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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에게 날 데려가 줘] 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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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 WHITE

그날, 열한 살짜리 소년은 꿈속에서 음악소리를 들었다. 귀에 익은 음악이었다. 아버지가 어깨를 으쓱거렸고, 엄마는 머리칼이 찰랑거릴 정도로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내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꿈이라면 내가 보여야 했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눈을 떴다.


- 어라, 우리 도련님 깨셨네?


- 동현아, 우리 같이 춤추자!


어쩐 일인지 나는 엄마에게 안겨 있었다. 엄마가 입을 맞추었다. 엄마의 입에서 술 냄새가 났다. 탁자 위에 기다랗고 까만 술병이 놓여 있는 게 보였다. 둥그런 잔에는 그 술병에서 따른 붉은 술이 담겨 있었다.


아버지가 결혼하기 전부터 가지고 있었다는 오디오에서 귀에 익은 노래가 들려왔다. 꿈속에서 들었던 그 노래였다. 나를 저 달로 데려다 주세요. 별들 사이로 빠져나가 목성이랑 화성의 봄을 보러 갈래요……영어로 된 그 노래의 가사를 아버지가 우리말로 옮겨주었다. 그 노래의 제목이 'Fly me to the moon' 이란 걸 알게 된 건 그로부터 몇 해가 더 지나 중학교에 입학한 뒤였지만.


- 화성에도 봄이 있어?


내가 물었다. 아버지가 웃었다.


- 그럼. 여름도 있고, 가을도 있지.


- 거짓말.


- 거짓말 아닌데?


- 화성엔 모래밖에 없어. 그러니까 화성엔 봄이 없어.


- 동현아, 봄은 어디에나 있는 거야. 여름도, 가을도, 겨울도 어디에나 있어. 다만, 우리랑 다를 뿐이지. 그러니까, 지구의 봄이랑 화성의 봄이 다른 거야. 지구에서 봄이 되면 꽃이 피고, 따뜻한 바람이 불잖아. 대신 붉은 모래가 많은 화성에는 봄이 오면 봄의 모래바람이 날려. 여름엔 여름의 모래바람, 가을엔 가을의 모래바람.


- 거짓말…….


나는 말끝을 흐리며 동의를 구하듯 엄마를 올려다보았다. 엄마는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아빠 말씀이 맞아, 하고 말했다.


- 화성에도 봄이 있고, 목성에도 봄이 있어. 그러니까 저 아가씨가 예쁜 목소리로 자기를 화성이랑 목성에 데려달라고 하는 거잖아.


거기까지였다.

더 이상의 그날에 대한 기억은 없었다. 마치 그날 그 순간,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린 것 같았다. 마치 등이 굽은 노인과 헐렁한 붉은색 파카를 입은 아주머니가 그 집에서 나간 뒤로 아무도 오지 않은 것처럼.


“이제 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층 뒷계단으로 통하는 출입문으로 걸어갔다. 그리곤 문 한 가운데 꽂힌 잭나이프를 뽑아냈다.


“안 갈 거야.”


“가!”


나는 잭나이프를 왼손으로 말아 쥐며 낮게 외쳤다. 그리곤 여자애를 향해 돌아섰다. 파란색과 흰색이 겹쳐진 여자애의 체크무늬 남방셔츠 단추가 모두 풀려 있었다. 브래지어에 감싸인 납작한 가슴과 앙상한 갈비뼈가 셔츠 밖으로 드러나 있었다. 누런 얼굴과는 달리 몸은 새하얬다.


나는 고개를 돌리지도 못한 채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꽤 오랜 뒤에야 내 입에서 “단추 잠가,”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거기다 떨리기까지 했다.


“가.”


나는 침을 삼키며 잭나이프를 쥔 왼손을 말아 쥐었다.


“날 갖기 싫으면, 얘기라도 들어줘.”


모두 풀어버린 셔츠 단추를 하나씩 잠그며 윤희가 낮게 중얼거렸다. 거의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낮았지만 그 소리는 천둥보다 크고 또렷하게 내 귀를 때렸다. 나는 잭나이프의 칼날을 접어 뒷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윤희는 창가로 걸어가더니 커튼을 반쯤 가렸다. 내 발치에 닿아 있던 햇살이 1미터쯤 물러났다. 윤희는 창가에 놓여 있던 플라스틱 의자를 들고 내게로 다가왔다. 그리곤 거기에 앉더니 나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내 눈은 방바닥에 붙박여 있었지만 윤희의 시선은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아무도 내 얘길 들어주지 않았어.”


여전히 높지 않았지만 윤희의 목소리는 정확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는 더 이상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 마. 소용없는 일이야. 너도 알고 있어. 넌 지금 네 얘길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지만 난 아냐. 난 누구의 얘기도 들어줄 수 없어. 내 얘기를 아무도 들어줄 수 없듯이.


4학년 때 이후로 처음 하는 거라고 얘기할 때 윤희의 스커트 주머니에서 휴대폰 진동음이 울렸다. 윤희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진동음이 사라졌다. 멀리서 자동차가 급정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라한테도 안 했어?”


“스칼렛 언니는 예외야. 그 언니한테는 무슨 얘기든 다 해. 그 언니는 천사야.”


“틀린 얘기는 아니지.”


소라는 착했다. 해마다 착한어린이상은 늘 소라의 차지였다. 하지만 중학교에 들어가고 두 달쯤 지나 만난 소라는 뭔가 달랐다. 소라네 집에 엄마와 함께 놀러갔을 때였다. 소라의 방에서 컴퓨터게임을 하고 난 뒤, 소라가 불쑥, 중학생이 되니까 좋아, 라고 말했다.


- 왜?


- 더 이상 착한어린이상 같은 유치한 걸 안 받아도 되니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소라가 일진에 들어갔다는 소문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왠지 물을 수가 없었다. 사실이어도, 사실이 아니어도, 좋을 것 같지 않았다.


- 세상에 착한 사람은 없어.


비웃음 같기도 한 기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소라를 나는 마치 플레이스테이션을 처음 보았을 때처럼 경이로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초등학교를 함께 다니는 동안 줄곧 같은 반이었지만 소라와 내가 친해진 건 5학년이 되어서였다. 키가 작아서 늘 맨 앞자리에만 앉았던 소라가 갑자기 커져서 뒤쪽에 있던 내 자리 옆으로 오게 된 게 5학년이 시작되었을 때였다. 우리는 둘 다 책을 좋아해서 쉬는 시간에도 나가서 놀지 않고 나란히 앉아 책을 읽곤 했다. 그래서 우리에게 붙여진 별명이 독서남매였다. 소라가 내게 가장 많이 한 말은 “넌 좋겠다, 아빠가 소설가라서,” 라는 거였다.


- 착한 사람은 착한 사람이 필요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야.


나는 소라의 말에 충격을 받았지만 왠지 기분이 좋았다. 마치 거추장스럽던 허물을 완전히 벗어버린 느낌이었다. 소라의 눈이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 눈은 “넌, 착한 애야?” 하고 묻는 것 같았다. 나는 마치 그 물음을 직접 받기라도 한 듯 고개를 저었다. “세상에 착한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 같진 않지만, 내가 착한 사람이 아니란 건 알아.” 나는 그 말을 입속에다 가득 넣은 채로 우물거렸다. 소라는 내 입속에 든 그 말을 듣기라도 한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곤 한쪽 입꼬리를 귀 쪽으로 비틀어 올리며 말했다.


- 사람들은 얘기를 들어주기만 해도 착하다고 해. 가만히 있기만 해도 착하다고 하고, 고개만 끄덕여줘도 착하다고 하지. 속으론 바보라고 하면서.


이후로 소라와 나는 급속도로 친해졌다. 우리는 서로의 집을 오가며 공부를 하기도 했고, 함께 시내로 가 영화를 보거나 노래방을 가기도 했다. 손을 잡거나 입맞춤을 한 적은 없었지만 누구도 우리를 소꿉친구 정도로 보지만은 않았다. 소라는 어떤 생각이었을지 몰라도, 내게 소라는 분명히 소중한 여자 친구였다. 소라가 일진이라는 사실을 확인했을 때도 내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스칼렛 언니가 오빠 엄청 좋아했다던데. 하지만 오빤 차갑기만 하고.”


윤희의 말에 피식 웃음이 일었다. 그러자 윤희가 손뼉을 치며 호들갑을 떨었다.


“웃었다. 와! 오빠, 웃었지? 맞지?”


“조용히 해!”


얼른 손으로 입을 가렸지만 윤희는 온몸으로 웃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호들갑스럽게 웃을 일인가 싶었다. 윤희는 마치 마법에 걸려 웃음을 잃었던 아이가 웃음을 되찾은 것 같았다. 하지만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내 눈길에 닿은 윤희의 눈에는 기묘하게도 웃음기라곤 없었다. 그것은 마치 인형의 눈처럼 차갑게 반들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그 순간, 팔뚝에 소름이 돋고, 등줄기로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비로소 윤희라는 이름이, 어두운 내 기억의 창고 깊은 곳에서 먼지를 털어내며 일어서고 있었다.


- 열 살 때 처음 제 아빠한테 당한 애가 있는데…….


소라로부터 그 얘기를 들은 건, 아버지가 봉화에 있는 요양원으로 떠날 즈음이었으니까 중학교 3학년으로 올라가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 동현이 너, 영어 잘하지? 이거 좀 해석해봐. 그 애가 갖고 있던 거야.


소라가 보여준 것은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에 실린 기사였다. ‘살인유전자 탐색’이라는 제목이 눈을 확 잡아끌었다.







작가 한마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