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rybook

[유리알 유희 천만년 후] 서장

이전 다음
최상단 최하단

서장

  • WHITE


<서장>


죽음의 순간이 닥쳤을 때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될 것은 파이 아가씨였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그 다음은 질서에 대한 충성이나 거룩한 인류애 같은 것이 될 수도 있겠지만 장담은 못하겠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우주전쟁, 돌연변이, 공중전투, 정치적 음모와 같은 거창한 것들이 아니라 (뭐 그 비슷한 사건들이 내내 줄지어 일어나긴 했지만) 이 세계에서 누렸던 일상의 추억, 함께 했던 사람들, 그리고 한시도 쉬지 않고 갈구했던 사랑 같은 것들이다.


나는 과거로 돌아가는 방법을 안다. 로저가 다루는 유리알 구조물을 통해서 처음 그 신비의 길과 접촉했다. 로저가 유리알들을 움직이면 내 귀에 음악이 들렸다. 로저의 유리알들이 연주 소리를 내는 것은 아니었다. 유리알들은 다만 근사하고 매혹적인 빛의 산란을 보여줄 뿐이었다.


그런데 그 빛의 기교가 소리를 만들었다. 성당에 들어서면 파이프 오르간 소리를 연상하듯, 파이프 오르간 소리를 들으면 성당을 떠올리듯 말이다. 장소는 음악을 그리게 했고 음악은 다시 장소를 바꿨다. 그런 식으로 음악은 시간을 거슬러 나를 다른 곳으로 데려갔다.


AD 16세기를 느끼고 싶다면 베가스 오페라를, 바로크 시대로 돌아가고 싶다면 바흐를 듣는다. 열병과 불행으로 끌날 내 사랑을 꿈꿀 때면 슈베르트를, 관계와 세계의 배신에 지쳐 영원한 침묵과 안식이 필요할 때면 베르디를 듣는다.


이건 베르디다. 유리알들의 찬란한 빛이 안개 낀 포강과 롬바르디아 평야를 적시는 비를 뚫고 나를 부지런히 과거로 인도한다. AD 19세기를 거의 모두 산 늙은 주세페 베르디가 보인다. 그가 젖은 구둣발로 돌아와 부엌 화덕 옆 의자에 던지듯 엉덩이를 처박으면 나는 마른 수건을 건네주고 그의 장화를 벗겨주는 하인이 된다. 잠깐, 하인이라니? 내가 하인? 하인은 곤란하지. 생각을 해 보자.


그렇지! 그 장면에서 숄을 걸친 주세피나 스트레뽀니가 들어선다. 그녀는 그가 청년시절부터 함께 해온 오랜 친구이자 연인이자 아내다. 그녀가 베르디를 다정하고 측은하게 페피노! 라고 부르며 장화를 벗겨준다. 그는 그녀를 페피나! 라고 부르며 외출 때 겪었던 사소한 일들에 관해 아이처럼 불평한다.


음, 괜찮군. 기왕이면 하인보다는 안주인이 되어야겠다. 코델리아호의 캡틴 로저가 페피노라면 나는 코델리아호의 안주인 페피나 쯤은 되어야지.


아, 노파심에 덧붙이는데 이 같은 부부관계는 어디까지나 내가 이 집단 내에서 마땅히 차지해야 할 직분을 비유한 것에 불과하다. 사실 로저와 나는 인위적으로는 사제 관계이며 한 배를 탄 동지였다.


그러나 인간은 가끔 어떤 감정적인 부분에 있어서 거스를 수 없는 본능의 지배를 받는다. 이는 당사자의 의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대개는 지성과 이성이 이를 제어한다. 그 자연스러운 현상에 따르면 로저와 나는 적이었다. 그러니까 적어도 내 입장에서는 그렇다는 말이다.


나는 로저의 연인인 파이 아가씨를 남몰래 사랑하는 중이었고 그의 소유물과 재능을 돈으로 환산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런데 왜 하필 로저와 나의 관계를 부부에 빗대어 이야기하느냐고 묻는다면, 부부의 재산은 갈라서기 전까지 공동소유이기 때문이다.


로저가 손을 뻗어 유리알 하나를 건드렸다. 눈으로는 가늠이 되지 않는 가늘고 투명한 줄에 꿰인 유리알들이 자르르 움직이며 배열을 바꿨다. 진동에 민감한 유리알들이 위치를 바꾸면 빛의 반사각도가 달라지기 때문에 색이 변한다. 빛의 조화로 만들어진 모든 이미지가 바뀌는 것이다. 좀 전에 로저가 만들어 냈던 빛의 이미지는 내게 AD 19세기의 이탈리아를 그리게 했다.


이번에는 유리알들이 뿌리는 빛의 구성이 낯설었다. 이제 내 귀에는 로저가 듣고 있는 음악이 들리지 않았다. 코델리아호의 나지막한 엔진소리와 참깨들 사이를 떠도는 바람 소리 뿐이다.



천만 년 전 그 날, 지구가 쪼개졌다. 규산염 광물질로 이루어진 지각과 반고체 상태의 맨틀 일부를 포함해 두께 수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지구의 외피가 갈라지고 부서지고 떨어져나가 샐러드 위에 흩뿌려진 참깨들처럼 천공으로 흩어졌다.


콩이나 좁쌀이라고 부를 수도 있었지만 우리는 굳이 그 조각들을 참깨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참깨에는 콩이나 좁쌀에는 없는 오래된 미신과 마법적 힘이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참깨들은 행성처럼 떠돌며 나선궤도를 형성했다. 나선궤도를 형성하는 이 불가사의한 힘의 원리는 아직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더욱 참깨라고 부르는 것에 집착했다. 참깨가 참깨라 불리지 않으면 참깨를 붙잡아 주고 있는 저 마법적 힘이 사라질 거라고 믿었던 것이다.


나선궤도의 중심에는 열기에 휩싸인 옛 지구가 여전히 자전과 공전 중이었다. 우리는 그 불덩어리만을 지구라고 불렀다. 가끔은 열 받은 땅콩이라고도 불렀고. 지구는 천만 년 전 지구의 자리를 그대로 지키고 있었지만, 지구를 중심으로 자전과 공전 중인 참깨들은 나선궤도를 그리며 지구로부터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참깨들의 모양과 크기는 제각각이었다. 너무 작아서 일출과 일물이 하루에도 서너 번씩 찾아오는 참깨들과 참깨라고 부를 수도 없는 부스러기들이 있었으며 대양의 48퍼센트는 물방울들로 흩어져 공중을 떠돌았다.


이 거대한 바다 조각들은 자체회전력 덕분에 인공 중력이 생겨 어느 정도 형태를 유지하기는 했다. 그러나 가벼운 외피로만 이루어진 중력 불안정 참깨와 크게 다르지 않았기에 늘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


옛 지구는 나선궤도의 중심축을 지켰다. 그 모습은 마치 떠나버린 자식들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어머니 같았다. 천만 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어머니를 바라보는 우리의 감정은 무덤덤해졌다.


어머니는 우리가 다시 모일 그 날을 홀로 뜨겁게 애태우며 기다리고 있었지만 조각 난 참깨들이 다시 붙을 확률은 0퍼센트였다. 나선궤도를 따라 점점 멀어지고 있는 참깨들은 언젠가 옛 지구와 태양의 중력에서 벗어나 열린 우주의 미아가 되거나 팽창에 팽창을 거듭하다가 스스로 쪼개져 유성이 되어 사라질 것이다.


우리는 과거의 지구가 언제 어떻게 지금처럼 쪼개져 버렸는지 모른다. 언제인지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그 날 이후, 민족과 국가는 사라지고 참깨만 남았다. 우리는 그 참사의 날을 기준으로 그 날 이후와 그 날 이전을 구분할 필요가 있었다. 하나의 구체를 함께 소유했던 과거와 각자 혹은 집단이 그 조각을 각기 소유하는 지금을 어떤 절대적 용어로 갈라놓아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궁리를 해보아도 적당한 용어를 찾을 수가 없었다. 오직 ‘그 날 이후’ 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았기에 결국 AD(After Day)로 정했는데 알고 보니 옛 지구의 기원 후 연대표기와 중복이 되지 뭔가. 별수 없이 우리는 AD를 다시 AC(After Creation)로 바꿨다.


시간의 기준점을 상실한 우리는 AD 시대가 끝나고 그 날을 겪은 후, 다시 AC 시대가 시작되는 사이에 대략 천만 년의 간격이 있었다고 결정했다. 즉 천만 년이라고 정해진 이 숫자에는 전혀 진실이 담겨 있지 않다는 뜻이다.


우리의 선조들은 AD 시대의 잔해와 폐허를 뒤져 거의 모든 문명을 AD시대와 유사하게 복구했다. 실제로 이 같은 성과들은 모두 유리알 유희자들의 덕이었다.


유리알 유희자들은 언어와 문자기록 없이도 대상물의 이미지를 통해 정보를 습득해냈다. 본래 유리알 유희에 사용하는 언어는 일반적인 언어가 아니라 고도의 기호법과 문법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상통하는 주제가 말하는 이미지의 기호화를 통해 다른 분야로 건너 뛸 수 있는 것이다.


유리알 유희자들은 자연에서 주운 돌에 나타난 독특한 문양에서 직물직조의 법칙을, 건축을, 조각을, 비례를, 숫자를, 언어를 다시 회복시켰다. 그런 식으로 유리알 유희자들은 존재하는 모든 자연과 대상물에 유기적으로 은닉하고 있던 지식과 지혜를 읽어냈다. 각 유희자의 정신세계가 확장시킨 정보는 또 다른 유희자의 확장 정보와 만나 더 크게 확장되었다.


우리가 사는 지금의 세계는 그렇게 복원되었다. 우리는 새 것을 창조하기 위해 시간을 거슬러 옛 것을 뒤졌다. 옛 것이 곧 새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우리 시대가 알아 낸 유일한 진리였다.

작가 한마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