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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여우 발자국] 45화 (마지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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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마지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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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다들 어디 갔지? 카페로 돌아와 보니 아무도 없었다. 윤원은 어딜 갔지? 설탕이라도 사러 갔나? 오븐 뚜껑이 열려 있었고 그 안에 여러 가지 동물 발자국과 나뭇잎 모양의 쿠키가 줄지어 누워 있었다. 아직 뜨거운 기운이 식지 않은 걸 보니 자리를 비운 지 얼마 되지 않은 모양이다. 커피 머신에서는 까만 커피 물이 검은 눈물처럼 똑똑 떨어지고 빵 반죽이 재미있는 모양으로 우그러진 채 도마 위에 혼자 앉아 있었다.


텅 빈 카페에 혼자 오도카니 앉아 나는 서른두 개의 구멍창을 타고 넘실대는 먼지와 어스름하게 지는 빛의 향연을 바라보았다. 구멍창들은 모두 활짝 열려 있었다. 밀가루가 하얗게 날리며 사방이 흐려졌다. 


동오 형을 만나고 카페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난생 처음 내 뒤에 남겨진 내 발자국을 보았다. 내가 남긴 여우 발자국이 다른 사람들의 발자국을 끌어들였다. 홍우필의 이야기처럼. 수상한 발자국을 가진 네 명의 사람들은 여우 발자국을 남기는 사람을 찾고 있었다. 그 여우 발자국을 남기는 사람이 나였으니 이야기대로 된 셈이다. 


“나의 이야기가 너의 이야기를 끌어들이고 너의 이야기는 또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를 끌어들이지.” 


엄마는 노라에게 그랬던 것처럼 밤이면 잠자리에 든 나를 토닥이며 속삭이곤 했다. 


“모든 이야기는 닿아 있고 모든 이야기는 이야기 속의 사람들에겐 현실이야.” 


내게 벌어진 이 모든 이야기가 정말 엄마가, 아니 이종희가, 아니 어쩌면 홍우필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불과한 걸까? 


아무렴 어떤가. 나는 여기 있고 이 이야기는 내 이야기임으로 나는 엄연히 현실이다. 내가 내 이야기를 부정하면 나도, 나를 둘러싼 다른 사람들도 허구가 되고 말 테지. 어디든 내가 있는 곳이 현실이야. 이야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소정도, 윤원도, 노라도, 동오 형도 모두 돌아올 것이다. 


홍우필의 이야기는 어떻게 끝났을까? 그녀가 박현의와 전화를 끊는 데서 녹음테이프는 끝나버렸다. 그 이후에 그녀는 스케치를 찾았을까? 어쩌면 그전에 이미 스케치를 찾았지만 내가 듣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그녀의 이야기가 무사히 끝나려면 서른세 번째 조각인 그 스케치를 찾아 그림을 완성시켜야 한다. 


서른셋이라는 숫자에서 나는 멈칫했다. 그녀의 이야기에서 숫자가 서른셋이라면 내 이야기에서도 숫자는 서른셋이어야 했다. 서른두 장의 발자국 사진과 발자국 스케치 한 장. 서른두 개의 구멍창과 서른세 개의 구멍을 가진 바깥 담장. 그동안 내가 놓치고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이 건물에 구멍창이 하나 더 있어야 했다.


나는 건물 양 벽과 바깥 담장 두 개에 나 있는 구멍창의 위치를 서로 비교해보며 서른세 번째 구멍창이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아냈다. 이쯤이다 싶은 그 자리엔 주방 수납장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수납장 뒤에 만약 구멍창이 있다면 내 무릎 언저리쯤 될 것 같았다. 나는 수납장 문을 열었다. 공사 중 쓰고 남은 잡동사니들이 아무렇게나 처박혀 있었다. 나중에라도 혹 쓸 일이 있을까 싶어 버리지 못하고 쌓아둔 것들이었다. 나는 허리를 구부리고 앉아 전선이며 연장들을 끄집어냈다. 그러나 수납장 뒷벽은 막혀 있었다. 멍청하긴, 마음이 조급한 나머지 한심하게도 옷장을 통해 나니아의 세계로 들어갔듯 수납장을 통해 구멍창을 볼 수 있을 거라 여기며 덤벼든 것이다. 나는 내 자신에게 화를 내며 벌떡 일어나 수납장을 앞으로 끌어냈다.


수납장이 비켜난 후 드러난 벽돌 벽의 구멍창이 있어야 할 자리는 막혀 있었다. 내가 공사 당시 모든 구멍창을 살리라고 부탁했고, 처음 이 건물에 들어왔을 때 세어본 구멍창의 숫자도 서른두 개였으니 공사 중에 막은 건 아니었다. 


찬찬히 살펴보니 창틀인 것으로 추정되는 선을 따라 바깥쪽으로 약간 튀어나온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옆 벽돌과 모양이 어긋나지 않도록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 쌓아 올렸지만 벽돌과 벽돌 사이에 개어 넣은 진흙 양이 많았던 모양이다. 이 건물에서 마지막으로 살다 나간 사람이 이 구멍창들 중 한 곳에서 헛것을 보았다고 했다. 아마 그 때문에 이 서른세 번째 구멍창을 꼭꼭 발라버린 후 거짓창으로 둔갑시킨 것이리라. 


거짓창 뒤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쪼그려 앉은 채 가만히 귀를 대자 누군가 서성이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가슴이 쿵쿵 뛰었다. 벌떡 일어나 바로 곁에 있는 다른 구멍창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이 건물 입구로 올라오는 길에 마주 서 있는 두 개의 담장이 보였다. 담쟁이덩굴로 한창 우거진 담장은 온통 황록색이었다. 언덕 아래로 사람의 그림자라곤 보이지 않았다. 서성이는 발자국 소리라니? 누군가 거기 서 있다고 해도 이 거리에서 소리가 들릴 리 만무했다. 


발자국 소리는 거짓창 뒤에서만 들렸다. 나는 거짓창과 구멍창을 번갈아 보았다. 거짓창의 거짓을 벗겨내면 무엇이 보일까? 구멍창을 통해 본 정경과 절대 같지 않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소리가 덧입혀진 다른 어떤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나는 벽을 깰 도구를 찾았다. 모두 부숴버리려는 건 아니었다. 내 시선이 통과할 만큼의 구멍이면 족했다. 주방 칼로 긁적이고 망치로 두드렸다. 칼을 벽돌 틈새의 단단한 진흙에 대고 망치로 칼 손잡이 끝의 뭉뚝한 부분을 반복해서 내리쳤다. 흙가루가 투두둑 떨어지며 벽돌 파편이 튀었다. 잿빛 먼지 사이로 희미한 틈새가 벌어졌다. 나는 그 틈새 구멍에 눈을 가져갔다.


담쟁이덩굴로 뒤덮인 담장 길 반대편 끝에 어떤 여자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어디선가 본 듯한데? 그 여자가 내 쪽을 돌아보는 순간 한눈에 알아보았다. 차가운 기운이 번뜩하고 정수리부터 꿰뚫었다. 그 여자였다. 나뭇잎 발자국을 남기고 사라졌던 여자.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갑자기 온 세상이 해일처럼 들이닥쳐 나를 또 다른 세상으로 밀어냈다.


나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내가 도착할 때까지 그 여자가 거기 그 자리에 여전히 서 있기를. 가슴이 쿵쾅거렸다. 시간이 내 안에서 쏜살같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재깍재깍, 재깍재깍.

 



내가 담쟁이덩굴로 뒤덮인 담장 길 입구에 들어서자 반대편 끝에서 서성이던 여자가 나를 발견하고 내 쪽으로 한 걸음씩 걸어왔다. 바람을 따라 담쟁이덩굴이 파도처럼 술렁거렸다. 여자의 뒤쪽으로 나뭇잎 발자국이 총총히 찍혔다. 내 심장 소리가 나를 어찌나 흔들던지 현기증이 일었다. 뜨거워진 숨을 삼키고 나도 그녀 쪽으로 한 걸음씩 걸어갔다.


길 중간에서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걸음을 멈췄다. 그녀가 홍우필의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었다. 


“여우 발자국을 따라왔더니…….” 


나는 온몸으로 숨이 빠져나가는 듯 아찔해졌다. 가슴 한가운데로 종잇장처럼 얇고 서늘한 기운이 저며 들었다. 


“제 발자국이에요.” 


내가 말했다.


“이번엔 맨발이 아니네요.” 


여자가 말했다. 


“당신도요.” 


내가 말했다. 


모든 대상에는 시간이 존재한다. 과거부터 미래까지 동시에 존재한다. 당신이 보고자 한다면 당신은 석양을 그린 그림 속에서 어둠을 볼 수도 있고 새벽을 볼 수도 있다. 나는 그녀에게서 수수께끼의 해답을 보았다. 그녀가 말했다.


“당신 발자국이 여기서 끊겼어요. 그래서 기다렸죠. 여우 발자국을 따라가면 여우 발자국의 주인을 만날 수 있대요. 나는 당신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 알았어요.”


“나도 당신 목소리를 따라가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볼 수 있을 줄 알았어요.”


나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도 내게 손을 내밀었다. 우리는 에스허르의 <손을 그리는 손>*( 종이 위에 정밀하게 그려진 오른손이 왼손의 소맷부리를 스케치하고 왼손은 바로 그 오른손의 소맷부리를 스케치하고 있다. 두 손은 반대편 손이 스케치한 덕에 태어나 살아 움직이는 중이다. 1948년 작.)처럼 상대의 끄트머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곤 손을 잡았다. 한번 손이 닿자 다시는 그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따뜻한 체온이 내 손바닥에 전해졌다. 심장이 덜컹거린 나머지 나도 모르게 그녀의 손을 꽉 움켜잡았다. 그러자 그녀도 똑같은 힘으로 내 손을 꼭 쥐며 화답했다. 내가 말했다. 


“당신은 내 이야기를 읽었고 나는 당신의 이야기를 들었어요. 당신이 내가 있다고 말해줘서 내가 여기 있는 거예요.”


“당신이 있으려면 내가 있어야 하니 나도 당신이 있기 때문에 있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 하필이면 이야기 끝에서 만났네요.”


그녀가 아쉬운 듯 말했다.


“이야기 끝이라서 만날 수 있었던 거예요. 당신이 마지막 조각을 맞췄기 때문에 함께 세상도 갖게 된 거고요.” 


그러므로 그 마지막 조각의 이름은 어쩌면 ‘영원’일지도 모르겠다.**(안데르센의 동화 『눈의 여왕』에서 카이는 여왕의 궁전에서 얼음 조각으로 낱말 퍼즐을 맞추고 놀았는데 아무리 애를 써도 맞춰지지 않는 낱말 하나가 있었다. 바로 영원이란 낱말이었다. 여왕은 카이가 그 낱말을 만들면 자유와 온 세상과 새 스케이트를 주겠다고 약속한다.) 눈의 여왕은 그렇게 겨울이 아닌 한여름에 나를 만나러 왔다. 그런데 나, 이제부터 어째 동오 형과 삼각관계에 빠질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이 여자, 동오 형이 무지하게 좋아하는 여잔데. 뭐야? 그럼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라 이제부터 시작되는 건가? 하지만 나와 그녀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나야 했다. 새로 시작되는 이야기는 우리가 끌어들인 또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되어야 할 테니까.


 

자, 여기 나머지 두 개의 녹음테이프예요. 네? 마지막 하나가 왜 없냐고요? 이 이야기의 결말 부분이 담긴 서른세 번째 녹음테이프는 원래 없어요. 제가 미리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아, 말씀드리지 않았군요. 제가 요즘 정신이 없어서 깜빡했나 봐요. 정말 미안합니다.


홍우필 씨는 1979년 여름에 행방불명됐대요. 장마 기간이었다니까 6월 말이나 7월 초쯤 되겠네요. 다른 목소리로 대체해 녹음을 끝냈으면 좋았겠지만 『거기 구멍 눈 뒤에』는 당시 이미 절판된 책이라 구할 수가 없었답니다. 당시 녹음 작업을 주관하던 단체에서 소장하고 있던 것이 유일했는데 홍우필 씨가 가져간 뒤로 소식이 끊겼으니 함께 사라진 셈이죠. 


저기, 이종희의 다른 작품을 녹음한 게 있는데요. 홍우필 씨의 목소리는 아니지만 들어볼 만해요. 『무당벌레 도착지』하고 『백야의 잘록한 허리 숲』, 그리고…… 네? 홍우필 씨의 목소리가 아니면 싫다고요. 


아, 이런, 회원님, 울지 마세요. 그러니까 제가 처음부터 다른 분의 것으로 대여해 가시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아, 그리고 여기 등장하는 홍우필은 실존 인물이 아니에요. 녹음자 이름하고 똑같아서 헛갈리시는 모양인데 이건 그냥 이야기일 뿐이에요. 지재곤과 홍우필 모두 허구의 인물이라니까요. 


생각해보세요, 홍우필이 아버지 없이 태어나는 부분도 그렇고, 1979년 배경에 1997년도 영화인 <큐브>에 대해 말하는 것도 이상하잖아요. 홍우필이 읽었던 『필삼 이야기』도 1991년에 출판된 책이라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책인 데다가 여태 우리나라엔 번역되어 나온 적도 없어요. 그냥 이야기니까 그러려니 넘어가는 거라고요. 어떤 이야기들은 허구의 역사가 사실처럼 개입되기도 하고 시간의 흐름이 어긋나기도 하더라고요.


네? 그럼 이종희가 대략 40년 전에 어떻게 나중에 등장할 책과 영화를 미리 알고 자기 작품에 인용했냐고요? 


잠깐만요, 음, 분명히 그 점은 이상하네요? 회원님이 지적하기 전까지 전 왜 여태 그런 생각을 해보지 못했을까요? 그 부분은 저도 생각을 좀 해봐야겠네요. 아이 참, 이제 그만 좀 우세요. 여기 티슈요.


그래서 홍우필이 어떻게 되었는지 그 뒷이야기는 상상에 맡기는 수밖에 없어요. 알아요. 저도 열린 결말 싫어해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결말이 담긴 서른세 번째 녹음테이프가 없으니 우리로서는 등장인물 홍우필이 직접 이야기 속에서 나와 결말을 이야기해주지 않는 이상 알 도리가 없잖아요. 


희망을 가져봐요. 어쩌면 이야기 결말에서 홍우필이 그 책을 다 읽었을 수도 있어요. 그랬다면 홍우필은 자기가 읽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갔을 테니. 가만, 그럼 우리 이야기가 책 속의 이야기란 소린데?


아무튼 홍우필의 목소리 제품을 사용하고 난 후유증으로 미뤄볼 때 마지막 카세트테이프가 없는 것이 오히려 다행인지도 몰라요. 또 누가 알겠어요? 이 이야기를 끝까지 다 듣고 나면 우리가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게 될지 말이에요. 


이런, 제가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죠? 이젠 저까지 녹음자 홍우필과 책 속 홍우필을 헛갈리네요. 함께 머리 굴려 정리를 좀 해보자고요? 에이, 아무렴 어때요. 각자 생각하는 대로 가는 거죠 뭐.

 

 

 

작가 한마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