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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알 유희 천만년 후] 1부. AC 1691년 9월_1화. 그리그와 프루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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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AC 1691년 9월_1화. 그리그와 프루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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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AC 1691년 9월

1. 그리그와 프루스트



2년 전, 내가 코델리아호에 승선하게 된 것은 열렬히 자원해서가 아니라 코델리아호의 캡틴 로저가 나를 찍었기 때문이었다. 그 시절 나는 베네치아의 허름한 뒷골목에서 아버지와 두 형들 틈에 끼어 숨 막히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찢어지게 가난한 것은 아니었지만 뭔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을 만큼의 여유는 없었다. 형들은 빠듯한 삶에 적응했고 나는 탈출을 꿈꿨다.


사람들이 땅바닥만 내려다보며 걷는 동안 나는 고개를 들고 천공에 뿌려진 참깨들을 헤아렸다. 변변찮은 잠자리에서 눈을 감을 때마다 어디론가 떠나는 꿈을 꾸었다. 그 꿈을 현실로 바꾸는 것이 당시 열여덟 살이었던 내 삶의 목표였다.


처음에 나는 말레이시아로 가려고 계획을 짰다. 일단 내가 사는 베네치아와 같은 나선궤도 17구간에 속하고 바다가 있다고 해서 무작정 정한 것이었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비용 문제였다. 다른 구간으로 이동하려면 범구간 광역 항공기를 타야했는데 항공료가 만만치 않았다. 나는 한 번에 멀리 가는 것을 포기하고 징검다리를 건너기로 했다.


말레이시아 다음에 딛을 징검다리는 일단 그곳에 도착한 후 상황을 보아가며 정하기로 했다. 어차피 정해진 최종 목적지 따위는 없었다. 어디든 지금 있는 곳에서 최대한 멀어지면 족했다.


그런데 이 계획을 실행에 옮기려 할 때마다 희한하게도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뻔뻔한 손이 나타나 가로막았다. 작은형이 싸움을 해서 누구 코를 부러뜨리는 바람에 급하게 병원비가 필요하다거나, 아버지의 월급이 제때 나오지 않아 내가 모아 둔 돈을 생활비로 내놔야만 한다거나. 어느 정도 돈이 모이면 매번 귀신같이 털어가는 아버지와 형들 때문에 말레이시아로 가겠다는 내 꿈은 점점 멀어졌다.


그러나 나는 좌절하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돈을 벌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고 도서관에 취직했다. 오전 아홉 시부터 오후 일곱 시까지 창고와 열람실 서적을 정리하고 서류 업무를 보조했으며 각종 공연 티켓을 판매했다.


내게 고정 수입이 생기자 아버지는 일주일에 두 번만 제련소에 출근했고 큰형은 막내가 마침내 제 밥벌이를 하게 되었으니 이제 마음 놓고 집을 떠날 수 있게 되었다며 원거리 직장에 취직했다. 작은형은 나를 지나치게 믿은 나머지 마음 놓고 즐기듯 하루걸러 사고를 쳐댔다.


나는 집에 돌아오면 싸움꾼인 작은형과 게으름뱅이 아버지의 치다꺼리를 해야 했다. 그들이 벗어 놓은 추저분한 옷을 빨고 쌓인 설거지를 하고 장을 보고 식사 준비까지. 대체 내가 왜 이들의 엄마 노릇을 하며 가장이 되어야만 하는지 약이 올랐다. 나는 내가 아버지와 형들보다 지나치게 높은 이상을 가졌다는 사실에 의문을 품으며 출생의 비밀을 의심했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의 자식이었고 형들의 동생이었다. 다만 그들을 닮지 않았을 뿐이었다. 나만 유일하게 엄마를 닮은 것이다. 엄마, 어떤 여자인지 잘 모른다. 그녀는 오래 전에 이 집에서 탈출했다. 나만이 가족 중에서 유일하게 탈출을 꿈꾸는 것은 아마도 그녀를 닮았다는 결정적인 증거일 것이다.


나는 아버지와 우리를 버리고 도망간 그녀의 입장을 이해했다. 그녀는 내가 아니라 저 세 남자 때문에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저들은 양말 같은 존재들이었다. 어제 벗겨져 한쪽 구석에 처박혀 있다가 오늘 다시 냄새를 풍기며 신겨지는… 빌어먹을! 내가 엄마였어도 알록달록한 새 남자가 생기면 냉큼 바꿔 신고 도망가 버리겠다.


묵은 양말들은 나를 간섭하지 않았다. 그저 심부름을 시키고 돈을 달라고 손을 내밀 뿐이었다. 나는 멋대로 자랐고 그들은 날이 갈수록 타락했다. 나는 내가 사라져야만 아버지와 작은형이 다시 건전한 근로자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저들을 위해서라도 나는 반드시 집을 떠나야만 하는 것이다.


문제는 저들이 나를 계속 무일푼 상태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진실로 자유로워지려면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세상에 던지고 그냥 앞으로 나아가면 된다던가. 그러나 나는 준비가 필요했다. 나는 나를 막무가내로 세상에 내던져 굴릴 수 없었다.


한편으로는 두려웠다. 평생 준비만 하다가 시작도 못해보고 끝난 인생을 수없이 보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분노만 키워가고 있었다. 어쨌거나 현실은 용기만으로는 헤쳐 나갈 수 없었다. 돈이 필요했다. 젠장, 우라질.


우리는 불확실과 과장의 세계에서 살고 있었다. 지구 반대편에 무지했던 AD 시기 중세 유럽과 흡사한 지경이었다. 우리는 우리가 속한 나선 구간을 벗어난 세계에는 무지했다. 그러나 유리알 유희자들은 유리알의 빛을 통해 시간이 숨긴 세상의 모든 것을 알아낸다고 했다. 나도 빛이 되어 빛을 누리고 싶었다. 바깥 세계로 나가 그들처럼 아는 자가 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나는 덫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이러다 결국 아버지나 형들처럼 천천히 시간을 까먹으며 시들시들 나이를 먹어갈 테지.


17구간 너머 다른 참깨 도시들로 운항하고 도약하는 화물선, 우편선, 군함, 여객선, 무역선 뜨내기들이 전해주는 이런저런 소식들을 접하며 조금씩 미쳐가고 있던 내 앞에 어느 날, 로저가 나타났다. 만약 그 때 그를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베네치아의 어느 하수구 속에서 발광한 쥐 같은 몰골로 발견되었으리라. 결국 집을 나가긴 했을 테니까.


그날 저녁 아홉 시쯤, 나는 아버지와 작은형이 돌아오기 전에 대강 끼니를 때우고 집을 나섰다. 어둑한 거리를 혼자 걷는 것이 그때 나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나는 거리에서 안락함을 찾았고 그 안락함의 종착지는 브랜든의 고서점이었다.


예순을 바라보는 브랜든은 그 시각이면 카운터 뒤에 앉아 저녁을 먹었다. 책이 있는 곳에서 음식을 먹는 것은 죄악이다. 내가 도서관에 취직한 이후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반복해서 들은 규정이었다. 그러나 브랜든은 점원을 고용할 형편이 아닐 뿐더러 고서점을 비울수도 없었다. 고서점은 언뜻 보기엔 고물상처럼 보였지만 아는 이에게는 어떤 책을 찾아내느냐에 따라 일확천금을 얻을 수도 있는 보물선이었다.


어쨌든 브랜든은 끼니를 해결해야 했다. 브랜든은 손님들이 얼른 눈치 채지 못하도록 카운터 밑에 쪼그리고 앉아 서점 내부를 비추도록 걸려 있는 거울을 올려다보면서 신중하게 식사를 했다.


그곳에서 나는 <찰스 램의 수필집>과 <천 가지 유령이야기> 라는 두 권의 닳아빠진 책을 두고 고민에 휩싸였다. 나는 수필집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찰스 램의 것은 예전부터 갖고 싶었다. 하지만 진짜 읽고 싶었던 쪽은 <천 가지 유령 이야기>였다. 갖고 싶은 책과 읽고 싶은 책이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을 그날 나는 처음 알았다.


<천 가지 유령이야기>는 내가 모르는 참깨 도시의 표의 문자로 쓰여 있었다. 사봐야 어차피 당장 읽을 수 없는 책이었다. 그러나 내가 꼭 읽고자 한다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있을 것이다. 나는 두 권을 모두 사고 싶었지만 주머니 속 돈을 아무리 긁어모아도 한 권을 살 돈 밖에는 되지 않았다. 몹시 우울해진 내가 두 권의 책을 든 채 어느 것을 선택할지 이리저리 재고 있는데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퀴즈 하나 낼까?”


로저는 이후에도 종종 이런 퀴즈 놀음을 즐겼다. 이는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결정된 게임의 연속이었다. 초반에 나는 그의 물음에 대답하지 못하는 것들이 수두룩했지만 2년이 지난 지금은 몰라도 척척 대답해낸다. 대답이라기보다는 사실 말대꾸나 궤변에 가까웠지만.


그의 퀴즈가 가진 의도에 대해서는 나도 아직 잘 모른다. 나를 위한 지적 훈련일 수도 있었고 그의 개인적인 재미일 수도 있었다. 어쨌든 로저와의 퀴즈 문답이 숙달됨에 따라 내 소양도 왕성하게 확장되었다.


나는 로저에게서 하나의 질문과 하나의 답을 들으면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을 찾아 읽고 이해하는데 주력했다. 나는 기본적으로 바벨의 도서관 널뛰기에 흥분하는 타입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늘 로저를 따라잡기 위해 가랑이가 찢어지도록 뛰고 있는 중이었다.


로저가 쓸데없는 짓으로 시간 낭비하는 일이 거의 없는 사람임을 감안한다면 애초에 그가 브랜든 고서점에서 나를 걸고 수수께끼를 들이민 것은 치밀하게 의도된 테스트일 가능성이 있었다. 아니면 자신의 해박함을 자랑하고 싶은 상대로 우연히 나를 걸었는데 내가 그만 홀랑 넘어간 것이거나. 내게서 예상 밖의 재미를 느낀 로저가 그만 그답지 않게 충동적인 제안을 한 것이다. 나를 따라 코델리아호로 가면 먹여주고 재워 주겠다. 대신 매일 나랑 퀴즈 놀이를 하는 거야.


로저의 의도가 무엇이건 나, 알토니 알리기에리가 아니면 도대체 누가 그와 이런 지적 유희를 즐길 수 있단 말인가. 그러므로 나는 코델리아호에서 로저의 뒤를 이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뭔데요?”


낯선 사람의 느닷없는 질문에 나는 누구세요? 라고 묻지 않았다. 그가 누구인지 보다는 뭘 물을지가 더 궁금했다. 그가 물었다.


“그리그와 프루스트의 공통점은 뭘까?”


AD시대 예술가들의 이름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을 수 있다는 것은 그가 지식인이라는 뜻이었다. 또한 나와 같은 부류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자신의 방문을 닫고 책장을 펼치면 꿈과 현실이 뒤바뀌는 마술에 걸리는 사람들. 과거 그 시절을 풍미했던 고유명사들은 일반적으로 같은 부류끼리 통하는 공감과 교감의 암호였다.


“내가 그걸 왜 맞혀야 하는데요?”


나는 삐딱한 청소년의 전형적인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식사를 하다 말고 양 볼이 불룩한 채로 브랜든이 카운터 밑에서 고개를 삐죽 내밀었다. 자신의 단골 고객들끼리 이야기 중인 것을 확인한 브랜든의 머리는 곧 다시 카운터 밑으로 내려갔다. 로저가 말했다.


“취직시험이니까.”


“전 지금 일하는 곳이 있는데요.”


“대답이 마음에 들면 내가 너를 스카우트할거야.”


그리그와 프루스트의 공통점? 나는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리그는 노르웨이의 열렬한 민족주의 작곡가였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스코틀랜드인이었다. 그런데 왜 그는 노르웨이 민족주의자가 된 것일까? 단지 아버지보다 어머니를 더 사랑해서?


그럼 프루스트는? 노르망디의 해변, 파리 샹젤리제, 천식,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나열하고 꼽아보아도 얼른 두 인간의 공통점을 찾을 수가 없었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면 될 것을 괜한 오기가 생겼다.


“스카우트요? 전 학교 그만 둔지 한참 됐어요. 게다가 누가 봐도 제가 스카우트해 갈 만큼 쓸모 있는 놈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거 알아요. 어떤 사업장을 가졌는지는 모르겠지만 학교 졸업자들 중에서 뽑으시죠. 괜한 사람 귀찮게 하지 말고.”


“가르쳐서 쓸 거야.”


“그러니까 가르쳐서 쓸 만한 소년들은 저 아니어도 널렸다고요.”


“나는 고서점을 들락거리는 소년을 원해. 나랑 죽이 맞아야 하니까.”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소년은 나뿐이었다. 자격이 고서점을 들락거리는 소년이어야만 한다면 칼자루는 내게 쥐어져 있었다.


“저랑 죽이 맞는지는 제 쪽에서도 시험해보고 싶은데요.”


“어차피 결과는 마찬가지니까 뭐든 멋대로 해봐.”


사실은 그에게 질문을 해서 내 대답의 힌트를 얻어 보려는 속셈이었다.


“그리그는 왜 열렬한 노르웨이 민족주의자가 된 걸까요? 절반은 스코틀랜드인이잖아요.”


“그야 피요르드의 깊고 어두운 서정에 반해서지. 음악을 들어보면 모르겠나? 힌트가 필요한 모양이지?”


그는 이미 내 속을 간파하고 있었다. 나는 내 눈앞에 있는 적수가 아주 영리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코르크와 오두막!”


코르크와 오두막? 그게 뭐야? 한 사람은 주정꾼이고 또 한 사람은 가난뱅이란 뜻인가?


“아직도 감이 안 오는 모양이로군. 소음이야. 프루스트는 귀에 코르크 마개를 하고 글을 썼고, 그리그는 외딴 오두막에서 출입금지 노란 띠를 둘러놓고 작곡을 했지. 그 둘은 소음이 있으면 일을 하지 못했어.”


“제길, 그랬나요?”


힌트를 얻고도 답을 맞히지 못해 나는 분한 마음이 들었다.


“자, 이제 별 볼일 없어진 이 퀴즈 탈락자는 본체만체 하시고 다른 똘똘한 소년을 찾으러 가보시죠.”


내가 비아냥거리자 그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이미 말했지만 난 정규 교육을 제대로 받은 똘똘한 소년이 아니라 내가 가르쳐서 쓸 만한 소년을 찾고 있어. 어때? 그 책 두 권 모두 너에게 사줄 테니 날 따라 가자.”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데요.”


“너를 내 수습생으로 고용하겠다고.”


“그러니까 책 두 권으로 저를 사시겠다고요?”


내 말을 들은 그가 화사한 오렌지 빛 눈동자를 반짝이며 픽 웃었다. 내 응수가 전혀 틀린 건 아니었다. 책 두 권은 말하자면 일종의 계약금이었고 계약금은 수습생의 몸값이었다. 수습생이 수습기간 중에 먼저 파기를 요구하려면 계약금의 두 배를 반환하면 된다.


“왜 내가 당신 눈에 든 거죠? 퀴즈의 정답도 맞히지 못했는데.”


“퀴즈의 정답이 내가 원한 답은 아니니까.”


“뭐가 그래요?”


“난 답을 알고 있으니 꼭 정답이 나오지 않아도 된다는 소리야. 대신 넌 내게 문제를 내밀었어. 난 답보다는 문제를 더 좋아해. 더 많은 문제의 제기는 더 정확한 답에 도달하도록 만들지. 난 하루살이에게는 속지 않아. 오랫동안 가짜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보니 저절로 알아볼 수 있게 되었지.”


“뭘요?”


“인간을.”


“뭔 소린지 모르겠지만 세상에 하루살이 인간이란 없어요. 아무도 하루만 살고 죽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고요. 그날이 주어진 생의 전부라고 여기며 사는 건 삶에 충실하다는 의미죠.”


“숨겨진 세상으로 가는 길은 충실한 삶과 동떨어져 있지. 넌 지식에 굶주려 있고 난 그걸 알아볼 수 있어.”


“전 지금 도서관에서 근무해요. 그런데 어떻게 지식에 굶주려 있을 수가 있죠?”


나는 뜨끔했지만 마음을 감추고 반박했다.


“유리알을 굴려보고 싶은 욕망은 가끔 진짜 인간의 본성과 맞닿는 길이 되기도 하지.”


“현실적으론 쓸모없는 인간이 될 소지겠죠. 말 그대로 유리알이나 굴리는...”


“뭐, 그럴 수도 있고.”


그의 스페니쉬 오렌지 빛 눈동자가 꿈꾸듯 반짝였다. 나도 저 남자 같은 눈빛으로 누군가를 바라보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에게는 말레이시아로 떠나는 것이나 눈앞에 나타난 낯선 남자를 따라가는 것이나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내 목적은 일단 집을 떠나는 것이었다. 이 남자를 따라가 영 아니다 싶으면 계약금의 두 배, 즉 책 네 권을 그에게 던져주고 수습생인지 뭔지를 그만 두면 되는 것이다. 나쁘지 않았다. 그래도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하필 나지?


“여기서 반나절만 기다려 봐요. 나 같이 책방먼지를 흡입하면서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 못하고 해롱거릴 애들을 또 보게 될 테니까요.”


그는 내 손에 들린 <천 가지 유령이야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네가 모르는 언어로 된 책을 사려고 하는 것은 언젠가 그 책을 읽게 될 자신을 보았기 때문이지. 난 그 맹랑한 교만이 마음에 들어.”


“농담하지 마세요.”


“진심이야. 넌 분명 나의 코델리아가 마음에 들 거야. 장담하지.”


“코델리아라고요? 이런, 젠장, 당신, 혹시, 로저?...”


“맞아. 내가 로저야.”


작가 한마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