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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이르는 길] 02화_레이스 팬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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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화_레이스 팬티

  • WHITE




사라지기 일주일 전, 그 전날 밤, 은서는 늦게 들어왔다. 늦게 들어와서는 침대에 쓰러지듯 누워 깊은 잠을 잤고, 아침에 늦어 허둥지둥 나간 것이 마지막이었다. 깨워달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늦다면서 은서는 모닝커피도 마시지 않고 방문을 나섰다. 얼굴에는 간밤의 취기가 불그레한 흔적으로 남아 있었지만 한창때인 스물두 살의 피부는 그 붉은 기운마저도 퇴폐적인 생기로 만들며 그녀를 더욱 매혹적으로 만들었다.


“야. 이거 치워놓고 가야지. 그냥 가면 어떻게 해.”


“갔다 와서 치울게.”


방 가운데, 아니, 정확히는 샤워부스 앞에 팬티를 벗어놓은 은서를 향해 묘숙이 소리쳤지만 그녀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건성 대답하고는 그대로 나갔다.



은서가 벗어놓고 간 팬티는 한낮에 불온했다. 흰색 레이스 팬티. 앞면은 모란인지 장미인지 모를 꽃송이들이 연한 핑크빛과 하얀 실로 정교하게 무늬져 있었다. 그녀의 은밀한 치부를 감싸고 있을 사타구니 주변에는 꼬불꼬불한 모양의 음모가 두 올, 레이스 올 사이에 박혀 있었다.


왜 모체를 떨어져 나온 것들은 처량하고 청승맞으며 불온해 보일까.


그렇게 은서가 아무렇게나 벗어 던져놓은 팬티를 주워 세탁통 속에 집어넣은 것은 자신이었다. 집어 들었을 때 팬티에선 냄새가 났다. 정액의 냄새였다. 그녀의 냄새도 섞여 있었지만 그것은 분명 정액 냄새였다. 그것도 싱싱한 남자의 냄새였다. 누구였을까. 회장일까? 아니면 부장? 그도 아니면 새로운 고객일까? 아니면 몹쓸 애인? 어쨌거나 남자인 것만은 확실했다.



은서는 자신이 선택했거나 간택 받았다. 마음만 먹는다면 모든 남자와 잘 수 있는 사람이 은서였다. 스물 두 살의 싱싱한 육체, 생의 활기로 넘치는 기운, 완벽에 가까운 외모는 모든 남자를 흡족하게 만드는 요소들이었다. 그들은 은서를 안음으로써 자신들의 남성성을 확인하고 매력을 확인했다.


“매력은 무슨 매력, 개뿔!”


묘숙은 그런 남자들을 향해 눈을 흘겼지만 그것은 질투로 치부되었다.


따지고 보면 묘숙도 어디 한군데 죽은 곳이 없는 얼굴이었다. 동그랗고 작은 얼굴은 귀여워 보였고 그 동그랗고 작은 얼굴에 걸맞게 눈, 코, 입도 작고 귀여웠다. 아니, 속쌍꺼풀진 눈은 결코 작다고 할 수 없었다. 코도 콧방울이 단정하고 오뚝 서있는 것이 결코 밉상은 아니었고, 입술은 늘 앵두처럼 붉었다. 고양이, 고양이 얼굴을 닮아있었다.



하지만 그런 귀여운 인상도 은서 앞에서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다들 시선이 은서에게 고정돼서는 묘숙의 존재 따위에는 관심도 두지 않았다. 간혹 묘숙은 서류철로 책상을 내리치거나 터무니없게 큰 소리를 냄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알렸지만 그때 뿐, 타인의 시선들은 다시 은서에게로 원위치 했다.



은서도 자신의 장점을 잘 알았다. 자신의 장점을 잘 아는 만큼 그걸 관리하는 법도 알았고, 남자를 자신의 손안에 넣는 방법도 알았다. 함부로 주는 것 같았지만 함부로 주지 않았고, 함부로 자신의 문을 여는 것 같았지만, 함부로 열지 않았다. 아니, 반대였다. 함부로 열지 않는 것 같았지만 함부로 여는 사람이 은서였다. 함부로 여는 것과 함부로 열지 않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그것은 요부이냐, 정숙한 여자냐를 가리는 기준이고, 그런 점에서 그녀는 결코 정숙한 여자가 아닌 것이다.


팬티뿐만이 아니었다. 전날 은서가 신은 스타킹은 물론이고, 흙이 묻은 티셔츠를 세탁통 속에 넣은 것도 자신이었다.


도대체 어디서 뭘 했는지 티셔츠에는 흙이 잔뜩 묻어 있었다. 그것도 등판에. 흙만 묻은 것이 아니었다. 푸릇푸릇 풀물이 배인 자리에는 짓이겨진 풀잎이 들러붙어 있었다.



이번뿐이 아니었다. 은서는 한 번도 제 빨래 감들을 제 손으로 단속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생리혈이 묻은 팬티까지도 묘숙의 손을 빌려 해결했다. 물론 생리혈이 묻은 은서의 팬티를 묘숙이 직접 빨지는 않았다. 옛날 어머니가 한 대로 비누거품 묻혀 대야에 넣고 푹푹 삶으면 눈부시게 하얘지련만, 은서의 팬티는 삶기엔 적합하지 않았다. 가느다란 실로 직조된 레이스 팬티는 조금만 힘을 주어 비틀어 짜도 금방 찢어질 것처럼 약했기 때문에 삶을 수가 없었다.


“이런 건 말이야. 세탁망에 넣어 돌려야해. 아니면 주물주물, 손으로 빨거나.”


어떻게 그런 걸 입냐는 묘숙의 말에 은서는 세탁법을 일러주며 지갑에서 지폐 두 장을 꺼내 미안해라는 말과 함께 건넸다.


“미안해. 너도 이런 거 입어봐. 느낌이 달라.”


“너나 많이 입어라.”


묘숙은 잠시 망설이다 은서가 내민 지폐를 받아 자신의 책상 서랍에 넣으며 대답했다.


“그런 게 아니라니까. 야, 사고 나봐. 그러면 대접이 달라진다. 속옷을 얼마나 고급스럽게 잘 입었느냐에 따라 처치도 달라져.”


“됐어.”


“얘는 왜 이렇게 선머슴 같을까?”


선머슴 같다는 은서의 말에 묘숙은 내상을 입었다. 자신은 여자였다. 누구보다 레이스 팬티가 입고 싶었고, 남자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싶었고, 사랑하고 싶은 여자였다.



패티 김은 그랬다. 속옷은 무조건 100% 실크로 입는다고. 속옷을 잘 입는 사람이 진정한 멋쟁이라고. 그리고 무대에 오르는 신발은 절대 외출할 때 신지 않는다고 했다. 그 구두 밑창에 흙을 묻히고 싶지 않아서였다고 했다. 그게 바로 팬들에 대한 예의이자 인기로 먹고 사는 가수로서의 자기 관리라고 했다.



저도 그런 여자가 되고 싶었다. 속옷은 레이스보다 더한 100% 실크로 입고, 구두도 때와 장소에 따라 선택해 신는 그런 여자가 되고 싶었다.


“미안해, 부탁할게.”


은서는 만 원짜리 두 장으로 묘숙에게 자신의 빨래 감들을 넘겼다. 묘숙은 그 빨래 감들을 넘겨받을 때 무참하거나 분노가 일지는 않았다. 다만 노력의 대가치고는 두 장의 지폐가 모자라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하지만 묘숙은 은서의 팬티를 손으로 빨지 않았다. 빨 수는 있었으나 그러고 싶지 않았다. 더불어 자신의 팬티도 손으로 빨지 않았다.



은서에게 그런 팬티는 많았다. 어떻게 입을까 싶은, 입는 것이 오히려 불편할 듯싶은 그런 팬티들. 한 줄로 이루어진 끈 팬티부터 시작해 내부가 환히 드러나 보여 입으나 마나해 보이는 망사 팬티까지, 아직 상표도 뜯지 않은 팬티가 그녀의 옷장에 상자째 들어 있었다. 그것도 여러 개나. 자신의 순면 팬티와는 달랐다. 아니 그것도 100% 순면 팬티가 아니었다. 나일론이 섞인 무지의 팬티였다.



그것은 마트에서 한 장에 천 원씩 팔던 Made in China 제품이었다. 가끔 은서는 묘숙의 그런 팬티를 보고는 입가를 비틀며 짧게 웃음을 날렸다. 뭐라고 말을 하는 것보다 그 말 없는 웃음이 묘숙으로 하여금 더 창피스럽게 만들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묘숙은 언제나 자신의 팬티를 다른 빨래 감에 숨겨 치워놓곤 했다. 옷을 갈아입을 때도 은서가 없는 곳에서 갈아입었다.


“기집애, 같은 여자끼리. 뭐가 부끄러워 숨는 거야? 불편하게 거기서 입지 말고 나와서 입어.”


은서가 팬티를 들고 샤워부스 속으로 들어가는 묘숙의 등 뒤에 대고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묘숙의 자존심이었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묘숙은 은서를 경멸했다. 그녀의 삶보다 자신은 훨씬 담백하고, 정결하고, 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노라 자부했고, 스스로가 대견했다. 헌데 그런 삶을, 자존감을, 속옷 하나로 무너뜨릴 수 없었다.



히지만 이상한 일은 그녀가 사라진 뒤에 일어났다. 그토록 환하고 빛나고, 고급스럽고 부럽기만 하던 그녀의 레이스 팬티가, 화려하던 속옷과 값나가는 옷들이, 그녀가 자취를 감추고 난 뒤부터 오히려 청승맞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온기를 잃은 속옷은, 주인을 잃은 옷들은, 더 이상 빛나거나 값나가 보이지 않았다.



묘숙은 붙박이 옷장을 열었다. 채 날아가지 않은 페인트의 독한 냄새가 압축 톱밥의 냄새와 섞여 맵게 코끝으로 파고들었다. 묘숙은 줄줄이 걸려있는 은서의 옷들을 바라보았다.



라쿤털이 목둘레를 따라 붙어있는 패딩코트며 레오파트 문양의 퍼 반코트, 분홍빛 실크 블라우스와 부드러운 양가죽으로 되어있는 푸른색 반코트… 종류도 많았고 가짓수도 많았다. 묘숙은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옷들을 바라보았다.


그 옷들을 바라보는 묘숙의 시선이 진중했다. 무얼 고를까. 아니, 무얼 입을까.


묘숙은 그녀의 옷 가운데 하나를 꺼내들었다. 모와 알파카가 섞인 빨간색 후드 반코트였다. 옷은 가볍고 따듯했다. 나일론 소재의 자신의 옷하고는 비교할 수 없이 가볍고 따듯했다. 폴리에스테르가 70프로 이상을 차지하는 자신의 코트는 무겁기만 하고, 하나도 따듯하지 않았다.



묘숙은 그녀의 표정을 흉내 내며 빨간 후드 반코트의 팔에 손을 집어넣었다. 하지만 반코트의 밑단은 종아리에 닿았고, 품은 작았다.


은서는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반면 자신은 키가 작고 살집이 컸다.



묘숙은 미간을 구기며 옷을 벗어 제자리에 걸었다. 그리고 손을 탄 흔적이 없도록 처음 있는 그대로 자리를 잡아놓았다. 아직 포장지도 뜯지 않은 속옷 상자가 있었지만 손을 대지는 않았다.



은서가 돌아올 때까지 그녀의 물건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야 했다. 돌아온다면, 만약 돌아온다면, 모든 것은 다 처음 그대로 돌아갈 것이다.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그렇게. 아무도 그녀의 부재를 문제 삼지 않고 그렇게 지나갈 것이다.


그러니 그녀가 돌아올 때를 대비해 그녀의 물건은 처음 그대로, 원래대로, 있어야 했다.


묘숙은 붙박이장의 문을 닫았다.

작가 한마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