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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에서 길을 잃다] 자유로에서 길을 잃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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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에서 길을 잃다.1

  • WHITE

태풍입니다. 태풍 말이죠.?

아무튼 살다보면 말이죠. 세상은 의외로 조용해요.?

시끄러운 건 신문이나 라디오뿐이지요. 전 그래서 라디오를 틀지 않아요.?

서울, 어느 후미진 곳이라도 제가 열댓 번은 다 가 본 곳이죠.?

눈감고 갈 수 있죠. 그러니까, 살다보면 그 길이 다 그 길이에요. 다르지 않아요.

손님도 마찬가지죠. 정말이지 살다보면 어느 날 문득?

모든 손님이 다 똑같다는 걸 알게 되요. 그때부터 저는 태풍, 태풍만 불면?

뒤에 탄 손님의 목적지가 혹 거기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요.?

그래서 태풍 속으로 차를 몰고 싶어져요.




무서운 건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의 기억이다.

나를 기억하고, 내가 기억하는 사람들의 기억이다.




인간은 자궁에 정착하여 40억 년의 진화를 겪어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느 때부터 자신의 존재와 자신을 품은 여자와 그 여자를 둘러싼 무수한 사람과 사물에 대한 기억의 흔적을 갖기 시작하는 걸까. 어떤 기억으로 자신의 뼈를 세우고, 살을 입히는가.


잃어버린 최초의 기억들. 그리고 그 기억들이 각인된 비밀스러운 내면의 깊은 방들…… 비밀이 봉인된 방들의 흐느낌…… 의사는 환청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나는 밤마다 또렷이 듣는다. 기억을 봉인한 방들의 깊은 속삭임을…….


수십 수백 명의 내가 그 방들의 문을 열고 내 앞으로 와 제각각 자신에 대한 말들을 중얼거린다.


난 한 번도 행복해본 적이 없어.


그래? 나는 너무 슬퍼.


넌 슬퍼?


난 너무 화나 있어. 분노가 내 몸을 활활 태워.


난 말이야, 누구에게도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야. 죄의식이 나의 영혼을 불안하게 해. 누가 내게 죄를 말하지? 누가 내게 죄를 물을 수 있는 거야?


모두 다른 내가 밤새 기억의 방문을 열고 닫으며 자신에 대해 변론하고, 사랑을 구걸하다, 사소하고도 깊은 죄의식에 빠져 새벽녘이 되면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 방문을 굳게 잠근다.


*


나는 곧 아이를 낳아야만 할 여자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 이미 자궁 밑까지 내려와 세상 밖으로 나올 아이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아이와 나를 탯줄로 엮어버린 남자가 누구인지도 나는 모른다. 내가 아는 건 아이를 낳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것뿐. 하지만 몸을 풀 곳이 없다. 겨울 산은 눈꽃에 휘어진 마른 가지만 남은 늙은 나무들과 바늘 끝보다 더 아픈 바람뿐이다.


아이는 상관없다는 듯이, 어찌 됐든 낡은 거푸집에서 벗어나 새로운 집으로 옮겨 살아야 된다는 일념뿐이므로 자궁 문을 제 머리로 열었다. 그 잔인한 삶의 의지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늙은 나무를 열 손톱으로 긁어대며 두 다리를 벌리고 온몸을 비틀어대는 것뿐이다.


생살을 찢고 아이가 붉은 피와 긴 탯줄과 함께 자궁 밑으로 쑥 빠졌다. 무엇보다 먼저 나는, 나를 옭아맨 피 묻은 탯줄을 양쪽 어금니로 갈아대며 끊고자 했다. 탯줄은 질기고 미끈거렸고, 어금니는 흔들거렸다.


산의 아침이 왔다. 나는 발가벗은 아이를 두고 마을을 향해 눈길을 걸었다. 아무도 밟지 않는 백색의 길을 걸었다. 걷다가 아무 생각 없이 걸음을 멈췄다. 선혈이 낭자한 흰 속치마를 벗어 아이가 있는 늙은 나무 밑으로 다시 왔다.

작가 한마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