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rybook

[너에게 이르는 길] 04화_붉은 자국

이전 다음
최상단 최하단

04화_붉은 자국

  • WHITE

묘숙은 침대 가에 걸터앉아 은서가 아침 햇살에 미간을 구기며 일어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앉아 은서가 깨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처럼 묘숙의 얼굴에서 잠의 기미는 말끔히 가시고 없었다.


“그 지경으로 취해 들어오다니. 도대체 어젯밤에는 누구랑 있었던 거야?”


채 씻지도 않고 잠든 탓에 화장이 얼룩져 있는 은서의 얼굴을 보며 묘숙이 물었다. 지워진 눈썹 화장은 눈썹 뼈 주변에 검은 기미로 남아있었고, 모공까지 침투한 B.B의 흔적은 은서의 창백한 낯빛과 함께 섞여 백합꽃 색을 띄고 있었다. 차라리 그 얼굴빛이 지나치게 희다 못해 살아있는 사람의 얼굴 같지 않았다.


“몇 시야?”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오는 빛살에 눈이 아픈 듯 은서는 미간을 찡그리며 실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런 은서의 음성 끝이 갈라졌다.


8:33


붉은 색의 시간이었다.


“늦었네.”


시간을 확인한 은서는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허둥댔다. 그런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묘숙은 심문하듯 다시 물었다.


“부장이야?”


“뭐가?”


“어젯밤 같이 있었던 사람 말이야.”


“아니.”


“그럼 회장?”


그렇게 물었지만 묘숙은 어젯밤 은서에게 남아있던 진한 체액의 냄새로 미루어보아 회장은 아닐 것이라고 짐작했다.


“아니.”


역시나 은서는 부정하며 길게 하품을 빼문 채 수건을 찾아들었다.


“그럼 진태 씨?”


“아니라니까. 뭐가 그리 궁금해? 묻지 마.”


은서는 사뭇 짜증을 내며 몸에 걸치고 있던 옷을 다 벗고 샤워 부스로 들어갔다. 하나하나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던 옷들이 바닥으로 떨어질 때마다 은서의 나신이 눈부시게 드러났다.


그래, 정말 은서가 인어였구나. 탄성이 절로 나왔다.


미끈한 라인. 탄력 있는 피부. 완급을 보이는 곡선과 풍만한 엉덩이, 그리고 처진 데 없이 주발 모양으로 올라붙은 가슴까지. 어디 한 군데 죽은 데가 없었고, 아쉬운 데가 없었으며, 나무랄 데가 없었다. 저런 육신을 가진 은서는 어떤 기분일까? 자신 역시 나올 데 나오고 들어갈 데 들어가 있는 보통의 몸매를 가졌지만 번번이 은서의 나신을 볼 때마다 묘숙은 자괴감이 들었다.


인어공주의 끝은 인어공주가 다시 인간으로 환생하는 것으로 바뀌어야 했다. 그렇다면 인어공주는 은서가 될 지도 모른다. 저 유연한 곡선의 나신을 가진 그녀가.


묘숙은 은서의 벗은 몸을 눈으로 좇으며 인어공주를 떠올렸다. 방금 전 아무렇지 않게 드러내 보이던 은서의 젖가슴에서 유두 끝이 조금 부풀어 있는 것 같았다. 유두 주변의 꽃 판 위아래로 검붉게 피멍이 들어있는 것이 분명 누군가의 이빨자국이었다.


간밤에 누군가 은서의 유두를 물고, 빨고, 깨문 모양이었다.


저 이빨의 흔적. 저 유린의 흔적. 저 절정의 흔적. 비교적 고른 치열을 가진 그는 과연 누구일까.


이상하게 은서의 몸에 남아있는 남자의 흔적을 목도하자 묘숙은 유두가 서는 듯 했다. 은서의 남자들이 묘숙의 은밀한 흥분을 자극했다. 은서의 몸에 남겨놓은 정액의 냄새와, 목의 붉은 자국과, 유두에 남아있는 이빨의 흔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남자. 도대체 그는 누구일까? 누군데 저렇게 자신의 흔적을 낭자하게 남겨놓았을까. 정체를 알지 못했으므로 묘숙의 성적 흥분은 더 배가 되었다.


그녀는, 은서는, 지속되는 절정의 쾌감에 목을 뒤로 젖힌 채 비명 같은 탄식들을 쏟아내며 경련하듯 몸을 떨었을까? 남자는 그런 은서를 보며 가학적 쾌감을 더했을까?


정말 많이 늦었던지 다른 때보다 일찍 샤워부스에서 나온 은서는 목에 난 붉은 자국에 멘톨향이 나는 살색의 파스를 붙이며 중얼거렸다. 변태 새끼. 붙이면서 은서는 말했고, 묘숙은 들었다. 아니, 사실, 은서가 그런 말을 했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냥 혀를 찼는지, 그저 미간만 찌푸렸는지 묘숙은 자신의 기억을 믿지 못했다. 하지만 묘숙은 그녀가 그런 말을 했다고 생각했고, 믿었다.


변태 새끼라니. 변태 새끼는 누구였을까.


“보여?”


은서는 묘숙에게 파스를 붙인 자신의 목을 보이며 간밤의 흔적이 보이는지를 물었다. 파스는 정확히 붉은 자국을 가리고 있었고, 파스 가장자리로 붉은 기운만 긴가민가 드러나 보였다.


묘숙은 그게 못마땅했다. 붉은 자국은 보다 더 선명하게 드러나 있어야 했는데 파스에 감쪽같이 가려져서는 비밀로 묻혀버리다니. 앙큼한 것 같으니라고. 은서는 저 방탕한 증거를 열심히 일한 흔적으로 위장하고는 순진한 역을 맡은 여주인공처럼 천연덕스럽게 연기하겠지. 묘숙은 문득 은서에게 달려들어서는 머리카락을 뜯어놓고 목에 붙여놓은 파스를 떼어내고 싶었다. 그리고는 엉덩이가 터지도록 몽둥이로 때려서는 방밖으로 쫓아내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녀의 가슴에 창녀라는 단어를 벌겋게 불에 덴 인두로 새겨놓고 싶었다. 아니, 창녀보다는 갈보가 낫겠다. 갈보. 걸레.


“보이냐고!”


거듭되는 은서의 물음에 묘숙은 생각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제야 은서는 미간에 잡혀있던 주름을 풀고는 이리저리 몸을 틀어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쳐보더니 핸드백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무언가를 찾았다.


“응? 어디 갔지?”


처음에는 심상하게 핸드백 속을 뒤지던 은서의 손길이 점차 빨라지더니 이내 거칠어졌다. 찾는 무언가가 없는 모양이었다.


묘숙은 그런 은서를 가만히 바라보고 앉아있었다. 침대 가에 앉은 그대로.


“혹시 자그마한 패물 상자 못 봤니?”


은서는 핸드백 속에 시선을 던져둔 채 물었다. 그렇게 묻는 은서의 미간에는 조금 전 풀렸던 주름이 다시 잡혀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전보다 훨씬 깊었고, 높았다.


“패물상자라니?”


묘숙이 반문했다.


“반지 케이스 말야.”


“무슨 반진데?”


말끝마다 되묻는 묘숙의 말에 은서는 낮게 혀를 찼다.


“분명 여기에 넣어두었는데.”


은서는 조금 전 훑고 지나갔던 자리를 되짚어 뒤져보았지만 결과는 같았다.


“잘 생각해봐. 어제 오면서 어디에 흘렸을 수도 있고. 아니면 어딘가에 두고 왔을 수도 있잖아.”


묘숙은 마치 감독관이라도 되는 듯 팔짱을 낀 채 허둥대는 은서를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그럴 리가 없어. 어제 받아서 여기에 잘 넣어두었단 말이야.”


“그럼 그게 어디 갔겠니?”


은서는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벗어 던져두었던 바지 주머니를 뒤졌다. 하지만 나오는 건 솔기에 솜처럼 뭉쳐져 있던 먼지거나 짓이겨진 이파리들뿐이었다.


“미치겠네.”


그녀는 흘깃 시계를 훔쳐보더니 찾는 것을 단념하고는 세탁의 대가로 만 원 짜리 지폐 두 장을 건네주고는 허겁지겁 방을 나섰다. 지금 나가도 지각이었다.


방문을 나서는 은서의 뒤에서 꼬리가 살랑거렸다. 털이 소복하고 탐스러운 꼬리였다.


그렇게 그녀는 이 방을 나갔다. 그리고 끝이었다.


정말 그녀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아무도 그녀가 간 곳을 알지 못했다.


작가 한마디