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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이르는 길] 03화_열려라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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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화_열려라 문

  • WHITE

은서가 사라지기 전날 밤, 그녀는 새벽 두 시가 넘어서야 들어왔다.


그날 밤만이 아니었다. 은서는 매일 밤늦은 시각에 흐트러진 모습으로 들어왔다. 어떤 때는 만취해 들어왔고, 어떤 때는 젖은 머리로 들어왔고, 어떤 때는 타인의 냄새를 묻혀 들어왔다.


묘숙은 그게 못마땅했다. 이번에는 또 누굴까?


옥토퍼시.


은서를 보면 왜 옥토퍼시가 생각날까? 007시리즈 13탄의 제목이 옥토퍼시였던가? 은서를 보노라면 자연스럽게 옥토퍼시가 떠올랐고, 이어 007 영화로 이어졌다.


왜 하필 옥토퍼시일까.


은서에게 남자는 많았다. 양다리도 아니고, 세 다리도 아니고, 네 다리도 아니었다. 은서는 여러 명의 남자에게 다리를 걸쳐놓고 있었다. 그러니 문어, 옥토퍼시일 수밖에.


묘숙은 은서의 방종한 생활을 다른 사람들이 알아차렸으면 하고 일부러 현관문에 사슬로 된 걸쇠까지 걸어두었다. 아마 잠금 장치가 더 달려 있었더라면 다 채워놓았을 것이다. 안전바도 걸고, 보조키도 채우고, 어떤 장사가 와도 열지 못하도록 단단히 잠가놓았을 것이다.


문은 묘숙에 의해 천천히 열려야했다. 잠금쇠를 열고, 걸쇠를 풀고, 그러고도 느릿느릿, 열려야 했다. 잠금쇠의 안전장치 기능들은 그렇게 자신들의 임무를 충실히 완수해야 했고, 존재를 드러내야 했다. 존재를 망각한다는 것, 본연의 임무를 방기하고, 방치당하는 거. 그것만큼, 실존을 위협하는 일이 또 있을까?


세상에 쓸모없는 것들이 없다지만 가만 둘러보면 세상에 쓸모없는 것들은 많았다. 생산과잉, 공급 과잉의 세상에서 그것들은 잉여라는 항목과 이름으로 한 데 뭉뚱그려져서는 음지에 처박히기 일쑤였다. 사람들은 지스러기나 처진 것들에게는 관심이 없었고,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으므로, 그들은 그렇게 잊혀 졌고, 폐기처분됐다.


묘숙은 그게 끔찍했다. 수확기에 공급 과잉으로 값이 폭락한 농산물들이 채 거두어지지 못하고 트랙터 바퀴에 무참히 짓이겨지는 풍경을 볼 때마다 그녀는 알 수 없는 화가 치밀었다. 넘쳐난다고 저렇게 깔아뭉개도 되나? 없는 사람한테라도 주지. 세상은 손톱만큼의 동정심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건 어디까지나 죄를 짓는 일이었다. 먹을 것을 함부로 한 죄. 비록 무정물이긴 하나 한때 세상에 존재했던 것들에 대한 무례와 무시의 죄. 아무리 하잘것없는 존재여도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자신 역시 공급 과잉의 잉여품이었다. 그러니 트랙터 바퀴 밑에서 짓이겨지는 그것들을 심상하게 넘길 수 없었다.


그렇게 문에 달려있는 잠금 장치들을 다 채우고 나서 묘숙은 은서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문을 열어주지 말까. 그녀가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못들은 척 그냥 내버려두었다가, 다음 날 아침에 그녀를 만나면 짐짓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너무 피곤해 곤히 자느라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고 거짓 변명을 늘어놓을까.


묘숙은 일인용 폭 좁은 침대에 누워 이불을 턱밑까지 끌어당겨 덮었지만 잠은 쉬 찾아오지 않았다. 다만 뭉근한 기운으로 전신을 지배했을 뿐, 죽음 같은 잠은 찾아와주지 않았다. 설령, 찾아왔다한들 묘숙은 자지 않았을 것이다. 육신에서 강단진 힘을 무르게 만드는 잠을 물리치며 은서가 들어오는 순간을 지켜보았다.


발칙하고도 앙큼한 계집 같으니라고.


전혀 의도하지 않았는데 저도 모르게 어기찬 소리가 입술 밖으로 새어나왔다.


밤마다 누굴 만나는지, 어디에서 무엇을 하다 들어오는지 은서는 늦게 들어왔다. 그리고는 다음 날 아침, 아무 일 없다는 표정으로 샴푸 냄새와 샤넬 N°5 향을 풍기며 방을 나섰다. 방금 물에서 끌어올려진 생물처럼 싱싱하고도 상큼한 얼굴로 방을 나서는 은서를 보노라면 묘숙은 이상한 배신감이 들었다. 아니, 그것은 분노였다. 세상을 속이는 은서에 대한 분노였고, 그런 은서에게 감쪽같이 속고 있는 세상에 대한 분노였다. 세상은 모두 은서에게 속고 있었다. 꼬리 아홉 달린 여우. 사람들의 기운을 빨아들여 원기를 보충하는 마녀. 그것이 묘숙이 생각하는 은서였다.


은서의 그 정숙하지 못한 사생활을 세상에 일러바치고야 말리라. 이중적이고도 모순투성이며, 표리부동한 은서의 얼굴과, 생활과, 남자관계를, 그녀와 연관된 모든 사람들은 알아야 했다. 그녀의 진실을. 방탕하고도 방종한 그녀의 사생활을. 그것은 자유롭거나 열정적이거나 정열적이거나 솔직하다는 말로 치장되거나 포장되지 않았다. 그저 단순하게 말하자면 문란할 뿐이었다.


사람들은 왜 그런 은서의 진실을 알아차리지 못할까. 왜 그럴수록 남자들은 은서와 시간을 함께 보내고 비밀을 공유하지 못해 안달을 부릴까. 보다 더 은밀하고, 보다 더 저릿하며, 보다 더 자극적인 시간들을 나누지 못해 조바심을 칠까.


세상은 알 수 없었고, 부조리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니, 세상도 세상이지만 정작 알 수 없는 것은 남자들이었다.


2:15


전자시계의 붉은색 숫자였다. 깜북깜북. 초침을 대신하는 쌍점은 일정한 주기로 명멸했고, 정확히 60번의 깜빡거림 끝에 분 단위의 숫자가 바뀌었다. 한밤중이었지만 원룸 주변에 설치돼 있는 보안등의 오렌지색 불빛이 방안의 어둠을 희석시켜 놓고 있었다. 그 불빛에 사물들은 또 다른 어둠의 덩어리로 희미하게 제 존재들을 드러내고 있었다.이제 조만간 그녀가 올 것이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하나 둘 셋 넷…… 하나 둘 셋 넷…… 그렇게 천까지 서른 번을 세고 서른한 번째 채우려 할 때 밖에서 은서의 기척이 들렸다.


탕탕탕.


예상대로 은서는 낮게 문을 두드렸다. 탕탕탕. 묘숙은 소리를 들었지만 단번에 일어나 열어주지 않았다. 한번으로는 부족했다. 탕탕탕. 그녀가 문 두드리는 소리에 어느 구석에서 깊은 잠을 자고 있던 고양이들이 깨어나고, 벌레들도 깨어나고, 강아지들도 깨어나고, 새들도 깨어나고, 종내는 이웃까지 잠에서 깨어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 귀를 쫑긋거리기를 기다렸다 그때 열어줄 것이다. 그래도 쉽게 열어주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 달콤한 잠을 방해하는 그 소리를 짜증스러워 해야 묘숙은 마지못해 열어줄 것이다.


“묘숙아, 나야, 나. 문 좀 열어줘.”


은서가 낮게 불렀다. 하지만 묘숙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묘숙이 의도한대로 은서는 소리를 높이고, 조심성을 잃어갔다. 탕탕탕. 거듭될수록 소리는 커져갔다.


“묘숙아! 묘숙아!”


쾅쾅쾅.


아마 발로 차는 듯 이번에는 소리가 달랐다.


그제야 묘숙은 천천히 일어나 의식을 집행하듯 단단히 잠겨있는 걸쇠들을 풀고 잠금장치들을 해제했다. 문을 열자 은서가 묘숙의 품안으로 안기듯 쓰러졌다.


“아이, 왜 이렇게 늦어? 빨리 좀 열어주지.”


샤넬 N°5 향에 담배냄새와 독한 알코올 냄새가 뒤섞여 은서에게서 나는 체취가 독하고도 고약했다. 얼마나 마셨는지 은서의 말은 연신 발음이 뭉개졌다.


“또 술이야? 밤마다 도대체 어디를 헤매다 들어오는 거야?”


묘숙은 은서를 부축하며 침대로 데려갔다. 은서는 쓰러지듯 침대에 누웠다. 아니, 묘숙이 그녀를 침대로 내팽개쳤다고 해야 옳았다. 묘숙이 팽개친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든 은서의 목에서 붉은 자국들이 보였다. 붉은 자리 가장자리는 분홍빛으로 번져있었지만, 자국의 중심은 검은 빛이 돌았다. 묘숙은 알았다. 그 붉은 자국이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지를. 무슨 자국인지를.


잠이 든 은서의 얼굴이 백목련처럼 하R다. 원래 흰 피부였지만 알코올 기운 탓인지 그 희디흰 피부가 더 희게 변해있었다. 그 하양과 붉음이 이상한 대조를 보이면서 그 붉은 자국은 더 붉게 도드라져 보였다. 은서의 숨이 불규칙적이었다. 그 들숨과 날숨을 따라 가슴이 들썩거렸다. 어떤 때는 높았다가 어떤 때는 잦아들었다. 피돌기를 따라 도는 알코올이 그녀의 숨쉬기마저 방해하는 모양이었다.


묘숙은 그런 은서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한 마리의 작은 토끼처럼, 한 마리의 작은 말티즈처럼, 한 마리의 작은 유니콘처럼, 잠에 빠져있는 그녀는 앙증맞았고, 순결해보였다. 적어도 그 순간만은 그랬다. 잠든 그녀의 얼굴은 천진난만해 보였고, 헤벌어진 입은 그만큼 순해보였다. 작게 보였지만 그녀는 기실 작지는 않았다. 키는 컸지만 몸피가 작았다.


저 몸피로, 어느 누군가에게 안겨 밤새 떨었으리라. 환희와 쾌감으로. 아니, 그 반대일까? 그냥 견디었을까? 잠시의 치욕만 참으면, 잠깐 동안의 능욕과 오욕만 참아내면 미래는 찬란하나니, 오로지 내일을 위해 우악살스런 남자들의 손길과, 뜨거운 숨결과, 구린내 나는 냄새들을 참아냈을까? 아니, 그것도 아닐까?


아니라면 그녀가 먼저 남자들을 유혹하고 더 깊은 쾌락 속으로 유영해 들어갔을까? 불꽃놀이를 하듯 몸 안의 피톨들이 그렇게 환희로 반짝였을까? 여전히 그녀의 가슴팍은 숨결을 따라 오르내렸다. 묘숙은 은서의 몸에 얼굴을 가져다댔다. 그리고는 무언가를 찾는 듯 코를 킁킁 댔다. 검붉은 자국이 나있는 목과, 쇄골 주변과, 단추가 풀어헤쳐져 젖무덤이 들여다보이는 가슴팍과 겨드랑이, 그리고 손과 손샅들에 코를 들이 대며 체취를 맡았다, 그곳에서는 한여름 느닷없는 소낙비에 매캐하게 풍기던 흙 비린내가 났다.


묘숙은 다시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 은서의 사타구니께로 얼굴을 가져갔다. 그곳에서는 은서의 냄새가 아닌, 다른 냄새가 감지됐다. 그것은 분명 타인의 냄새였다. 다른 남자의 흔적과 체취였다. 냄새는 강렬했다.


냄새가 사라지지 않고 진하게 남아있는 것을 보면 분명 나이 든 남자는 아니었다. 젊은 남자의 것이었다.


그때였다.


은서가 몸을 뒤척이면서 다리로 묘숙의 얼굴을 강타했다. 순간, 묘숙은 낮은 비명을 속으로 삼키며 바닥으로 나가떨어졌다. 은서의 다리가 강타한 코가 얼얼하다 못해 질금 눈물까지 맺혔다. 꼬리지느러미처럼 그녀의 다리는 탱탱하고도 또 힘이 넘쳐났다. 그녀가 인어였던가? 그러고 보니 인어공주 이야기 끝은 어떻게 되었지?


살았던가? 죽었던가? 아니면 왕자와 결혼했던가? 그래, 그녀는 공주에게 왕자를 양보하고 이슬로 사라졌었지. 아니, 물거품이었구나. 이제 모든 동화의 뒤는 다시 쓰여야 했다. 스스로가 쟁취하지 않으면 행복은 없는 법. 아무런 노력 없이 보장된 안온한 미래 따위는 없는 것이다. 누구에게 양보하는 따위의 멍청한 짓은 절대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지 팔자 지가 만든다는데 양보는 무슨. 자신의 내일을 위해 남의 입안의 것이라도 빼내어서 아금받게 여투어 두어야지. 헌데 니체가 그랬던가?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고?


묘숙은 눈을 흘기며 제 침대로 갔다. 그리고 반듯이 누워 이불을 목까지 끌어당기고는 눈을 감았다. 그 감은 눈으로 온갖 환영들이 흘러갔다.


그 밤 내내 환영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작가 한마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