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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여우 발자국] 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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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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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어서 오세요, 책 읽어주는 목소리를 대여해드려요. 회원 가입하시면 인터넷으로 다운로드 가능하시고요, CD나 카세트테이프로 가져가실 수도 있어요. 둘러보시면서 듣고 싶은 책이나 목소리를 직접 골라 저에게 가져오시면 돼요. 책 제목이나 녹음자 성함을 아시면 말씀해주세요. 번개같이 찾아드릴게요. 


홍우필 씨요? 어디서 무슨 말씀을 듣고 오셨는지 모르겠지만 그분 목소리는 가급적 권하고 싶지 않네요. 그분 것을 듣고 나면 머리가 좀 이상해지는 것 같다고 다들 한마디씩 하시더라고요. 물론 대여가 금지되어 있지는 않아요. 다만 차후 발생할 수 있는 정신적 후유증에 대한 책임 동의서를 작성하셔야 해요. 어떤 후유증이냐고요? 일종의 중독 증상 같은 건데요. 심각한 건 아니고 그저 일상 생활에 조금, 아주 조금 지장을 줄 정도예요. 물론 사람마다 개인차가 있겠지만요.


홍우필 씨의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느냐고요? 당연히 들어봤죠. 그러니까 제가 지금 이렇게 경험자처럼 잘 설명드릴 수 있는 게 아니겠어요? 하도 말들이 많아서 저도 들어보지 않고는 못 배기겠더라고요. 압니다. 회원님도 저처럼 궁금하시겠죠. 하지만 신중히 생각하셔야 해요. 네? 방금 제가 경험자로서가 아니라 경험자처럼이라고 말씀드렸나요? 


죄송합니다. 그냥 말하는 습관일 뿐이에요. 다들 자신이 겪은 일임에도 그런 식으로 말하잖아요. 좋아요가 아니라 좋은 것 같아요, 슬퍼요가 아니라 슬픈 것 같아요. 그런 표현에 너무 집착하면 세상에 믿을 만한 이야기는 하나도 남지 않을걸요. 


제가 말씀드리는 중독의 의미는 일종의 그리움 같은 건데요, 왜 그런 거 있잖아요. 길을 걷고 있는데 어디선가 노래가 들려와요. 오래전에 즐겨 듣던 노래였는데 이젠 추억 속의 노래가 되어버린 노래죠.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노래에 귀를 기울이다가 갑자기 사무침 같은 것이 밀려들어 울컥해져요. 뜬금없이 뒤통수가 시려지며 눈물이 차오르고 늘 보던 하늘이 오늘따라 유난히 파랗고 망망하게 느껴져 심장이 아릿해지죠. 그러다가 자기 안에 묻어두고 있었던 어떤 감정에 끌려 들어가게 되고 말아요. 


홍우필 씨의 목소리는 바로 그런 노래 같은 자극을 줘요. 그 자극에 좀 심하게 반응하셨던 분들은 홍우필 씨의 목소리가 환각이나 환영을 일으키는 것 같다고 말씀하시기도 했어요. 아뇨, 무섭거나 불쾌한 감정은 아니라고들 하시더군요.


하지만 제가 분명 후유증이라고 말씀드렸다시피 현실을 망각하게 만드는 몽환적인 경험이에요. 봄날의 볕처럼 따뜻하게 보듬어지며 심장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는 상실감을 동시에 주니까요. 


저도 홍우필 씨의 목소리를 끊기까지 애 좀 먹었어요. 병원에서 상담 치료까지 받았거든요. 어떤 면에서는 팍팍한 제 삶에 달달한 위안이 되기도 했지만 어쨌든 정상적인 현상은 아니잖아요. 그러니 그냥 다른 분 목소리로 하세요. 다양하게 많은 목소리가 준비되어 있어요.


네? 바로 그런 경험을 원한다고요? 이것 참, 아니에요, 이해해요. 누구나 재미난 이야기를 듣는 동안만큼은 그 이야기 속에 빠져들고 싶어 하죠. 홍우필 씨의 목소리가 사실 그런 점에서 굉장한 마력을 갖고 있긴 해요. 


가만, 제가 지금 무슨 이야길 하고 있는 거죠? 말려야 하는데 결국 권하는 셈이 됐군요. 알겠습니다. 몰입이야 뭐 홍우필 씨의 목소리가 최고죠. 삼십 년 전 음질이긴 하지만 요즘은 워낙 복원 기술이 좋잖아요. 재녹음은 완벽하고 깨끗해요. 동그란 모양은 싫다고요? 그럼 시디는 안 되겠고 카세트테이프로 대여해 가셔야겠네요.


일단 여기에 먼저 서명해주세요. 홍우필과 관련된 음성 제품들을 듣는 동안, 혹은 듣고 난 후 발생하는 후유증에 대해 본 센터는 책임지지 않습니다. 그래요, 거기 그 난에 서명해주시면 됩니다.


차는 마지막 숨을 내뱉더니 기어코 주저앉았다. 느릿느릿 기어가던 다른 차들도 서서히 멈춰 섰다. 끔찍한 정체였다. 내 차가 고장 난 탓이 아니었다. 정체는 이미 두어 시간 전부터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목적지까지 남은 거리는 대략 3킬로미터. 초등학교 때 그 정도 거리를 걸어서 봄 소풍을 갔었으니 걷자고 들면 그럭저럭 못 걸어갈 것도 없었다. 다만 날씨가 야행 산보를 즐길 만한 다정한 상황이 아니었다.


눈발이 점점 거세졌다. 차 안에 앉아 가만히 내다보고 있자니 차창 밖 풍경이 살벌했다. 강풍이 비명을 질러대는 어둠 속의 고립. 그야말로 눈의 여왕이 강림하셨군. 이대로 내가 담긴 차를 통째로 휘감아 라플란드로 데려갈 기세였다. 한술 더 떠 차창에 하얗게 들러붙는 흰 설풍 자국이 유혹하는 여왕의 자태로 보여 흠칫 놀라기까지 했다. 여왕은 먹구름 속을 날아다니다 겨울밤이면 거리의 창문 안을 몰래 들여다보는데 그 얼굴이 마치 유리창이 얼어붙어 활짝 핀 꽃처럼 보인다고 했다. 바로 그 이야기처럼 온통 하얗기만 한 여자의 실루엣이 차창에 희고 가는 핏줄처럼 퍼져나가며 오묘한 눈짓으로 나를 들여다보는데……. 그러나 여자는 곧 몸을 일으키더니 흰 눈보라로 흩어졌다. 이제 내 눈앞에 보이는 것은 띄엄띄엄 줄지어 앉아 있는 다른 차들의 꽁무니뿐이었다.


어릴 때부터 나는 눈의 여왕이 데려간 소년 카이의 처지를 부러워했다. 나는 온전히 여왕의 고독을 이해했다. 그러므로 여왕에게 어울리는 남자가 있다면 그건 오로지 나뿐이라고 생각했다. 여왕은 너무 외로워서 카이를 데려갈 수밖에 없었다. 게르다는 흰 눈 아래 감추어진 카이의 발자국을 쫓아 깊고 깊은 고독 속에 갇힌 카이를 다시 세상으로 데려왔다. 홀로 남겨진 여왕은 차고 외로운 바람에 몸을 싣고 또 다른 누군가를 찾아 나섰으리라. 그 누군가가 나이기를 바라며 기다렸다. 여왕이 키스할 때마다 내 심장이 뾰족한 얼음 조각으로 변해도 좋으니 날 납치해 데려가줬으면. 그럼 평생 눈물 같은 건 흘리지 않고 애써 시니컬한 표정을 지을 필요도 없이 진정 바위처럼 담담하게 살아갈 수 있을 텐데. 


그러나 이제 나는 더는 그런 꿈을 꾸지 않는다. 여왕의 정체는 강추위와 한랭 공기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저 매서운 자연의 힘에 몽환적 이름을 붙여 복종하지 않을 수 없는 아름다움을 찾으려 했을 뿐. 


이번 겨울은 지난해부터 유달리 잦은 폭설과 한파에 시달리는 중이다. 지구 온난화, 북극진동, 북극 기온의 상승, 결국 여왕은 공기의 소용돌이를 빠져나와 남하했다. 


한가하게 눈의 여왕 타령이나 하고 있는 내게 라디오 뉴스 앵커가 차분한 목소리로 지금 처한 상황의 원인을 알려주고 있었다. 우리나라 5킬로미터 상공에 영하 30도 안팎의 찬 공기가 머물고 있고, 동해의 해수면 온도는 13도에서 15도로 높습니다. 상하층의 큰 온도 차로 인해 대기가 매우 불안정해져 원활한 수증기 공급이 이뤄지면서 눈구름이 크게 발달했습니다. 현재 기상청은 동해안 일대에 폭설 경보를, 중부지역에는 폭설 주의보를 발령했습니다.


듣고 있자니 더더욱 차 밖으로 나설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대로 나섰다간 눈보라가 나를 패대기칠 테고 얼굴은 북풍에 쩍쩍 찢어질 테지. 그래도 시도는 해보았다. 차 문을 열자마자 미친 곰의 발바닥 같은 힘이 나를 밀어 눌렀다. 반사적으로 힘을 줘보았지만 차 문은 순식간에 탁 소리를 내며 도로 닫혔다. 


사방팔방에서 광풍이 휘이잉, 휘이잉 메아리치고, 바람 소리가 필름처럼 좍좍 풀려나가며 내 머릿속에 중계방송 영상을 돌리기 시작했다. 소리에 민감한 사람들이 대개 그렇듯 나도 비슷한 증상을 갖고 있었다. 소리에 수반되는 장면들이 본의 아니게 저절로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이다.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늘 제멋대로 펼쳐졌다.


눈과 어둠이 뒤섞여 천지가 혼몽한 곳, 눌어붙은 냄비처럼 생긴 차 한 대가 도로에 줄지어 서 있는 자동차 행렬 속에 끼어 있다. 바퀴의 삼분의 일이 눈에 파묻혀 있는 낡은 중고 엑센트, 늘씬하게 얻어맞고 뻗어버린 고철 좀비 같다. 차체도 때 묻은 회색이라 썩다 만 상태로 냉동된 듯 보이는 칙칙한 좀비 피부색하고 잘 매치된다.

작가 한마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