서서 찬 밤공기를 한껏 들이마시고 있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잠자리에 들었어요. 종손은 그 불가사의한 모든 일을 되도록 충실하게 기록해 두려고 일기장 앞에 앉았습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점심경에 사촌이 그의 침대맡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드디어 귀부인을 방문할 의향이 생겼는지 물었습니다. 종손은 흔쾌히 동의를 표하여 사촌을 놀라게 했어요. 하지만 차라리 혼자 그녀를 방문하는 편이 좋겠다고 덧붙이고 싶었어요. 그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사촌과 길을 나섰지요. 사촌은 그녀가 아직은 분명히 혼자 있을 것이라면서 좋아했습니다. 그녀의 집이 가까워지자 종손의 가슴은 마구 뛰었습니다.

“도대체 을씨년스런 저 큰 저택은 무엇이죠?”

종손이 물었습니다. “거울 창유리들이 박힌 저 집 말이에요. 어느 날 밤 나는 저 건물의 오목한 구석에 세워져 있는 동상 뒤에 앉아 있었던 적이 있는데!”

“자네가 상속받은 저택을 아직도 모르고 있었나?”

사촌이 물었습니다. “내 초라한 둥지보다는 저 저택에서 지내는 것이 편할 텐데!”

“천만의 말씀이에요.”

종손이 말했어요. “저 저택을 아예 보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거예요. 저 커다란 석재들은 굶주림과 근심으로 짜 맞추어 올려진 것처럼 보이네요.”

“당연하지. 저걸 지은 사람은 제대로 배불리 먹을 형편이 못 되었으니까. 자네 부친은 과외로 비용을 지출하는 위인이 아니었네. 한번은 내게 소송을 걸었었지. 나는 하루하루 근근이 연명하고 살 때였는데, 나 대신 자네 부친이 지불해 준 재단사의 계산서를 내가 약속한 날짜에 지불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네.”

“세상에, 너무 심하군요.”

종손이 말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상속인들에게 복이 돌아갈 수는 없지요!”

이런 이야기를 나누며 그들은 귀부인의 접견실에 들어섰습니다. 귀부인은 끝내야 할 편지가 있으니 두 신사 분들께서는 반 시간만 더 기다려 주십사 하는 부탁을 전했습니다. 사촌은 일정한 시간에 하는 산책 때문에 그렇게 오래 기다릴 수 없다며 시계를 들여다보고는 종손을 홀로 남겨 두고 가 버렸습니다. 종손은 혼자 방에 있는 것이 으스스했습니다. 작은 사다리 위에서 울어 대는 청개구리는 악령에 씐 것 같았고, 여러 화분에 심어진 꽃들도 순수한 아름다움을 잃고 있었습니다. 잡동사니 장식물에서는 열두 명의 시대에 뒤진 외교관들이 숨어서 엿듣고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그를 괴롭힌 것은 검정색 푸들 강아지였어요. 물론 강아지 편에서도 그를 겁내는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그는 그놈을 악마의 화신이라고 여겼습니다. 마침내 귀부인이 색깔을 연신 바꾸는 중국 폭죽처럼 옆방에서 등장했을 때, 그는 기절초풍할 뻔했어요. 그 혐오스러운 여인이 자기 어머니라는 느낌이 퍼뜩 들었기 때문이랍니다.

“어머니, 당신의 아들은 매우 슬프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 부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면서 부인이 깜짝 놀랄 것이며 자신을 바보라고 단정 지을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그녀는 차분하게 그의 곁에 와 앉으며 말했습니다.

“아들아, 너의 어머니는 아주 잘 지낸단다.”

부인은 커다란 칠보 향수병을 그에게 건네주려 했지만 종손은 그것을 피하면서 말했습니다.

“내가 보기엔 한 영혼이 그 병에 갇혀 있군요.”

부인은 병을 옆에 내려놓으며 말했습니다.

“만약 그 안에 영혼이 들어 있다면, 그건 네 아버지의 영혼이란다. 훌륭한 분이었지. 너의 아버지가 사촌인 소위와 내 집 앞에서 느닷없이 벌인 결투에서 칼에 찔려 쓰러졌을 때 나는 이 병을 그분에게 주었었지.”

“그럼 저는 내 아버지를 죽인 살인자와 한 지붕 아래 지내는 셈이군요. 그리고 당신은 그가 사랑했던 여인이고요?”

“너는 너무 많은 것을 아는구나, 내 아들아.”

그녀가 말을 이었어요. “알지 않아도 될 것까지. 그 모든 일에 대해 너는 내게 어느 정도는 고마워해야겠지. 너의 부친은 이 도시에서 ‘미남 ooo’라고 불렸단다. 그런 명성이 나로 하여금 그분을 대할 때 조심성을 망각하게 했지. 하긴 우리의 사랑 행각은 비밀에 부쳐졌지만 말이야. 하지만 그 사랑 놀이로 내가 짊어지게 된 결과로 말할 것 같으면, 너의 부친이 나와 결혼하겠다던 약속을 이행하기도 전에 결투에서 찔려 돌아가시고 난 이후에라도 내가 그 결과를 감추지 않았더라면, 아마 나는 궁중 사회에서 추방되고 말았을 거다. 하지만 나는 끝내 성공적으로 숨겼지.”

“알고 있어요.”

“게다가 네 부친의 살인자에게 앙갚음을 했지. 정당하게 그 자의 소유가 될 수 있었던 재산을 네가 받게 만들어 버렸거든. 나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어. 존경을 받으며 살아가고자 하는 그 자의 모든 시도를 궁중에 미치는 나의 영향력을 동원해 방해했단다. 또한 그자를 내 매력의 덫에 옭아매 두었지. 그자의 분별력도 용기도 사람들에게 적당한 인정을 받지 못했어. 그래서 그자는 무의미한 소일거리로 호구지책에 전전긍긍하며 모든 세인의 조롱을 사는 가소로운 얼굴로 그렇게 늙어 가고 있지. 반면에 연로한 어른들은 너의 아버지의 준수한 외모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이야기한단다. 아직도 미남을 꼽을 때 그분을 표본으로 내세우면서 말이다. 모든 상류층 인사와 어울린 네가 풍요로움을 누리며 귀하고 편하게 성장하는 것을 볼 때, 그리고 매일처럼 노인들의 심술궂은 곁눈질과 부랑아들의 조롱을 받으며 우스꽝스러운 절뚝발이 걸음으로 내 집 창 앞을 총총걸음으로 지나치거나, 또는 일요일마다 내 강아지를 빗질하는 사촌을 떠올릴 때면 나는 너의 아버지를 위하여 보복을 했다고, 합당한 제물을 그의 영전에 바쳤다고 느끼곤 한단다. 아니면, 사촌에게 더 상처를 줄 일을 해 볼까? 그와 결혼이라도 해서 시내를 정기적으로 산책하는 일을 방해하고 수집한 문장들을 내다 버릴까?”

종손은 그 모든 이야기를 끝까지 듣지 않았습니다. 그랬다면 아마 그의 반박의 말이 일찌감치 그녀의 이야기를 중단시켰을 겁니다. 그는 꿈을 꾸듯 혼잣말을 중얼거렸어요.

“그러니까 나는 귀하신 어머니의 품에 도둑으로 안기게 된 거로군. 그렇다면 나로 인해 내쳐진 불쌍한 아이는 어디 있단 말인가? 알겠어. 에스터야. 당신네들의 비열함 때문에, 그녀 자신의 종교의 저주 때문에 꺾여 버린 여인, 재치 있고 불행한 여인!”

“그 점에 대해서는 대꾸할 말이 없구나.”

귀부인이 말했습니다. “너의 선친인 종손께서 혼자 이 일을 처리했단다. 불륜으로 태어났다는 치욕에서 벗어나 호화로운 운명으로 상승된 너를 보고 난 안심했었어. 그 점에 대해 너는 고마워하지 않는구나!”

종손은 골똘히 생각에 잠긴 채 앉아서 아무 말도 듣지 않고 조용히 말했습니다.

“한 가엾은 사람을 희생으로 치르고 내가 풍족해도 되는가? 나는 참 많은 것을 배웠고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 어떤 사람 못지않게 여러 악기를 연주할 실력을 갖고 있지. 그림도 그리고, 여러 외국어 교습도 할 수 있어. 부가 불러온 죄악의 굴레에서 벗어나자. 부가 나를 행복하게 한 적이 없었어!”

귀부인은 그의 말에 주의 깊게 귀 기울이며, 앞발을 그녀의 무릎에 디디고는 그녀의 귀에 머리를 대고 있는 푸들 강아지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종손의 손을 잡으며 말했습니다.

“너의 어머니에게 최소한의 순종을 보여 줄 의무가 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부당한 것이 아니란다. 단지 스물네 시간 동안만은 네 출생의 비밀을 지켜 다오. 네 마음속에서 일고 있을 모든 결단도 보류하거라. 가슴에 손을 얹고 맹세하렴!”

종손은 스물네 시간 이내에 아무런 결단을 내리지 않아도 되는 것이 기뻤습니다. 그녀에게 악수를 청하고 손에 키스를 한 뒤에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그러고는 마음의 평정을 찾으려고 서둘러 집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 심한 동요를 일으킬 또 다른 사건이 집 쪽에서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에스터의 집 앞에 유대인 남녀들이 우르르 몰려서서 열띤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어요. 그는 그들과 어울리고 싶지 않아서 집 안으로 들어가 하녀 우어줄라에게 물어보았어요. 하녀는 어여쁜 에스터의 약혼자가 영국 여행에서 초라한 몰골로 한 시간 전에 돌아왔는데, 전 재산을 다 잃었다고 전했습니다. 늙은 바스티는 자기 집 문턱을 넘어서도 안 되고, 자신의 양녀를 꿈도 꾸지 말라고 그에게 선언했는데, 에스터는 지금이야말로 불행해진 그 사람의 청혼을 받아들여 결혼을 이행하겠노라고 큰 소리로 확언했다는 것이었어요. 그 사람이 자기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라고, 그렇지 않다면 자신의 병약함을 이유로 그녀 편에서 약혼을 파기했을 것이라고 하면서요. 그 말을 들은 계모 바스티는 노발대발했고, 이웃 어른들이 끼어들어 말려도 분통을 삭이지 않았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이웃들은 하나같이 계모가 기를 쓰고 결혼을 반대하는 이유는 양녀를 배려해서가 아니라 상속을 탐해서라고 계모의 잘못을 입에 담고 있는 참이라고요.

이리하여 종손 자신이 내쳐진 에스터와 결혼을 했더라면 하는 한 가지 보상의 수단은 거의 사라졌고, 그의 애정은 당치도 않게 여겨졌습니다. 그는 약혼자가 자신이 당한 불행한 사건들의 전말을 늘어놓는 동안, 창백한 시체처럼 요지부동으로 소파에 누워 있는 에스터를 바라보았습니다. 등불이 밝혀졌어요. 에스터는 기운을 차린 것 같았습니다. 약혼자를 위로하며 결혼을 하게 된다면 가게를 넘겨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절대로 그녀 방에 들어와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습니다. 약혼자는 자신을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고 무시무시한 바스티의 분노를 피하게만 해 준다면 에스터가 제시하는 모든 조건을 지키겠다고 맹세했어요.

“바스티는 죽음의 사자, 죽음의 천사요.”

그는 말했어요. “나는 그렇다는 걸 확실히 알고 있소. 그 여자는 저녁때면 소환된다오. 죽은 사람들이 밤을 넘겨 집 안에 머물지 않게 하려고 말이오. 그 여자는 죽은 자들의 숨결을 빨아 마시지요. 그래서 그들은 오래 고통을 당하지 않게 되는데, 그들 존재가 당신네 가족에게는 짐이 되고 있다오. 그 여자가 내 어머니에게서 몰래 도망칠 때 나는 그 사실을 목격했소. 내가 침대에 다가갔을 때 어머니는 돌아가 버린 후였소. 그런 사실을 나는 매형에게서 들었소. 다만 그런 내용을 그 누구도 발설해서는 안 되지요. 이것은 일종의 자비심의 문제이지만, 나는 그것이 두렵소.”

에스터는 그에게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해명하다가 결국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 남자는 곰곰이 생각을 합니다. 그녀가 지나치게 두려우면 나와 결혼하지 않아요. 전 한 가지 생각뿐이에요. 제가 결혼하려는 것은 단지 그를 곤경에서 구하기 위해서랍니다. 그는 신중하게 생각을 하지요. 그리고 그 남자는 가지요. 그 남자는 나를 혼자 남겨 둡니다.”

약혼자가 떠났습니다. 그가 나가자마자 에스터는 가까스로 일어섰고,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어요. 그리고 당황하여 손을 비볐습니다.

종손은 그들을 떼어 놓고 있는 좁은 공간을 주시했습니다. 그녀를 위로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그러나 용감히 뛰어넘을지, 아니면 안전하게 널빤지를 놓아 두 창문을 연결할지 미처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여느 저녁때처럼 총성을 들었습니다. 곧이어 어여쁜 에스터는 또다시 사교 모임의 망상에 빠져들었어요. 그녀는 서둘러 짧은 무도회 드레스로 갈아입고 그 위에 붉은 가장 무도 망토를 걸치고 가면까지 쓴 채 가면무도회로 갈 다른 가면 쓴 손님들을 기다렸습니다. 바로 전날 같은 일이 벌어졌는데, 훨씬 더 요란스러웠어요. 그로테스크하게 변장한 사람들, 악마, 굴뚝 청소부, 기사, 커다란 수탉들이 온갖 언어로 윙윙거리도록 중얼거리고 소리를 질러 댔습니다. 종손은 그 형체들을 보았는데, 이들의 음성이 에스터에게 생기를 불어넣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혼자서 주고받는 모든 논박에 적절하고 재치 있게 농을 던졌고, 그런 농담 속에 그녀 자신 일찍이 지녔던 약점들을 드러내기를 전혀 꺼리지 않았어요. 그러면서도 역시 모두에 대해 최선의 측면을 보여 줄 줄 알았습니다. 다만 결혼을 앞두고 그런 경박한 짓을 벌인다고 그녀를 질책하는 한 사람의 가면에 대고는 대답할 말을 잃었어요.

“제가 불쌍한 젊은이에게 베푸는 이 적선 행위를 결혼이라고 이름 붙이지 마세요. 저는 버림받았어요. 종손은 우유부단하게 끝도 없이 골똘히 생각만 하다가 결국 저를 위해 아무 행동도 못할 것이고, 저의 맥박은 곧 마지막 시간을 맞이할 겁니다. 한마디로, 다윗이 법궤1 앞에서 춤을 추었다면, 저는 거룩한 계약을 통해 춤을 출 겁니다.”

이 말을 하며 에스터는 가면을 움켜잡고 빠른 왈츠를 미친 듯이 빙빙 돌며 추었고 그녀의 춤에 맞춰 다른 가면들도 돌았습니다. 동시에 그녀의 입은 놀라운 솜씨로 바이올린, 콘트라베이스, 오보에, 호른의 소리를 춤에 맞추어 흉내 내었어요. 이렇게 모두가 어울린 춤이 끝나자마자 에스터는 삼박자의 에스파냐 춤인 판당고를 추자는 신청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가면과 무도 드레스를 벗어던지고 캐스터네츠를 들고는 기막히고 멋진 춤을 우아하게 선보였어요. 종손은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는 즐거움에 다른 모든 생각을 잊어버렸지요. 이제 좌중의 모두가 에스터의 춤 솜씨에 감사의 말을 보내고, 그녀 자신도 가까스로 숨을 돌리고 있다가 마침 한 작달만한 사내가 들어서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녀가 낡아 빠진 가면을 쓴 그 손님의 이름을 부르자마자 그 남자를 향해 좌중의 신사들이 인사를 하는 광경을 종손도 보았어요.

“세상에, 이분은 나의 가엾은 신랑이에요.”

그녀가 말했습니다. “자신의 재주를 부리는 것으로 돈을 벌려고 한답니다.”

초라한 가면의 사내는 작은 테이블과 의자를 등에 짊어지고서 자신이 보여 줄 재주를 소개하고는 접시를 돌려 돈을 모았어요. 그리고 능숙한 카드 요술을 피우는 무대를 펼쳤습니다. 곧이어 그가 컵이며 반지, 주머니, 촛대 따위의 잡동사니를 끄집어내자 사교 모임은 흥분의 도가니가 되었습니다. 끝으로 그는 하늘거리는 새하얀 옷차림으로, 이번에도 다시 가면을 쓰고는 더러운 가면무도회 외투 자락에서 일종의 혼령처럼 빠져나와서는, 자신의 몸을 써서 특이한 재주를 부려 보이겠다고 장담했어요. 그리고 배를 깔고 누워서는 실성한 딱정벌레처럼 빙글빙글 돌았어요. 그러나 에스터는 그렇게 일그러진 그의 몰골을 보고 얼마나 끔찍한 혐오감에 사로잡혔던지. 경련을 일으키며 눈을 질끈 감고 자신의 침대에 쓰러졌습니다. 그 순간 종손의 시야에서는 모든 형상들이 사라졌고, 다만 억압받고 있는 사랑하는 여인이 끔찍한 고통 속에 내동댕이쳐진 것을 보았어요. 그는 그녀에게 달려가기로 마음먹고는 계단을 뛰어 내려갔어요. 그러나 엉뚱한 방문을 열어 지금껏 들어가 본 적이 없는 방으로 들어갔어요. 부리 위로 나이트캡을 쓴 것 같은 털이 수북한 빨간 코의 흉측스런 형체가 등불을 든 그를 향해 우르르 달려들었습니다. 종손은 도망쳐 나와 자기 방을 찾으려고 지붕 쪽으로 황급히 올라갔습니다. 사방을 둘러보니, 성스러운 형체들과 경건의 상징인 새하얀 비둘기들이 조용히 그를 둘러싸고 있겠지요. 천당과 지옥 사이에 살고 있는 느낌, 그를 둘러싼 비둘기들이 상징하는 천상의 평화에 대한 갈망이 그의 내면을 뒤흔드는 격동의 파고를 기름처럼 가라앉혔습니다. 그리고 천상의 평화가 가까이 있다는 예감, 이 지상에서는 그 자신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예감이 에스터를 위해 달아올랐던 그의 행동을 다시 억눌렀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한 단계 높은 꿈에서 현실로 돌아오게 한 것은, 색동 띠가 둘러진 뾰족한 나이트캡을 쓰고, 빨간 코에 안경을 걸치고, 현란한 일본식 잠옷을 휘감고는 칼을 뽑아 들고 다가온 것이었어요. 두말할 것 없이 사촌이었지요. 그는 집 안에서 나는 요란한 소음에 잠이 깨었어요. 사촌이 종손에게 인사를 했습니다.

“여보게, 자네로군. 아니면 자네의 혼령인가?”

“나의 혼령일 겁니다.”

종손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대답했습니다.

“내가 어떻게 이곳 천사의 무리 속으로 옮겨져 왔는지 알 수 없는 걸 보면.”

“자네 방으로 돌아가게.”

사촌이 말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비둘기들이 알을 버리고 날아가 버릴 걸세. 안 그래도 아래쪽의 내 칠면조들도 말할 나위 없이 소란을 피우고 있어. 자네는 그곳에도 갔던 모양이지! 층계를 오르내리는 소리며 짐승들이 소란을 피우는 소리를 듣고, 유대인 골목에서 도둑이 기어들었다고밖에는 나로선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네. 그게 자네 소행이라니 차라리 다행이군. 여보게, 혹시 몽유병 증세가 있나? 그 치료법을 내가 알고 있는데.”

사촌은 이런 이야기를 하며 종손을 자신의 방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종손은 사촌에게 사실을 털어놓기로 마음먹고는 경련을 일으킨 에스터가 완전히 혼자 있는 것을 창가에서 보았으며 그녀를 도와주러 서둘러 가다가 엉뚱한 방문을 열었노라고 말했습니다.

“천만다행이로군.”

사촌이 말했어요.

“골목으로 난 문들이 열려 있었더라면 자네는 사고를 당하거나 욕설을 듣는 것을 면치 못했을 걸세.”

종손은 창가로 다가가서 말했습니다.

“그녀가 지금은 잠이 든 것 같군요. 이제 끔찍한 발작은 지나갔어요.”

하지만 소위는 이야기를 계속했습니다.

“자네가 일 년 전에 에스터를 보았어야 하네. 그때까지만 해도 저 아이는 참으로 참했지. 그때 한 연대 병사의 아들이 지방에서 이곳의 경기병으로 전출되어 왔네. 그의 아버지가 한 소규모 전투에 투입된 다음에 그 아들은 어머니에게 남은 유일한 가족이었지. 그럴 것이, 소규모 전투들이 큰 전투보다 더 위험한 법이니까. 나는 어머니가 아들의 마지막 의장용 셔츠를 지어 주던 것을 보았다네. 그것이 임종의 셔츠가 되리라고는 물론 어머니는 생각도 못했지. 그런데 그 청년은 경솔한 인간이었네. 말을 타고 가는 그의 모습만 보아도 금방 그 점을 알 수 있었지. 그는 늘 거리에서 재주를 보이려고만 했지, 자기 곁의 행인들은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네. 아, 그건 그렇고, 그 청년이 아름다운 에스터에게 반해 버렸고 에스터도 그에게 반한 걸세. 젊은 청년은 저녁때면 몰래 에스터를 찾아갔지. 가엾은 유대인들이 그들의 골목을 벗어나면 홀대를 당하듯이 기독교도들도 유대인 골목 내에서는 학대를 당해도 된다는 것이 유대인들의 생각일세. 그래서 유대인들이 그 청년을 덮쳤지. 특히 늙은 바스티는 그 친구를 거의 목 졸라 죽일 뻔했네. 이 사건이 소문이 났고, 장교들은 젊은 사관후보생을 더 이상 복무하지 못하게 했네. 그 청년은 나에게 와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상의하더군. ‘너 자신에게 방아쇠를 당겨라. 그 외에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라고 나는 말해 주었지. 그런데 그 인간이 내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서 총으로 자살을 해 버렸다네. 그때 나는 그 어머니에게 이 소식을 좋게 전할 방도를 찾느라 꽤 애썼지. 그런데 그때 이후로 에스터는 그가 총을 쏜 저녁 시간마다 총성이 가까이에서 울리는 듯한 느낌을 갖는 걸세(다른 사람들에겐 들리지도 않는데). 그러고는 어떤 누구도 못할 말로 떠들고 춤을 추는 발작을 일으킨다네. 집안의 다른 사람들은 그 아이를 홀로 내버려 두고 그녀를 꺼리고 있지!”

냉담하게 이어지는 사촌의 보고에 몸서리쳐져 종손은 소리쳤습니다.

“항상 사랑하면서 하나가 되고자 하는 인류를, 이 얼마나 깊은 골들이 갈라 놓고 있는가! 영원한 사랑은 그 같은 희생을, 기적 이상으로 성서의 진실을 보증해 줄 그 같은 징표들을 요구하는 것일까? 인류에게 예정된 숙명이란 이 같은 희생과 징표를 바탕으로 치러야 하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이란 말인가? 오! 그들은 모두 실로 모든 민족의 성서의 역사로구나!”

잠시 있다가 종손이 물었습니다.

“그러면 바스티라는 노파가 정말로 교살을 하는 죽음의 사자인가요? 사람 말이 그 노파는 죽어 가는 사람들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가한다고 하더군요.”

“그런 경우라면……”

사촌이 말했습니다. “그들이 생매장되지 않도록 해 주는 자비 행위인 셈이지. 터무니없는 율법이 죽은 자를 세 시간 후에는 집 밖으로 끌어내도록 정해 놓고 있으니까 말일세.”

사촌은 의사한테서 들은 증언이 있었지요. 바로 그 율법 때문에 그 의사는 발작증을 앓고 있는 환자에게 그의 곁에 머물러 있겠다고 맹세를 해야 했고, 사람들이 그를 죽은 것으로 간주하여 질식시키지 않도록 하겠다고 말이지요.

“그때 의사는, 친척들이 당황스러워하며 죽은 사람은 죽었으니 의사 선생님은 어서 가시라고 설득하려 드는 판국을 알아차렸지. 하지만 의사는 머물렀다네. 그리고 마비 상태의 환자를 구출했고, 살아난 환자는 오랫동안 의사에게 감사했다는군. 그때 당국에서는 진상을 파악하고 때 이른 장례를 금지시키게 되었다네. 이제 좀 유쾌한 주제로 화제를 바꾸지” 하고 사촌이 말을 계속했습니다. “자네한테 크게 감사해야 할 일이 있네. 자네가 내게 행운을 가져다주었거든. 내 마음의 귀부인께서 자네로 인해 따스한 어머니 같은 애정을 느끼고 있네. 30년 동안 거절했던 내 청혼을 받아들이려 하고 있다네. 다만 내가 자네를 사랑하는 아들로 삼아 그녀 가까이 두고 우리의 노년을 부양케 하도록 한다는 조건으로 말일세. 그런데 여보게, 자네는 어차피 종가의 관리 문제를 포함하여 자네의 외형적인 생존 기반 일체를 나에게 위임한 터이고, 또한 협상이 요구하는 엄밀한 지식으로 미루어 보아 하니 자네가 공부한 학문은 재산을 직접 책임지기에는 너무나 추상적인 것들인 만큼, 나는 이를테면 자네의 당연한 후견인으로서 그녀의 요청을 승낙했다네.”

에스터가 바스티의 뜻에 내맡겨진 것처럼, 종손도 자신이 사촌의 뜻에 속절없이 떠맡겨져 있음을 느꼈습니다. 사촌은 그에게 교살하는 죽음의 사자처럼 여겨졌어요. 그가 만약 종가의 비밀을 알게 된다면, 지난날 젊은 사관후보생에게 그랬던 것과 똑같이 냉담하게 자신에게도 권총을 내밀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병자와 허약자들이 그러하듯이 종손은 자신의 삶을 사랑했습니다. 따라서 귀부인이 짜낸 방책, 즉 그 같은 결혼을 통해 종손을 집안의 아들로 묶어 두는 방책이야말로 그에게는 일종의 유화적인 타협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녀의 나이에 다른 자식을 낳을 가능성이 희박하기에 종손 자신만이 결혼으로 맺은 두 사람의 기대와 모든 희망의 구심점이 될 것이 틀림없었지요. 그리하여 종손은 어쩔 수 없이 사촌에게 결혼을 축하하는 말을 하고 귀부인에게도 자식으로서 효도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또한 앞으로 사촌과 함께 종가 저택에서 살면서 사교 모임에 참석하며 궁중에서 행운을 찾겠다는 약속도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사촌은 그와 같은 행운을 노래한, 운율을 잘 맞춘 시 몇 편을 낭독해 주었습니다. 그 고상한 운율의 예술을 그토록 졸렬한 솜씨로 다루는 것을 듣게 되자 종손은 은근슬쩍 모든 시구들과 결별하고 잠에 취해 버렸답니다. 이런 종손을 뒤늦게 알아차린 사촌은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떴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손은 몇 개의 소절을 절망스러울 지경으로 반복해서 읊조렸어요. 어디서 들었던 시구인지도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저택의 동상 뒤에서 늙은 바스티의 노래를 엿들었던 때가 떠올랐습니다.


한 유대 노파가 살고 있었네.

심술궂은 질투투성이 여자였지.

노파에게 아름다운 딸이 하나 있었네.

그녀의 머리는 예쁘게 땋아 올려졌지.

그녀가 원하는 만큼, 진주가 달렸네,

그녀의 웨딩드레스에.


아, 사랑하는 어머니,

꽃무늬 드레스를 입었는데―

내 가슴은 왜 이렇게 아프지요.

아, 나를 잠시 내버려 두세요.

초록 들판으로,

푸른 바닷가까지 산책을 갈래요.


안녕히 주무세요! 사랑하는 어머니,

이제는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할 거예요.

바다로 달려갈 거예요,

물속으로 가라앉을지라도.

오늘 세례를 받아야만 해요,

바람이 거칠게 휘몰아치더라도!


이처럼 끊임없이 시구를 떠올리다 늦게 잠들었던 종손은 저녁경 늘 그 시각에 들려오는 권총 소리에 깨어났습니다. 그와 동시에 나이든 착한 하녀가 조용히 들어왔어요. 종손이 깨어 있는 것을 본 그녀는 뒤쪽 창문으로 유대인 결혼식을 구경하고 싶지 않은지 물었습니다.

“누가 결혼을 하나요?”

종손은 벌떡 일어났어요.

“어여쁜 에스터와 어제 돌아온 불쌍한 놈팡이요.”

다행히도 종손은 옷을 입은 채 소파 위에서 잠들었었기 때문에 지체할 필요 없이 허겁지겁 집 뒤쪽으로 난 창으로 뛰어갔습니다. 야생 짐승들이 있는 공동묘지를 바라보던 창이었어요. 건물들의 기다란 그림자와 간간이 비치는 저녁 불빛이 공동묘지 옆 초원 위를 가볍게 스치고 있었고 꾀죄죄한 아이들의 뒤얽힌 말썽 소리가 묘지를 빙 둘러치고 있었습니다. 지금 막 시작된 음악의 유형은 동방의 나라를 떠올리게 했어요. 네 명의 소년이 앞장서 떠받들고 있는 자수가 잔뜩 놓인 천개도 그랬고요. 마찬가지로 구경꾼들 간에 벌어지는 온갖 여흥의 표현, 그러니까 나이팅게일과 메추라기를 인공적으로 만들어 놓고, 서로 꼬집고 얼굴을 찌푸리고 하는 것이 무척 이국적이었습니다. 마침내는 몇몇이 공중 도약을 하며 신랑을 맞았습니다. 신랑은 굴뚝 청소부처럼 검은 두건을 머리에 쓰고 여러 명의 친구들과 들어서고 있었지요. 그런데 예정된 시간이 지나도 신부가 나타나지 않자 사람들은 심히 초조하게 기다리며 온갖 기이한 추측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한 여인이 난처한 기색으로 손을 비비며 들어와 사정없이 외쳤습니다.

“에스터가 죽었어요!”

심벌즈와 작은 팀파니의 울림이 멎었습니다. 소년들이 천개를 떨어뜨렸고, 거센 황소가 끔찍하게 울부짖었습니다. 아니면 최소한 지금에야 그 소리가 들렸어요. 모두들 구경을 하려고 달려갔지만 비둘기들이 요란하게 날갯짓을 하며 둥지를 찾아들 때까지 종손은 홀로 창가 귀퉁이에서 기절하여 쓰러져 있었습니다. 하녀가 말했어요.

“저런 세상에! 비둘기들이 또 한 마리 비둘기를 데리고 왔네요. 이 비둘기는 어떤 가엾은 사람의 것일까! 그 사람이 얼마나 안타까워할지 그 누가 알까!”

“그녀야.”

종손이 소리쳤습니다.

“천상의 비둘기. 이제 나는 에스터를 애도해서 울지 않아도 되겠어!”

종손은 자신의 방으로 되돌아가 에스터의 창문 쪽을 건너다보았습니다. 모두들 벌써 그녀의 방에서 도망치고 없었습니다. 죽은 자가 미칠 영향이 두려웠던 것이지요. 약혼자는 집 앞에서 자신의 예복을 찢는 등 괴로움의 몸부림을 치고 있었고, 그런 한편에서 연장자들은 장례 절차를 의논하고 있었어요. 에스터는 침대에 누워 있었습니다. 머리를 내려뜨리고 있어서 땋은 머리가 풀어 헤쳐져 바닥에 구르고 있었어요. 갖가지 꽃이 핀 가지들이 꽂힌 화병이 곁에 놓여 있고 물컵도 하나 있었습니다. 아마도 생명을 두고 벌어지는 치열한 싸움에서 그녀가 마지막으로 마신 생명수였겠지요.

“예시豫示적으로 그녀를 에워싸던 그대들, 천상의 무리들이여, 어디로 사라졌느냐?”

그제야 종손은 하늘을 향해 외쳤습니다. “내 어머니와 꼭 닮은 그대, 아름다운 죽음의 천사여, 어디에 있느냐! 믿음이란 이렇듯 비몽사몽 간에 벌어진 불확실한 착시 현상에 불과하단 말인가? 고통의 빛을 받으면 흩어지는 아침 안개란 말이냐! 언젠가 내가 순수한 곳에 가까이 가게 해 달라고 기원했던 날개 달린 영혼이여, 어디에 있느냐? 그리고 지금 내가 모든 것을 부인해 버린다면, 누가 저 한층 높은 세계에 대한 증언을 해 줄 것인가? 집 앞에서 남자들이 장례에 관해 말하고 있다. 그러고 나면 만사는 끝장이다. 그녀의 방은 점점 더 어두워지고, 사랑스러운 모습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구나.”

이렇듯 종손이 눈물을 삼키며 미친 듯이 혼잣말을 내뱉는 동안, 늙은 바스티가 도둑 촛불을 켜 들고 방으로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장롱을 열더니 주머니 몇 개를 꺼내어 깊숙한 옆 주머니에 찔러 넣었어요. 그러고는 에스터의 굳은 시신의 머리에서 신부 장신구를 뽑고 나서, 줄자로 그녀의 키를 재었습니다. 분명 옷을 만들려고 재는 것이 아니라 관을 맞추기 위해서였겠지요. 이어서 그녀는 침대에 앉았는데, 기도를 올리는 것처럼 보였어요. 종손은 이 기도로 그녀의 도둑질도 용서하기로 하고 같이 기도를 올렸습니다. 기도를 마치자 온통 어둠에 묻혀 있던 그녀 얼굴의 모든 표정이 오그라들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오려 낸 카드 속의 얼굴들, 밝은 불빛을 피하는 얼굴들이 두루 비치는 광채를 받아 얼굴 자체로는 알아챌 수 없는 인간의 형상을 띠는 것 같았어요. 그녀는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한참 동안 신의 은총의 빛을 받아 충전시킨 열기로 한 마리 비둘기를 향해 급강하하는 독수리처럼 보였습니다. 그렇게 바스티는 가위에 눌리는 악몽처럼 가엾은 에스터의 가슴을 타고 앉아 목에 손을 갖다 댔습니다. 종손은 아름다운 에스터의 머리, 손과 발이 움칫거리는 것을 본 것 같았어요. 하지만 그는 무슨 의지를 품거나 결단을 내리는 것과는 여전히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 광경을, 살아남을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빠져 바라보고만 있었지요.

“잔인한 독수리, 가엾은 비둘기!”

에스터가 버둥거림을 포기하고 팔을 머리 위로 내뻗자 불빛이 사그라졌습니다. 그러고 나서 최초의 순수한 피조물이, 숙명적인 나무 아래에 있는 아담과 이브가 방 안 어두운 구석에서 상냥한 인사를 하며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다시 찾은 천국의 영원한 봄 하늘로부터 죽어 가는 에스터를 위안의 눈길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런 한편 죽음의 천사가 슬픈 얼굴을 한 에스터의 머리에 번득이는 불꽃 장검을 내려뜨리고 마지막 쓰디쓴 방울들이 흘러들 때를 눈을 부릅뜨고 도사리며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렇게 죽음의 천사는 마치 발명가가 공들였던 작업의 마지막 순간을 기다릴 때처럼 깊은 생각에 잠겨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에스터가 메마른 목소리로 아담과 이브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당신들 때문에 나는 너무나 많은 고통을 겪는다고요.”

그러자 아담과 이브가 답변을 했습니다.

“우리는 죄악을 단 한 번만 저질렀다. 그렇다면 너 역시 한 번만 저질렀느냐?”

그러자 에스터는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렇게 에스터의 입술이 열리자 죽음의 사자의 칼에서 쓰디쓴 방울들이 그녀의 입 안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러자 에스터의 영혼이 동요를 일으키며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와, 고통스럽게 사랑했던 거처와 작별을 했습니다. 죽음의 사자는 침대맡의 물컵에 칼끝을 씻어서 칼집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러고는 아름다운 에스터의 입술로부터 그녀 안에 숨겨져 있던 영혼을, 즉 그녀의 진수眞髓를 받았습니다. 이어 그 영혼이 죽음의 천사의 손을 잡고 발돋움하며 서서 두 손을 하늘을 향해 뻗자, 곧 둘 다 시야에서 사라졌습니다. 건물 따위는 그들이 날아가는 데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이 지상 세계의 건축물 도처에서 한 단계 높은 세계가 현시되었습니다. 그 높은 세계는 오로지 환상 속에서만 감지됩니다. 두 세계 사이의 중재자로서, 그리고 껍데기의 죽은 소재를 끊임없이 살아 있는 형상으로 승화시켜 보다 높은 것을 구현해 주는 환상 속에서. 하지만 늙은 바스티에게는 이 모든 놀라운 현상이 인식되지도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 같았습니다. 그녀의 시선은 딴 곳을 향해 있었어요. 주검과의 싸움이 잠잠해지자, 그녀는 또 보석 몇 개를 챙겨 넣고 벽에 걸린 아담과 이브의 그림을 떼어 들고 나갔습니다.

그제야 겨우 종손은 자신이 목격한 것이 이 세상의 모든 것에도 현실로 일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떠올라 소리쳤습니다.

“이럴 수가! 늙은 바스티가 에스터를 교살했어.”

그는 자신도 모르게 열린 에스터의 방 창으로 펄쩍 뛰어 들어갔습니다. 그의 외침은 장의사들과 약혼자를 집 안으로 불러들였습니다. 방으로 들어선 그들은 생면부지의 종손이 가엾은 에스터에게 생명의 입김을 불어넣으려고 애쓰는 장면을 보았어요. 하지만 헛수고였습니다. 종손은 그들에게 바스티가 에스터를 어떻게 교살했는지 본 대로 힘들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약혼자가 소리쳤어요.

“어쩌면 사실일 겁니다. 나도 그 노파가 몰래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것을 보았어요. 하지만 난 그 여자가 두려워요!”

그러나 장의사들은 약혼자에게 그런 얼토당토않은 말을 하지 말라고 나무라면서 저 이방인은 형벌을 면하려고 거짓말을 꾸며 대는 도둑이거나 미치광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종손은 물이 든 컵을 집어 들고 말했어요.

“죽음의 사자가 이 물에 칼을 씻었고, 그래서 치명적인 독이 든 것이 분명합니다. 마찬가지로 바스티가 가엾은 에스터의 목을 조르는 것을 나는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어요!”

이 말을 하면서 종손은 컵의 물을 모조리 들이켜더니 침대 곁에 주저앉았습니다. 모두들 그의 눈빛과 창백해진 입술에서 그의 고통을 읽었고 끊어질 듯 이어지는 그의 말을 귀담아 들었습니다.

“바스티는 에스터를 벌써 몇 해 전에 교살했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그때 에스터는 자신의 생명의 분신으로 죽었습니다. 그 분신은 죽어서까지도 헛된 장신구로 노파의 탐욕을 부추기고 내 마음속에 허망한 사랑이 일게 했던 거지요. 에스터는 그녀가 믿던 천국을 거부당하지 않았어요. 그녀의 천국을 찾았답니다. 그리고 나도 나 자신의 천국을, 평안하고 영원한 푸르름이 불변하는 곳을 찾아내겠습니다. 막내인 나를 첫 자식처럼 무한으로 감싸 줄, 모든 인간을 평등하게 축복 속에 잠기게 할 그러한 푸르름의 천국을 말입니다!”

종손의 말은 곧 더 이상 알아들을 수 없게 되었고 그의 입술도 거의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죽은 자의 방에 있는 물은 위험한 것이며, 치명적인 죽음 앞에서 곧잘 스스로 극단적인 것을 지어 낸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습니다. 그들은 종손을 소위의 집으로 옮겨 놓고, 종손이 자신들에게 들려주었던 사건들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소위는 그들에게 죽어 가는 종손은 이미 오래전부터 중병을 앓고 있었다고 안심시키고는 의사를 집으로 불렀습니다. 종손이 처음 마주쳤을 때 주검이 마차 위에 앉아 두 마리의 말과 굶주림과 고통을 모는 것으로 보았던 바로 그 의사였어요. 의사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침이며 부황이며 몇 가지 강한 약제로 시도해 보았어요. 하지만 불행한 종손의 영원한 안식을 더 이상 방해하지 못하고 죽음을 재촉했을 뿐이었습니다.

바로 그날 저녁 소위는 종가 저택을 소유하게 되었고 저택의 호화로운 침실에서 행복한 첫 밤을 지내고 있었습니다. 종손의 장례식 때 보여 준 소위의 훌륭한 접대와 화려한 취향에 사람들은 경탄을 금치 못했어요. 소위는 여러 차례 성대한 오찬을 대접했어요. 일주일이 채 지나지도 않아 모두들 이 남자가 그동안 겪은 부당한 일들에 대해 놀라게 되었습니다. 많은 이들은 인생의 갖가지 고난을 헤치고 살아 나온 그의 실천적 이성을 칭송했고, 어떤 이들은 그가 전쟁에서 보여 주었던 수많은 용기의 실천을 이제야 상기했습니다. 게다가 몇몇은 그의 시 작품을 칭송하며 그 시를 출판하자고 간청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군 복무 연수에 맞추어 군에 입대하여 장군의 신분이 되고 나서, 앞서의 의사가 발명한 효험 있는 치료 덕분으로 그의 붉은 코를 고친 뒤에 노부인에게 청혼을 했습니다.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해 그가 작은 집에서 오랫동안 길렀던 조류들을 모조리 잡았습니다. 상류층 인사들이 친히 참석하여 그를 영예롭게 만들었고, 모두가 즐겁고 성대한 파티를 칭송했습니다. 그랬던 만큼 그날 밤은 무척 소란스러웠어요. 의사는 장군이 포도주를 과음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집 안 하인들의 말에 의하면 귀부인이 잠을 자러 갈 때 칼에 찔려 죽은 옛 애인의 혼령을 가둬 두었던 칠보 향수병을 깨뜨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촌이 그녀의 침대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그 혼령이 막는 바람에 두 라이벌이 밤새도록 대결했으며, 결국은 주인님께서 지쳐 혼령 앞에서 물러났다는 얘기였어요. 다음 날 아침 귀부인은 장군을 귀신에 홀린 바보라고 비웃었습니다. 장군이 화를 내며 대꾸하자 그녀는 그 사건과 그의 욕지거리까지 궁중에 소문내어 창피를 주겠노라고 을러 대었습니다. 장군이 그녀의 발치에 엎드려 입을 다물어 달라고 간청했고, 그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의 기분을 건드리지 않겠다는 약조를 그에게서 받아 내고 그의 청을 들어주었어요. 그리하여 그는 부인이 문장 수집품을 구경하다가 내버려 두었을 때, 부인의 개들이 달려들어 그 진귀한 소장품을 갖고 놀며 물어뜯는 경우에도 묵묵히 참을 수밖에 없었어요. 또한 그가 정해 놓은 일과의 쳇바퀴도 멈추어 버렸습니다. 부인이 그의 모든 시간의 흐름을 뒤바꾸어 놓았기 때문이었어요. 개들이 먼저 점심을 먹으려 들면 점심 식사 시간도 바뀌었지요. 또 그는 부인이 그에게 상당수의 어린 자고2 사냥개와 새끼 사냥개를 훈련시키라고 넘겨준 이후로 산책할 시간도 별로 없었습니다. 착한 하녀 우어줄라가 눈치를 보아 그에게 그래도 설득하고 거절도 하라고 부추기는 말을 해 주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당장 오늘 밤에라도 부인이 칠보 향수병에서 혼령을 불러낼세라 생각만 해도 지레 겁이 나서 하녀를 쫓아내었습니다. 장군은 싸우다가 물려 도망쳐 쫓기는 수탉처럼 정신적 공포감을 마음에 품고 있었습니다.

부인은 이런 약점을 잘 알고서 그의 공포감을 무기로 써서 그를 저택의 여러 안락한 방으로부터 다락방으로 내몰았습니다. 그리고 온갖 종의 개들로 구성된 그녀의 새로운 군체群體로 하여금 호화로운 방들을 차지하게 했습니다. 명예스런 지위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런 치욕적인 상황에서 바깥세상으로 나설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세인들 사이에 그녀의 분만의 비밀과 아이를 바꿔치기한 사실이 차츰 소문으로 퍼지면서, 부인은 바깥세상과 단절되어졌어요. 사정이 그랬던 만큼 그녀는 더더욱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온갖 종류의 동물들에게 애정을 쏟아부으면서 어느 누구도 그녀의 집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샹들리에의 밝은 빛이 덧창 틈새로 새어 나오는 저녁이면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 창 앞에서 이 괴이한 축제를 엿듣고 엿보려고 창턱 가까이 오르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그러고 나서 자신들이 목격한 광경을 들려주었어요. 고급 요리들이 듬뿍 담긴 은식기들이 성대하게 차려진 여러 커다란 식탁에서 헤아릴 수 없는 개와 고양이가 식사를 하는 광경을 보았는데, 그때 부인이 교양 넘치는 프랑스어로 모두들 어서 먹으라고 권하고 있는 한편에서 장군은 애견이 자리 잡은 의자 뒤에서 접시를 하나 겨드랑이에 끼고 기다리고 서 있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애견의 의자 뒤에서 남편이 들고 있는 접시가 억누르고 있는 분노로 부르르 떨리는 통에 그의 제복 단추들에 부딪쳐 금속성의 떨림음을 내고 있는 한편, 부인은 한 쌍의 개가 비단 식탁보에 새겨진 종가의 커다란 문장에 대고 더러운 앞발을 닦고 있는 모양을 보고 아주 귀여운 재롱이라고 즐겁게 웃었다는 얘기도 했어요. 그때 부인은 이렇게 얘기했답니다.

“지금 우리는 아주 기분이 좋아요. 내 카투쉬의 수호성인의 날에 맞는 당신의 시를 낭송해 줘요!”

밖에서 몰래 엿듣던 자가 이 말을 듣고 웃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축제 전체가 파장이 났습니다. 부인은 소리를 쳤고, 개들이 짖어 대었고, 장군은 하인들을 밖으로 보내 살피게 했습니다. 구경꾼들은 모두 도망쳤습니다. 다음 날, 저택에는 높은 철창이 둘러쳐졌습니다. 그렇게 해서 어느 누구도 더 이상 그 같은 비밀스런 광경을 구경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관점에 따라서 우연이었든 역사적이었든 이렇게 쳐진 철창과 함께 종손들에 관한 이야기도 끝을 맺습니다. 곧 혁명의 내전이 벌어지는 동안 이 도시는 다른 소위들과 장군들을 관찰하게 되는 기회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늙은이들은 도저히 함께 쫓아갈 수도 없을 정도로 혼란이 극에 달한 시기였지요. 그리하여 늙은이들은 눈에 띄지도 않게 죽어 갔습니다. 최소한 종손과 그의 부인, 그리고 부인의 개들은 그렇게 사라졌습니다. 물론 몇 차례 격렬한 사건을 치르고 난 후에. 그 사건 중의 하나는 보다 훌륭한 가문의 질서를 수립할 사명을 띠고 있다고 자각한 한 이방인 장교가 개들을 내쫓고, 노종손에게 가문의 주도권을 되돌려주려고 노력했던 일이었습니다. 그 후 도시는 이내 이방인들의 통치하에 놓이게 되었지요. 세습 종가는 보호 관리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좁은 골목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그러나 유럽 대륙은 회부된 범죄자처럼 유폐되었어요. 그때 불법적인 통로로 많은 밀매 행위가 이루어졌지요. 바스티는 주어진 시기를 적절히 이용하여 염화암모니아 공장을 설립한다는 명목으로 새 정부의 인가를 받아 사멸된 종가 저택을 몇 푼 주지 않고 사들였습니다. 그리고 그 비용도 종가 저택 안의 그림 몇 점을 매각하여 완전히 충당했어요. 이렇게 해서 종가 저택은 이웃에게는 불편하지만 아주 실용적인 목적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봉건법 대신에 위임이 등장하게 된 것이지요.


•황은미 옮김




1 다윗이 법궤를 모셔 올 때 성경에 있는 하느님의 방법을 잊고 새 수레로 옮기다 웃사가 죽게 된다. 이 일로 자신을 돌아보고 잘못된 웃사와 동일하게 흐르고 있었던 마음을 발견하고, 하느님 앞에 죽임을 당해도 마땅한 인생인데 은혜를 입은 사실을 깨닫고 온 마음으로 법궤 앞에서 춤을 춘다. 이는 스스로 낮아지고자 하는 종교 의식의 의미를 담고 있다.

2 꿩과의, 메추라기와 비슷한 새

작가 한마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